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기

제목[철학/SF] 느낀다 고로 존재한다 (<탈인지> 1, 2장 발제)2024-01-08 13:2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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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인지서문, 1장 철학자처럼 생각하기, 2장 컴퓨터처럼 생각하기

 

SF의 특징 중 하나는 SF지금 여기가 아닌 다른 시공간에 대해 말하려고 한다는 점이다. 상식과 규칙은 언제나 지금 여기에서만 통용되지만, 우리는 그 사실을 쉽게 잊어버린다. ‘지금여기가 아니라면 상식과 규칙은 무력하다. SF는 외삽을 통해 우리 상식과 규칙의 한계를 시험한다. 우리는 그 시험을 통해 세계의 보편적 규칙이 허구임을 알게 된다. 이 책의 저자 스티븐 샤비로는 SF의 바로 그 기능에 주목한다.

 

저자가 하려는 작업은 SF를 통해 인지에 대한 우리의 통념을 깨뜨리는 작업이다. ‘의식이나 생각’, 혹은 같은 단어들은 우리에게 익숙한 만큼 그 의미도 분명해 보인다. 그러나 조금만 파고들면 이 단어들과 그 대상이 얼마나 모호한지도 금방 깨닫게 된다. 저자는 우리가 인지라고 부르는 대상을 감수성(sentience)’이라고 부르자고 제안한다. 인지감수성을 동일시하는 습관에 저항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저자가 말하는 감수성인지와 유사하지 않다. 오히려 탈인지에 가깝다. 허구를 다루는 픽션과 사실을 다루는 과학은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이루어지는 듯 보이지만, 상상력을 토대로 한다는 점에서는 유사하다. 상상력과 사실에 기반하지 않은 사변이 없이는 어떤 지식도 불가능하다. 저자는 여기에서 우리의 사고가 의식 이상의 무엇이라는 결론을 끌어낸다. 우리는 사고한다기보다 느낀다. 사고가 아닌 느낌으로 존재한다.

 

저자는 서문에서 학문, 특히 철학이 우리가 느낌에 대해 말하는 일을 불편해한다고 언급한다. 느낌은 언제나 개념 전에, 개념화를 거치지 않고 나타나기 때문이다. 우리는 느낌을 개념화하지 않고 말하는 일이 불가능하다고 여긴다. 느낌의 불가해성은 그 자체로 우리에게 위협이다. 책의 1장에서는 철학자 프랭크 잭슨의 논문에 실린 메리 이야기를 통해 철학자들이 세계를 지각하고 개념화하는 방식에서 그 위협이 두드러진다.

 

설정상 메리는 시각과 관련한 모든 지식을 가졌으나, 실제로 색을 경험한 적이 없다. 메리가 색을 처음 볼 때, 그 경험은 어떻게 해석될까? 색을 보는 경험이 단순 정보나 지식을 축적하는 일인가, 혹은 노하우를 습득하는 일인가를 넘어 저자는 잭슨의 설정이 이미 우리의 경험 자체를 낯설게 만들어버렸다고 주장한다. 메리의 이야기를 통해 우리는 무언가를 경험하고 경험을 기술하는 일을 설명하기 어렵게 되었다.

 

감각질에 대한 경험은 사고나 지식보다 신체와 관계된 문제였다. 생각하기 위해서 우리는 먼저 느껴야 했고, 그 느낌은 신체를 통해 이루어졌다. 메리의 이야기에서 철학자들은 경험의 해석에만 집중하지, 경험 자체에는 집중하지 않는다. 철학은 이 경험의 순간을 개념화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SF가 이 인지적 틈새를 포착하는 장르라면, 저자는 철학 역시 SF와 마찬가지로 그런 작업을 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경험은 언제나 지식을 능가하며, 지식의 형태로 쉽게 정리되지 않는다. 메리가 본 빨강은 빨강 스펙트럼의 일부일 뿐이며, 메리는 다음에 볼 빨강과 지금 본 빨강을 구분하거나 기억할 수 없을 것이다. 경험은 그 자체로 지식도 아니며, 정보도 될 수 없다. 우리가 하는 대부분의 경험이 이처럼 미지의 영역에 있다. 우주를 구성하는 대부분의 물질이 아직 밝혀지지 않아 암흑물질이라고 불리듯 이 영역이 암흑 현상학에 속한다고 할 수도 있겠다.

 

2장에는 모던 맥휴의 단편소설 <눈먼 자들의 왕국> DMS라는 컴퓨터 프로그램 설정이 등장한다. 여러 서버에 분산된 이 소프트웨어 체계는 북미 전역에서 병원과 의료체계의 시설을 관리한다. 갑자기 DMS가 대규모 순차적 정전 사태를 일으키면서 이야기가 시작되는데, 소설 속 등장인물 시드니와 데미안이 이 일을 해결해야 한다. 여기서 DMS는 브뤼노 라투르가 행위소라고 불렀던 존재이며, 거대-존재자인 초객체이기도 하다.

 

시드니는 점점 DMS의 감수성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한다. DMS는 인간과 다른 방식으로 소통하며, 자신에 대해서도 다른 방식으로 인식했다. 시드니는 DMS를 이해하려 하면서 자신의 상황을 대입한다. 시드니는 사무실의 유일한 여성이며, 스스로 아스퍼거라 칭하면서 불편한 일을 떠넘기는 동료들과 함께 일한다. 아스퍼거 장애라는 분류는 소통의 영역과 범위를 제한한다는 점에서 인간과 비인간 존재자의 신경다양성을 외면한다.

 

DMS가 인간의 방식으로 소통하지 않기에 시드니는 DMS를 유아적唯我的이라고 이해한다. DMS는 인간의 신경전형과 다른 방식으로 행위하며 인간의 규범을 전제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해도 DMS가 활동적으로 지각하고 수동적 반응이 아닌 능동적 작용을 하고 있음은 분명하게 드러난다. DMS의 움직임은 어떻게든 인간에게 영향을 미치고 인간은 그 움직임 자체에 두려움을 느낀다. 물론 DMS는 인간의 두려움에도 무관심할 것이다.

 

더 놀라운 점은 DMS가 인간의 존재 자체, 특히 인간이 무엇보다 소중하게 여기는 비인간에 대한 인간의 우월성조차도 관심이 없다는 점이다. 그 존재는 우리에게 관심이 없으며, 우리는 그 존재에 대해 알 수 없다. 다만 이 이야기에서 인간의 인지 방식, 감각 방식만이 유일한 인지 방식과 감각 방식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인간의 방식이라고 믿어온 방식조차 늘 우리가 정상이라고 부르는 제한된 범주 안에서 이루어진 방식에 불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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