『옥스퍼드 세계사』 4부 기후의 반전 : 전염병과 추위 속에서의 확산과 혁신 제8장 정리 수렴하는 세계: 경제적·생태적 조우 1350년~1815년 1350년 이후 세계는 해상 교역로를 통해 집단 사이 연계가 긴밀해지고 물동량이 늘어남에 따라 물자 및 인간과 함께 미생물도 지구 구석구석까지 퍼져나갑니다. 이 시기의 핵심은 전 세계적 접촉과 교환이 더 잦아지고 격렬해졌다는 점입니다. 1350년부터 1815년까지 세계 경제는 성장했지만, 1인당 부가 크게 늘지는 않았습니다. 그 이유는 세계 인구도 함께 증가했기 때문입니다. 증가한 인구는 새로운 지역들에 정착해 더 많은 식물을 재배하고 향후 200년간 펼쳐질 극적인 변화를 마련할 기반을 다집니다. 2. 동양의 환경, 경제, 확장 14세기 중엽 이후 중국은 가래톳 페스트를 서쪽으로 두 번째로는 명나라 영락제의 해외 원정이 있었습니다. 페스트는 유럽 대부분에 확산되었고 장소에 따라 인구의 3분의 2까지 줄어들았습니다. 흑사병이 인구와 심리에 재앙과도 같은 충격을 주었고 당시 악령, 마녀, 유대인을 흑사병의 원인으로 주목하기도 했습니다. 유럽인구는 8000만 명에서 1400년 6000만 명으로 줄었다가 1500년에는 다시 회복했습니다. 흑사병으로 인해 유럽의 농노제는 사라지고 노동자들이 봉기하기도 했습니다. 일부 농민이 토지를 얻기는 했으나 대부부의 농민은 얻은 것이 전혀 없었습니다. 중국의 두 번째 이동은 명나라 정화의 원정입니다. 정화의 함대는 규모 면에서 대단했지만, 그것이 지속적인 해양 제국이나 대양 횡단 교역망으로 이어지지는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중국은 이미 거대한 내륙경제와 조공질서, 동아시아·동남아시아 교역망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즉, 중국이 바다를 몰랐거나 기술이 부족해서 대양 진출을 하지 아니라 필요성과 동기가 달랐던 것입니다. 3. 지역별 교역망 우리가 흔히 “근대 세계경제는 유럽이 만든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16~18세기까지도 아시아는 거대한 생산지이자 소비지였습니다. 유럽인은 아시아 상품을 원했지만, 아시아는 유럽 상품을 그만큼 필요로 하지 않았습니다. 이 시기 세계무역에서 중요한 매개는 은이었습니다. 유럽인은 중국의 차, 도자기, 비단 등을 사기 위해 은을 지불했습니다. 아메리카의 은광, 특히 포토시 같은 남아메리카 은광은 세계 경제를 바꾸었습니다. 지역별 교역망은 선박 기술과도 연결됩니다. 인도양의 다우선, 중국의 정크선, 지중해의 갤리선은 각각 다른 바다와 교역 환경에 적합한 배였습니다. 교역망은 바람, 해류, 항해술, 선박 구조, 항구, 상업 관습, 신용, 군사력, 종교적 관계가 함께 뻗어 나갔습니다. 4. 서양의 환경, 경제, 확장 서양은 오래전부터 동양의 부유한 지역과 간접적으로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베네치아와 제노바 상인들은 북아프리카와 중동의 무슬림 상인을 통해 인도양 교역망과 연결되었습니다. 즉, 유럽은 아시아 상품을 원했지만, 그 상품에 접근하려면 중간 상인을 거쳐야 했습니다. 이 구조가 이베리아 반도의 포르투갈과 에스파냐에게는 불리하게 느껴졌습니다. 대항해는 단순히 경제적 욕망만의 결과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상업적 욕망, 반이슬람 정서, 십자군적 상상력, 왕권 강화, 항해기술, 군사기술이 결합한 사건이었습니다. 명나라의 원정은 기존 질서의 과시와 외교적 확인에 가까웠다면, 포르투갈과 에스파냐의 원정은 새로운 교역로와 지배공간을 확보하려는 팽창적 성격이 강했습니다. 그 결과 유럽인의 해양 팽창은 아프리카 해안, 인도양, 아메리카, 태평양으로 이어졌고, 이후 식민지·노예무역·플랜테이션 체제와 결합했습니다. 5. 유럽인과 비유럽인의 관계: 협력, 경쟁, 회피 유럽 상인과 군대는 아시아와 아프리카에서 언제나 강자가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현지 통치자와 협상하고, 허가를 받고, 항구를 빌리고, 물자를 구입하고, 통역과 중개인을 활용해야 했습니다. 포르투갈, 네덜란드, 영국이 인도양과 동남아시아에서 활동할 수 있었던 것은 현지 세력과의 협력, 경쟁, 충돌이 복합적으로 작용했기 때문입니다. 유럽이 항상 주도한 것이 아니라, 때로는 현지 권력에 의존했고, 때로는 쫓겨났고, 때로는 제한된 공간에서만 활동했습니다. 이 시기 해상교역의 결과로 유럽인과 현지인이 생물학적·문화적으로 연결된 새로운 통혼 공동체가 생겼습니다. 마닐라, 바타비아, 나가사키 같은 항구도시에 중국 상인 공동체와 유럽 상인들이 등장합니다. 