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싸 장자》 기픈옹달/ 비일비재 ‘인싸’라는 단어의 유행은 그만큼 지금이 ‘아싸’들의 시대가 되었음을 말해준다. 이 사회의 중심에 아주 적은 수의 ‘인싸’가 존재한다면, 대다수의 ‘아싸’는 ‘인싸’의 삶을 지켜보는 존재다. ‘아싸’라는 정체성은 좀처럼 긍정하기도 힘들고, 그렇다고 쉽게 벗어날 수도 없는 그런 상황에서 탄생한다. 자신이 ‘아싸’라는 인식은 사회적 쓸모를 고민하면서 진행된다. 스스로 환영받지 못하고 쓰이지 않는 존재라는 좌절감 속에서 ‘아싸’는 완성된다. 이 책 《아싸 장자》는 말하자면 고대 중국에서 ‘아싸’의 조상을 찾는 이야기다. 공자, 맹자, 노자, 사마천과 비교되는 장자. 저자의 주장대로 장자는 정말 ‘아싸’였을까? 그렇다면 그에게서 무엇을 배울 수 있을까? 철학은 사유방식의 문제이자 삶의 태도를 가다듬는 문제이다. 섣부른 위로나 맥락 없는 질책 대신 우리에게 철학이 필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러니까 철학은 생존방식이다. 당연히 ‘아싸’의 시대에는 ‘아싸’의 생존방식이 필요하다. “공자의 후예들 가운데 바로 그런 이들이 있었습니다. 쓸모 있는 존재가 되기 위해 끝없이 애쓰는 이들. 관직에 올라 고을을 다스리고 나아가 나라를 다스리겠다는 꿈을 품은 이들. 인싸가 되기 위해 사회적 자본에 목마른 이들. 그들은 세계를 쓸모와 쓸모없음으로 갈라놓습니다. 아싸 장자의 이야기에 별 관심을 기울이지 않습니다. 무엇하러 그런 헛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하는지 도통 알 수 없다며 혀를 끌끌 찰 것입니다.” (54쪽) “장자는 맹자와 달리 상하규범 세계의 바깥에 있습니다. 맹자가 위로, 중심으로 올라가려 했다면 장자는 위로, 중심으로 올라가기를 포기한 인물입니다. 아니, 상하위계적 질서가 가지고 있는 근본적 폭력성을 꿰뚫어 보았다고 할까요. 이런 까닭에 장자에는 피지배자로서의 정체성이 뚝뚝 묻어납니다.” (78쪽) 공자와 공자의 제자들이 쓸모 있는 존재가 되라고 말한다면 맹자는 질서에 순응하라고 가르친다. 공자는 사회에서 인정받기 위한 스펙 쌓기를 강조하고, 맹자는 학자라는 위치에서 백성부터 왕에 이르기까지 모두를 계몽하고 훈계한다. 아무리 봐도 ‘아싸’의 스타일은 아니다. 쓸모를 따지기 위해서는 누가 쓸모의 기준을 정하는지부터 물어야 한다. 장자는 이 쓸모라는 잣대의 자의성과 폭력성을 이해한다는 점에서 ‘아싸’가 누구인지 아는 이다. “여기서 <노자>의 무위無爲가 지향하는 목적이 밝혀집니다. 무불치無不治, 다스리지 못함이 없음. 이처럼 무위는 통치의 욕망, 그것도 만물과 만민을 향한 욕망을 향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노자>야말로 진정한 인싸, 초월적 권력의 정점에 홀로 선 이를 위한 철학이라 할 수 있습니다.” (102쪽) “장자는 이렇게 흩어지는 존재로서의 소멸을 이야기합니다. 영원을 욕망하는 사람에게 장자가 던지는 미래는 영 불편하고 두렵게 느껴질 것입니다. ‘나’라는 존재를 이렇게 산산이 흩어버리다니. 그러나 필멸의 존재, 앞으로 소멸할 존재로서의 삶을 정직하게 이야기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124쪽) 노자는 고대 중국 철학자 중에서 유난히 장자와 많이 얽히는 인물이다. 과연 노자는 장자와 비슷한 결의 인물일까? 《아싸 장자》의 저자는 의외로 노자에게서 ‘인싸’의 면모를 발견한다. 권력을 욕망하며 저항 없이 자연스럽게 통치하겠다는 야심이 노자가 말하는 ‘무위’에 가깝다. 