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기

제목[리딩 R&D] 합리성에서 벗어난 과학을 응원하며 (《물은 H₂O인가?》 발제)2023-06-20 21:44: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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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은 HO인가?3.3 복잡한 화학에서 미묘한 철학으로, 4.1 물은 실재적으로 HO일까?

 

저자 장하석이 19세기 화학에서 원자를 다룬 방식을 연구하게 된 요인은 작업주의였다. 나아가 저자는 19세기 원자화학의 성공이 작업주의의 승리였다고 표현한다.(404) 퍼시 브리지먼은 작업주의를 설명할 때 중요한 인물이다. 실험물리학자였던 브리지먼에게는 새로운 측정법이 무엇보다 중요했다. 브리지먼은 잘 정의되었으며 수행 가능한 작업들을 토대로 삼아 과학에 안정성과 확실성을 부여하려 했다.(405)

 

경험주의가 관찰 가능성을 지식의 토대로 삼는다면, 작업주의는 실행 가능성을 지식의 토대로 삼는다. 경험주의의 관찰은 작업주의의 실행보다 소극적으로 보일 수 있다. 그러나 과학에서 자주 관찰이 적극적 실행과 연결됨을 이해한다면, 경험주의와 작업주의의 구분은 희미해진다. 19세기 화학자들은 원자를 다룰 때 관찰 가능성보다 실행 가능성에 집중했다. 측정 방법에 주로 집중했던 이들의 방식은 작업주의에 가까웠다.

 

많은 이들이 측정 방법에 따라 개념이 달라진다는 발상을 작업주의의 단점으로 여기며 브리지먼을 비판했다. 저자는 오히려 이 단점이 브리지먼을 작업주의로 이끈 과학적 경험의 핵심이라고 말한다.(409) 브리지먼의 대응 방식은 솔직함과 신중함이었다. 미해결 문제를 솔직하게 인정하고, 여러 측정 방법을 동원하여 겹치는 영역을 만들어낼 때까지 신중하게 작업하기. 종합을 이루기 위해서는 작업주의적 조심성이 필요했다.

 

물론 물은 HO’라는 합의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브리지먼의 견해 역시 수정하고 발전시켜야 했다. 우연의 일치로 여러 측정에서 동일한 결과가 만들어지기 시작하자, 측정을 위한 전제와 여러 견해가 수정되기 시작했다. 브리지먼은 과학적 개념들의 의미가 명시되기를 바랐지만, 그런 명시는 불가능했다. 성취 가능한 최고 수준의 의미 명시는 과학자 공동체가 명시적 합의에 도달하고 이를 존중하는 형태이다.(411)

 

19세기 화학자들이 물은 HO’라는 합의에 도달하기 위해 자신의 견해를 수정하는 일이 가능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저자는 실용주의에서 그 이유를 찾는다. 실용주의에는 여러 갈래와 의미가 있지만, 저자가 눈여겨보는 부분은 오류가능주의이다. 앎과 실천의 연관성, 실용주의와 작업주의의 연관성을 숙고하면, 실용주의의 뿌리에 인간의 인식 능력에 관한 기본적인 겸허함이 자리 잡고 있음을 받아들이게 된다.(423)

 

이 겸허함을 배경 삼아 저자는 물에 관한 다양한 이야기를 펼친다. 과학이 삶의 일부이며 과학의 목표가 삶과 연관되어야 한다는 실용주의는 이 겸허함 속에서 실재론과 연결된다. 이렇게 연결된 실재론은 다원주의적 경향을 띨 수밖에 없다. 실재론자들은 우주에 대하여 과학이 무언가를 발견하려 노력해왔으며, 그 노력이 성공적이었다고 말한다. 저자는 실재론을 바탕으로 과학에 대한 능동적 실재주의를 주장한다.(430)

 

이 책에서 저자는 우리가 막연하게 품었던 과학의 합리성에 대한 환상과 여러 과학적 개념의 안정적 지위를 뒤흔드는 작업을 해왔다. 그 작업은 과학을 불신하게 하고 과학이 쓸모없다는 결론으로 가기 위한 작업이었을까? 저자는 과학혁명에 관한 토머스 쿤의 이론에 많은 부분 동의하면서도 어떤 부분에서는 이의를 제기한다. 바로 패러다임이 패권적이며 한 과학 분야 전체를 독점한다는 주장에 대한 논박이다.

 

토머스 쿤처럼 패러다임의 독점을 일반적 형태로 간주해버리면, 이 형태를 벗어나는 사례가 발견되어도 예외적 상황으로만 이해하기 쉽다. 쿤은 정상과학을 패러다임이 제공하는, 미리 형성되었으며 비교적 경직된 상자 안에 자연을 강제로 집어넣으려는 노력으로 보았다.(447쪽 각주 17) 쿤의 표현을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그의 이론 역시 현실의 과학이라는 실재하는 대상을 경직된 상자안에 집어넣으려 했다는 혐의에서 벗어나기 어렵다.

 

저자는 쿤이 일반적 형태로 간주하지 않고 예외적 상황으로 치부한 사례를 면밀하게 검토하여 과학 영역에서 실재가 어떻게 힘을 발휘하는지를 주목하려 한다. 현실은 어떤 상자 시스템에도 깔끔하게 들어맞지 않으며, 미리 분류되어있거나 위계에 맞춰 등장하지 않는다. 자연은 우리가 우리 자신에게 허용하는 것보다 더 많은 개념적 가능성을 허용한다.(449) 진리는 배제를 통해 나타나기보다 다원주의를 통해 가능해진다.

 

저자는 다원주의적 진리가 앎을 믿음에서 능력으로 옮겨 생각하게 하리라고 주장한다. 우리의 앎은 특정 실천 시스템 안에 내장된 앎이다. 상자에 들어맞지 않는 자연처럼 실재는 시스템에 저항한다. 그 저항에 좌절하지 않고 대응하려면 믿음보다 능력이 필요하다. 믿음에서는 진리가 중요하지만 능력에서는 진리값의 보유가 중요하지 않다. 앎에서 관건은 진리가 아니며, 능력은 이분법적 성공/실패보다 연속적 정도의 차이로 나타난다.(455)

 

오류가능주의는 우리의 가장 좋은 믿음도 늘 오류일 수 있음을 인정할 때 포착된다. 앎과 믿음의 분리를 통해 우리는 확실성이라는 을 내려놓을 수 있다.(456) 저자가 주장하는 능동적 과학적 실재주의는 우리를 진리 논쟁이 아닌 다시 저 바깥의 실재로 이끈다. 실재는 우리가 통제할 수 없는 모든 것이며, 진리나 확실성에 대한 몽상은 우리를 실재와 멀어지게 한다.

 

이쯤 오면 그동안 과학을 공격하는 듯 보였던 저자의 태도도 달리 보인다. 저자는 과학이 작업해온 역사를 긍정하며 신뢰한다. 쿤의 판단과는 달리 저자는 과학이 옛 패러다임과 함께 존속하며 누적된 지식을 통해 성장해왔다고 본다. 과학적 실천은 과학자나 철학자들이 말하는 내용보다 훨씬 더 다원주의적 면모를 지녔다. 그 면모를 발굴해내는 저자의 작업은 합리성의 환상에서 벗어나 점차 실재와 밀접해지는 과학을 위한 응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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