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기

제목[중국인문] 붉은 별을 찾아서 2024-03-18 18:3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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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별을 찾아서 

03.18 우리실험자들 울긋불긋 차이나 발제문 



지난 2월 상하이 여행 중에 신천지 일대의 일대회지를 찾았다. 굵은 빗줄기가 몰아쳐 신발이 모두 젖은 상태였다. 이전 여행에서는 시간이 늦어 일대회지를 방문하지 못했던 것이 아쉬웠기 때문에 일부러 찾았다. 실상 볼 것은 별로 없었다. 회의 장소의 테이블과 찻잔, 그리고 간단한 설명들. 돌아와 헤아려보면 생각보다 덜 삼엄한 것이 인상적이라고 할까. '혁명의 성지'임에도 불구하고 그렇게까지 삼엄하지 않았다.


불과 한 주 뒤에 베이징을 찾았는데, 천안문 광장 일대가 뿜어내는 위압감은 여전했다. 작년 10월보다는 덜했지만 기묘한 긴장감이 공간을 누르고 있었다. 그것이 국가의 얼굴, 혹은 국가의 아우라라고 하면 어떨까. 확실히 상하이보다는 베이징이, 일대회지보다는 천안문 광장이 국가를, 국가의 위세를 선명하게 경험할 수 있는 공간이다.


중국은 어떤 나라인가. <당신이 알아야 할 현대 중국의 모든 것>은 하나의 주장에 대한 반론을 펼치고 있다. 중국은 사회주의 국가가 아니라는 것이다. 저자는 중국 역시 국가자본주의 사회라고 주장한다. 중국은 사회주의 국가가 아니며 국가자본주의 사회라는 주장이 새로운 것은 아니다. 이와 비슷한 주장은 많이 있다. 차이가 있다면 저자는 출발부터 부정한다는 점이다. 예컨대 누군가는 마오쩌둥 사망 이후 주자파走資派의 득세가 국가자본주의 사회로 진입하게 된 시점이라고 본다. 누구는 개혁개방 이후 세계의 공장 역할을 하며 자본주의 사회가 되었다 본다. 그보다 더 이후, 시진핑 집권을 이야기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저자는 출발부터 문제라고 본다. 일대회지에서 모였던 사람들은 사회주의자라기보다는 좌파 민족주의자였으며, 코민테른이 보낸 사람은 소련의 이익에 복무할 뿐이라는 말이다. 도리어 노동자의 자발적인 운동성을 억압했으며 국공합작에 그 역량을 내주었다고 평가한다. 저자가 주장하는 것처럼 아래로부터의 혁명, 노동자가 주체가 되어 중국 혁명을 이끌었다면 '중국은 1925~1927년 혁명을 통해 제2의 러시아가 될 수 있었'을까? 어쩌면 이 모든 것이 결과로부터 나온 주장은 아닐까. 중국 공산당을 사회주의 정당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관료집단으로 보는 것, 그 뿌리를 좌파 민족주의자에서 발견하려는 것은 아닐까 물어보는 것이다. 


여행 중에 누군가 오색 홍기의 다섯 별이 무엇을 상징하는지 물었다. 그때는 생각나지 않았는데, 다시 찾아보니 공산당 - 노동자 - 농민 - 소자산계급 - 민족자산계급을 의미한다. 당연히 가장 큰 별은 공산당을 말하고. 저자는 마오의 혁명이 '좌파적 지식인들이 지주 제도 폐지를 원한 농민을 지도해서 일으킨 혁명'이며 '노동계급의 사회주의 혁명이 아니라 중간계급의 민족 해방 혁명이었다'고 평가한다. 이런 배경에서 '마오쩌둥의 공산당은 서쪽 변방 옌안을 중심으로 그 지역 농민에 사회적 기반을 둔 좌파적 민족주의 정당이었다'라고 본다.


이 책은 매우 선명한 주장을 간결하게 펼치고 있으므로, 오랜 논쟁거리였던 중국혁명에서 노동자 농민의 관계에 대해서는 별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 20세기 초 중국에 노동자 운동이 있다고 한들 그것은 상하이, 광저우, 홍콩 등을 중심으로 한 연안 지역에 불과했다는 점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내륙의 많은 지역의 농민이 지주 아래 고통받고 있었고, 이를 해결하는 것을 혁명의 동력으로 삼았다는 점은 평가하지 않는다. 농민이 혁명의 주체가 되었는가 묻는다면 그렇지는 않았지만, 노동자만이 사회주의 혁명의 주체가 될 수 있다는 주장은 어떻게 보아야 할까. 어쩌면 그것은 이상적 마르크스주의, 산업혁명 이후의 서구 사회를 배경으로 할 때만 의미 있는 주장은 아닐까? 


중국 혁명을 이야기할 때 논의되는 '반봉건 반제국주의'의 특징이 세밀하게 논의되지 않는 점이 이 책의 아쉬운 부분이다. 오랜만에 색깔이 확실한 글을 읽어 반가운 면도 있으나. 국가가 우선인가, 혁명이 우선인가. 노동자가 우선인가, 농민이 우선인가. 어쨌든 중국은 자신의 역사를 거쳐 이를 수행했다. 실패했건 성공했던 그 길에 대한 평가가 정도正道를 걷지 않았다는 것만으로 평가될 수는 없을 테다.


<중국의 붉은 별>을 쓴 에드거 스노는 대장정에 살아남은 홍군을 매우 낭만적으로, 이상적으로 그리고 있다. 아마도 순수한 혁명의 동력을 아시아의 한 변방에서 찾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기존 중국에 대한 평가  역시 이와 비슷한 일종의 기대감에서 출발한 것이 많다는 생각이다. 미국으로 대표되는 자본주의에 대항으로서의 중국. 오늘날 중국은 이런 기대를 저버렸다. 이 책을 읽으며 어떤 혐중의 정서에는 이런 기대에 대한 배신감이 있지 않을까 질문해 본다.


붉은 별을 찾는 사람들에게 저자는 일갈한다. 바보야 저건 붉은 게 아니야. 그러나 중국은 붉다고 주장한다. 청년들은 붉은색보다 분홍색을 주장하기도 하고. 저자가 주장하는 것처럼 중국 역사 속에는 붉은색으로 물들었던 시절이 없었을까? 그냥 드문드문 붉은 반점이 얼룩덜룩 묻었다 지워질 뿐일까. 반세기 전 마오주의에 열광했던 서구 지식인들은 그저 자신의 관념 가운데 있는 붉은 별을 투영했던 것일까. 진짜 붉은색이 무엇인지, 참된 마르크스주의가 무엇인지는 모르겠다. 무튼 중국을 찾을 때마다 고유의 화려한 빛깔이 눈을 사로잡는 것만은 분명하다. 울긋불긋한 무엇인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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