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기

제목[푸코] 성의 역사4 마지막 부분 발제2020-02-20 14:14: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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첨부파일성의 역사 3장 3 성욕과 리비도 발제.hwp (29KB)

욕망은 어떻게 주체를 만들어냈는가

 

《성의 역사 4: 육체의 고백》 3장 결혼 [3] 성욕과 리비도

 

푸코는 <성의 역사>라는 기획을 통해 자기테크닉 혹은 자기기술이라고 불릴 만한 것을 이야기해보려 했다. 지속적으로 푸코가 주목한 것은 자기와 자기가 맺는 관계의 변화였다. 이 변화를 통해 우리가 근대적으로 ‘주체’라 부르는 것이 어떻게 구성되었는지를 알 수 있었다. <성의 역사 4>의 마지막 부분에서 푸코가 주목하는 인물은 아우구스티누스이다. 성행위에 대한 아우구스티누스의 입장은 초기 기독교와 달랐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에덴의 타락 이전에도 성행위가 존재했다고 주장했다. 이 주장을 통해 성행위는 그 자체로 악이 아니게 되었고, 어떤 상황에서만 죄가 되었다. 아우구스티누스가 이런 주장을 하게 된 배경에는 제국의 성장과 기독교의 제도화가 있다. 기독교는 제국을 유지하는 사상의 중심이 되었으며, 국가와 교회는 통치를 위해 개인에게 주목하기 시작했다. 수도원의 금욕과 신자들에게 종용되던 정절보다는, 결혼생활의 규범화가 중요해졌다. 기독교 교리는 이제 대중들에게 윤리의 기준으로 작동하기 시작했다.

 

타락 이전에 에덴에서도 성행위가 있었다면, 현실의 성행위와 다른 점이 무엇일까. 아우구스티누스는 바울이 이야기했던 개념 ‘리비도’를 끌어온다. 타락 이전의 성행위에는 리비도가 없었다는 주장이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성행위의 무절제에 대한 두려움보다는 성행위가 인간의 의지를 통해 이루어진다는 점에 주목한다. 그렇다면 타락 이전의 성행위가 이성의 범위 안에서 이루어지던 성행위였고, 인간의 관능과 감각도 의지의 지배를 받고 복종했다고 볼 수 있다. 이제 도덕적 경계선은 절제와 무절제에서, 의지적인 것과 무의지적인 것의 관계로 옮겨간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자기에 대한 자기의 의지가 작용하는 ‘주체’의 구조를 만들었다. 하느님에 대한 불복종은 자기의 의지에 대해 반항하는 주체 안의 문제로 연결된다. 죄는 더 이상 외부에서 침입해 오지 않고, 자신 안에 있게 된다. 타락한 인간은 분열된 인간이며, 자기를 배반한 인간이다. 에덴의 타락을 통해 성기를 언제나 의지적으로 사용할 수 있었던 하느님의 은총도 사라졌다. 이제 인간은 자신에게 복종하지 않는 자신의 성기와 대면한다.

 

의지의 패배와 무의지의 승리는 죽음의 이미지와 연결된다. 성기를 무의지적으로 사용하면서 자손을 낳을 때, 인간은 타락을 통한 최초의 죽음을 계속해서 인식하게 된다. 은총의 소멸이 죽음을 현실화시켰다면, 성행위의 무의지적 욕망은 ‘영적 죽음’을 가리킨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이 무의지적 욕망의 형태와 힘을 ‘리비도’라고 부른다. 리비도는 성행위의 본질이 아니다. 오히려 어떤 면에서 성행위를 통치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준다. 무의지적 욕망이 있다면, 의지적 욕망이 주체 안에서 이를 조절하거나 규제할 수 있기 때문이다.

 

성행위 안에서 무의지적인 것의 형태를 분리시켜보려는 아우구스티누스의 노력은 한계에 부딪힌다. 성욕과 성기 사용 사이의 관계를 아무리해도 의지로는 단절시킬 수 없었던 탓이다. 결국 아우구스티누스는 의지를 초월하는 분리 대신, 성욕으로 인해 움직이는 각 기관들에 ‘본성’이라는 이름을 부여했음을 인정한다. 리비도, 즉 무의지적 욕망이 본성이라면, 주체는 자기 육체에 대한 주도권을 영영 가지지 못하게 되는 걸까? 또 리비도에서 비롯된 죄를 주체의 책임으로 돌릴 수도 없지 않은가?

 

아우구스티누스는 다시 이 문제들을 풀어보기 위해 고심한다. 고심 끝에 몇 가지 가정에 변화가 생긴다. 처음 아우구스티누스는 육욕의 출발점을 육체로 보았지만, 이후에는 출발점이 영혼에 있다고 본다. 타락에 부여된 의미도 달라진다. 인간은 자기만족을 위해, 자기 자신의 주인이 되고 싶어서, 하느님을 저버렸다. 리비도는 주체 안의 결핍, 분열, 하찮은 존재로 이해된다. 하느님에 대항한 인간은 결국 자기 육체에 예속되고, 영혼의 죽음을 거쳐 육체의 죽음에 이르게 된다.

 

무의지적인 것과 의지적인 것의 경계선은 명확하지 않은 채로 주체의 내부에 존재한다. 지속되는 일탈행위의 욕구는 역설적으로 끊임없이 경계선을 존재하게 만드는 조건이다. 중요한 점은 아우구스티누스가 육욕을 영혼 속의 특별한 권능이나 어떤 수동성으로 보지 않았다는 점이다. 육욕의 독립성은 의지의 범위 안에서 한정된다. 이런 의지는 다시 은총의 힘에 의지해서 만들어진다.

 

모든 인간은 무의지적 욕망을 포함한 성관계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육욕의 주체가 된다. 타락 이후 모든 인간은 무의지의 욕망(리비도)을 포함한 의지를 갖는 주체로 태어났다. 아우구스티누스를 통해, ‘리비도’는 모든 인간의 내면에 (원)죄의 현재성을 부여하는 초역사적 굴레가 되었다. 육욕은 그 자체로 죄이며, 세례로도 없앨 수 없다. 세례는 육욕이 더 이상 죄가 되지 않도록 해 줄 뿐이다. 다시 말하면, 육욕의 죄인이 되지 않는 방법은 세례뿐이다. 육욕과 싸우려면 하느님의 은총이 절대 필요하다는 게 바로 아우구스티누스의 주장이다.

 

결혼과 결혼생활에 대한 아우구스티누스의 이런 규범화는 16세기 종교혁명 시기까지도 계속되었다. 푸코는 아우구스티누스의 작업을 ‘죄인을 권리의 주체로 생각하는 일’이라 본다. 이는 또한 ‘욕망의 주체와 권리의 주체를 동시에 하나의 형태로 생각하는 일’이다. 주체는 ‘죄의 가능성’을 통해 만들어졌고, 죄와 강하게 연결된 욕망을 통해 권리를 인정받는다. 어떤 면에서 인간에게 주어진 자유란, 죄를 짓고 잘못을 저지를 자유에 불과하다. 주체는 개인들이 저지른 실수와 죄에 대한 책임을 지우기 위해 필요하다. 주체의 진짜 위험은 처음부터 우리에게 지나치게 과도한 책임을 지웠다는 사실에 있다. 과도한 책임의 결과는 주체의 자발적 포기로 이어진다. 기독교는 욕망이라는 함정을 통해 우리를 주체로 만들고, 이어서 그 주체의 포기를 종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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