노자와 장자가 말하는 ‘자연’의 의미는 이처럼 상반된다. 영원성의 문제보다 필멸하는 존재의 운명에 주목하는 장자가 바로 ‘아싸’처럼 현실을 살아가는 이다. “<사기>에는 두 가지 방향이 공존한다 할 수 있습니다. 국가의 정통성을 서술하며 중심으로 나아가는 역사, 인싸의 글쓰기가 있다면 국가의 폭력에 내몰린 삶들을 쓰는 이야기, 아싸의 글쓰기가 있습니다. 정통과 반정통의 공존, 인싸와 아싸의 글쓰기가 뒤섞여 <사기>라는 대작을 낳았습니다.” (137 ~ 138쪽) “장자에게 쓰기, 언어화하는 과정은 부질없는 헛수고에 불과했습니다. 사마천은 <사기>를 통해 설명되지만 장자는 <장자>를 통해 설명되지 않습니다. 장자는 <장자>에 등장하는 여러 인물 가운데 하나에 불과합니다. 장자는 작가라는 특권적 자리에 앉아있지 않습니다.” (140쪽) 공자, 맹자, 노자에 비하면 사마천은 장자와 비슷한 구석이 많은 인물이다. 그렇다면 사마천도 ‘아싸’라 할 수 있을까? 사마천 자신이 바로 국가 폭력의 희생자이기에 그는 자신과 비슷한 이들의 좌절된 욕망에 주목한다. 이 시선은 여전히 ‘인싸’로 살아가기를 원하는 사마천을 말해준다. 반면 장자는 문자의 효용에 의문을 제기하는 작가로서 지식인의 특권을 거부하며, ‘인싸’의 욕망과는 다른 ‘아싸’의 생존방식과 태도를 제시하는 이다. “열자는 손수 밥을 지어 아내를 먹이며 사람처럼 돼지를 길렀다고 이야기합니다. 밥을 지어 식구를 먹이는 일, 그리고 또 다른 존재를 챙기는 일. 열자의 일상은 그렇게 소박하면서도 자질구레합니다.“ (185 ~ 186쪽) ”혼돈은 우리가 영원히 함께해야 할 세상의 진면목을 가리키는 표현이라 할 수 있습니다. 문득 우연히 어쩌다 답을 찾았다 하더라도 곧 그 답을 버려야 합니다. 다시 다른 질문을 만나야 하기 때문이며, 설령 가만히 머물러 있다고 하더라도 새로운 질문이 도래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끊임없는 질문을 붙잡아 한 걸음씩 나아갈 것. 이것이 장자의 방식입니다.“ (190쪽) ”이렇게 장자는 지식으로부터 엇나가고 있습니다. 무엇을 아는 것보다 무지가 중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렇다고 무지에 멈춰 있어서는 안 됩니다. 장자가 말하는 무지란 앎과 함께 찾아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알려고, 떠나려고 애쓰는 자만이 이 무지를, 혼돈스런 일상을 살아갈 힘을 다르게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191쪽) 이쯤 되면 장자가 바로 우리 ‘아싸’들의 조상임을 인정해야 한다. 아무런 영광도 없이 장자는 우리에게 삶을 호소한다. ‘인싸’가 세상의 기준에 맞춰 충실하게 스펙을 쌓으며 사는 이라면, ‘아싸’는 세상이 어쩐지 자신을 환대하지 않음을 일찍부터 느껴온 이다. ‘아싸’의 질문은 ‘인싸’와 다르고 답도 다르다. 다를 뿐 아니라 정해진 답이 없다는 사실도 알아야 한다. ‘아싸’는 정답을 수호하는 지식의 권위를 부정하면서, 혼돈을 다시 바라보아야 한다.
장자는 지식과 깨달음을 얻으러 떠났다가 돌아온 열자의 이야기를 전한다. 원하던 지식을 얻지 못하고 집에 돌아와 아내를 위해 밥을 짓고 돼지를 사람처럼 여기며 돌보았다는 열자. 그는 세상에 위계와 각자의 쓰임이 있다는 옛 성현의 말이 진리가 아님을 간파했다. 엉뚱한 답인 줄 알았으나, 질문 자체를 다르게 하면서 얻은 전복적인 답이었다. 앎이 혼돈을 몰아내기는커녕 도리어 삶은 늘 혼돈과 함께라는 사실을 감내할 용기는 그런 전복에서 생겨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