항구도시는 단순한 교역 장소가 아니라 언어, 종교, 인종, 음식, 기술, 가족제도, 법적 관습이 뒤섞이는 장소였습니다. 서양 역사서에서는 아시아와 아프리카의 큰 국가들이 토지세에 의존했기 때문에 교역을 경시했다고 보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교역 문제는 그렇게 단순하지 않으며, 아시아와 아프리카의 정치권력도 교역에 다양한 방식으로 관여했다고 설명합니다. 6. 대서양 세계의 인구와 식물, 플랜테이션 1492년 이후 아메리카, 유럽, 아프리카, 아시아 사이에는 식물·동물·미생물·사람이 대규모로 이동했습니다. 이를 흔히 콜럼버스 교환이라고 부릅니다. 아메리카에서는 유럽인이 가져온 전염병 때문에 원주민 인구가 급감했습니다. 반대로 아메리카에서 감자, 옥수수, 고구마, 토마토, 고추, 카카오, 담배 같은 작물이 유럽·아시아·아프리카로 퍼졌습니다. 이 작물들은 인구 증가와 식생활 변화에 큰 영향을 주었습니다. 감자는 추운 기후와 척박한 토양에서도 비교적 잘 자랐고, 단위 면적당 열량 생산성이 높았습니다. 그래서 유럽 일부 지역에서는 감자가 인구 증가의 중요한 기반이 되었습니다. 대서양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상품 중 하나는 설탕이었습니다. 설탕은 단순한 기호품이 아니라 대서양 경제를 움직인 핵심 상품이었습니다. 설탕 생산에는 막대한 노동력이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카리브해와 브라질에서는 노예 노동에 기반한 대규모 플랜테이션이 발전했습니다. 설탕 가격 상승은 노예 노동력의 높은 비용을 상쇄했고, 카리브해는 아메리카에서 가장 부유한 경제권 중 하나로 변했습니다. 1350년부터 1815년 사이 세계 경제가 커지면서 노예의 수도 크게 늘었습니다. 산업혁명 이전에는 생산성을 높이기 위해 기계를 대규모로 투입하기 어려웠기 때문에, 노동력 자체가 핵심 생산요소였습니다.대서양 노예무역은 아프리카인을 아메리카 플랜테이션으로 강제로 이동시켰습니다. 이것은 엄청난 폭력과 고통을 동반한 세계경제의 형성이었습니다. 중요한 점은 아프리카를 단순히 수동적 피해자로만 볼 수 없다는 것입니다. 물론 노예무역의 고통은 결코 축소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대서양 경제에서 아프리카는 노예 노동의 공급처를 넘어 다양한 교역의 행위자이기도 했습니다. 아프리카를 단순히 “끌려간 사람들의 대륙”으로만 보지 않고, 폭력적 세계경제 속에서도 다양한 정치세력과 상인들이 선택과 협상을 했던 공간으로 봅니다. 7. 대서양 경제와 유럽의 성장 과거에는 과학혁명, 합리성, 계몽주의, 근면성, 자본주의 정신 같은 내부 요인으로 유럽의 우위를 설명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러나 최근 세계사 연구는 유럽의 성장이 외부 세계, 특히 아메리카와 대서양 경제에서 얻은 자원과 노동력에 크게 의존했다고 봅니다. 중국과 인도양 세계에서는 유럽산 제조품이 큰 경쟁력을 갖지 못했습니다. 유럽인은 중국 차와 도자기, 인도 면직물을 원했지만, 아시아는 유럽 상품을 그만큼 필요로 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유럽은 은으로 물건값을 내야 했습니다. 반면 아메리카에서는 유럽산 제조품이 중요했습니다. 인도양과 중국에서와 달리, 아메리카에서는 유럽산 제조품이 상당히 중요했고, 1750년 이후 영국이 압도적 우위를 점했습니다. 즉, 유럽은 아시아 교역에서는 적자를 보았지만, 대서양 경제에서는 설탕·담배·금·은·노예노동·식민지 시장을 통해 막대한 이익을 얻었습니다. 이 대서양 경제가 이후 영국과 서유럽의 힘을 키우는 중요한 기반이 되었습니다. 유럽은 제조품과 선박, 자본을 제공했고, 아프리카에서는 강제로 동원된 노예 노동력이 이동했으며, 아메리카에서는 설탕·담배·면화·금·은 같은 상품이 생산되었습니다. 이 과정은 근대 자본주의의 본원적 축적과도 연결됩니다. 8. 결론 1350년부터 1815년까지 세계는 이전보다 훨씬 강하게 연결되었습니다. 해상 교역로는 대륙들을 묶었고, 은은 세계경제의 순환을 가능하게 했으며, 아메리카산 작물은 유라시아와 아프리카의 인구 증가를 도왔고, 전염병은 아메리카 원주민 사회를 파괴했으며, 노예무역과 플랜테이션은 대서양 경제를 성장시켰습니다. 그러나 이 변화는 산업혁명 이후 200년의 변화만큼 급격하지는 않았습니다. 여전히 세계는 농업경제의 한계 안에 있었습니다. 경제는 성장했지만 인구도 함께 증가했기 때문에 1인당 부는 크게 늘지 않았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