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기

제목[탈식민] 지식인들의 고민: 서발턴과 더불어 서발턴에게 말걸기2022-03-23 13:4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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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부 컨텍스트들과 궤도들

<서발턴은 말할 수 있는가?에 관한 성찰들: 스피박 이후의 서발턴 연구> 파르타 차테르지

<포스트식민 연구: 이제 그것은 역사다> 리투 비를라

<인권의 윤리적 긍정: 가야트리 스피박의 개입> 드루실라 코넬

 

이 책 2부에서는 스피박의 에세이 <서발턴은 말할 수 있는가?>가 일으킨 반향과 함께, 이 에세이가 쓰인 맥락에 대한 설명이 추가된다. 세 명의 학자가 쓴 짧은 글들은 각자 다른 부분에 집중하면서도 하나의 이야기처럼 매끄럽게 연결된다. 그 연결 속에서 우리는 스피박이 어떤 배경 안에서 무엇을 강조하기 위해 <서발턴은 말할 수 있는가?>를 썼는지를 들을 수 있다. 나아가 이 글들은 스피박과 서발턴 연구가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는지도 보여준다.

 

파르타 차테르지는 우리가 인간의 역사라고 말하는 역사가 부르주아의 역사이고, ‘시민은 엘리트뿐이었음을 스피박의 글에서 재확인한다.(145) 차테르지는 스피박이 서발턴의 말할 수 없음을 통해 완전한 의식을 보유한 주권적 역사 주체가 있어야 한다는 관점에 도전했다고 본다. 인도와 영미 학계의 포스트식민 연구자들은 스피박의 연구를 각각 다르게 받아들였다. “3세계 주체는 서구 담론에서 어떻게 재현되는가에 대한 해답이 달랐기 때문이다.

 

라투 비를라는 스피박의 연구가 포스트식민 연구의 근간이라고 본다.(151) 비를라는 포스트식민 비판을 정체성 정치, 토착주의, 막무가내 다문화주의로 환원하면 안 된다고 주장한다. 포스트식민 비평이 주목하는 것은 현재도 진행 중인 식민 형성들, 탈식민화의 실패, 인간과 자본의 새로운 초국적 흐름과 함께 구현되는 식민 관계들이다.(152) 타자성을 정체성으로 삼아 단일 주체를 상정하면서 만들어지는 반식민 민족주의는 이런 식민적 타자화 논리를 재생산하는 데 복무한다.(153)

 

스피박은 주체성과 행위 능력의 불연속성을 강조하면서 타자와 주체의 문제를 더 비판적으로 바라본다. 인도의 사티 사례에 등장하는 여성들을 예로 들면, 토착주의와 식민주의라는 이중의 가부장제에 놓인 여성들의 죽음은 주체로 위장되거나 행위가 지워진 희생자로 취급된다. 비를라는 스피박에게 서발터니티가 안이면서 바깥이라고 말한다. 서발터니티를 헤게모니 바깥의 자율적 공간이면서 헤게모니 가능성의 조건으로 보는 것이다.(161)

 

비를라에게 푸코와 들뢰즈처럼 서발턴은 말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지식인들은 주체 생산의 행위 역학을 숨기고, 재현의 문제를 지워버린 채 억압의 문제를 방치하는 이들이다. 비를라는 스피박의 비판에서 지식인의 역할에 대한 문제 제기로 주제를 확장한다. 물론 엘리트는 언제나 차테르지가 이미 지적했듯이, ‘서발턴을 자아와 타자의 논리 안에서, 행위 능력을 지닌 단일한 주체로, 실은 자아가 되는 타자로 구축한다는위험에 처한다.(163)

 

스피박의 지적대로 이제 서발턴은 지구화와 세계 구획이라는 폭력적인 세계 속에 놓여있다. 세계 구획은 토착민이 스스로를 타자로 보도록 만드는 힘을 발생시킨다. 스피박은 세계 구획대신 우주의 관점을 요청하는 행성이라는 단어를 도입한다. 이 관점은 데리다와 레비나스를 경유한 전적인-타자라는 개념으로부터 책임의 윤리를 끌어낸다. 비를라는 스피박의 관심이 우리가 책임감을 가지고 서로 응답을 끌어내고 응답하는 법을 배우는 데 있다고 본다.

 

드루실라 코넬은 스피박의 서발턴 연구에서 젠더에 더 집중한다. 서발턴의 비대칭성은 젠더의 비대칭성보다 덜 드러나므로, 젠더화된 서발턴은 서발턴의 비대칭성을 드러내기에 유리하다. 젠더화된 서발턴의 재현 실패는 그 자체로 하나의 듣기 형태가 된다.(175) 코넬은 지식인이 재현하는 자이기 때문에 대중과 결합할 수 없다고 본다. 푸코와 들뢰즈, 가타리는 재현의 역할을 버리고 저항하는 타자가 되려 하면서 타자를 그림자로 구성하는 동시에 이상화한다.

 

스피박의 서발턴 연구를 페미니즘으로 읽어내는 코넬은 여성과 인권의 확대에 더 집중한다. 스피박은 인권에 집중하면서 인간적인 것에 대한 판단을 수정하려 한다.(181) 인권은 서구적 주체성의 이상과 규범에 부응하는 폭력적인 요구와 관련된다. 인권을 옹호하는 일에는 타자에 대한 윤리적으로 위험한 재현이 수반된다.(183) 식민화는 타자가 문명안으로 편입하도록 끊임없이 변형시키는 과정을 포함하며 진행된다.

 

코넬은 여기서 페미니스트들이 처한 위험을 직시한다. 인권을 옹호하는 페미니스트들이 윤리적 자만 속에서 자신들을 권리의 배포자로 재현하면서 영예를 누린다는 사실이다.(186) 스피박은 인권을 꿰매는작업을 강조하는데, 코넬은 이 작업이 젠더화된 서발턴을 위해서가 아니라 젠더화된 서발턴과 함께 하는 작업이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는 권리 목록에 여성 권리를 추가하는 문제가 아니라 여성 권리가 인간의 문제를 빗겨가도록 하는 문제이다.(187)

 

코넬의 주장은 지식인의 역할에 대한 성찰로 넘어간다. 재현의 자격을 넘어 코넬은 서발턴을 재현하는 자신들이 누구인지를 묻는다.(188) ‘전적인-타자와 타자성 자체로 존중받는 타자는 책임의 윤리를 촉구한다. 타자는 결코 내가 될 수 없고, 언제나 타자로 남는다. 타자를 복속하는 방식이 아니라 타자의 위치를 전적으로 다르게 보는 방식, 위계에 대한 우리의 감각을 해체하는 방식을 통해서만 우리가 인권을 새로 배울 수 있다고 코넬은 강조한다.

 

스피박은 미국 대학에서 인문학을 가르치고, 인도 시골에서도 어린이들을 위한 학교를 운영했다. 코넬은 스피박이 식민 모델로서 학교의 역할과 새로운 습관을 가르치는 가능성 모두를 고려하면서, 인권 담론을 교육으로 대리보충하려 했다고 본다.(195) 서발턴이 말할 수 없다는 사실은, 코넬에게 지식인의 역할에 대한 고민으로 이어진다. 서발턴을 돕는다고 여기지 않으면서, 서발턴과 더불어 서발턴에게 말을 거는 일이 바로 코넬이 말하는 지식인의 책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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