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기

제목[니체읽기] 다시 나를 기다리며 (차라투스트라 후기)2023-12-15 12:09: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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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인문학 공동체라고들 부르는 공간에 발을 들인 지 벌써 십 년이 지났다. 일주일에 한 번씩 찾아가 발만 담그던 곳에 본격적으로 적을 두게 된 계기는 니체와 무관하지 않다. 그 때문인지 니체를 떠올리면 그 시절이 자동 연상된다. 올해는 1월부터 12월까지 내내 니체를 읽어왔기 때문인지 더 그랬다. 니체를 읽으며 지난 십 년 내 삶과 공부를 자꾸만 돌아보게 되었다.

 

내가 사는 인천에서 서울 용산 해방촌까지 오가려면 꼬박 네 시간이 걸렸다. 전철 환승도 모자라 마을버스 타고 해방촌 언덕을 오르면 두 시간, 다시 길을 되짚어 집으로 돌아가는 데 두 시간. 긴 시간 전철을 타면서 나 자신도 내가 왜 이렇게 하는지 납득이 되지 않았다. 이 나이에 출퇴근도 아니고,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자고 이 짓을 한단 말인고. 도대체 뭘 원하는지 나 자신도 알 수 없었다.

 

홀로 있는 자여, 그대는 사랑하는 자의 길을 가고 있다. 그대는 그대 자신을 사랑하며, 그 때문에 그대 자신을 경멸한다. 사랑하는 자만이 할 수 있는 경멸을.

사랑하는 자는 창조하기를 원한다. 그가 경멸을 하기 때문이지! 자신이 사랑했던 것을 경멸할 필요가 없는 자가 사랑에 대해 무엇을 알겠는가!

- 117. 창조자의 길에 대하여

 

지금 돌이켜보니 나는 내 삶을 경멸하고 있었다. 아마도 나 자신을 사랑했기에 가능한 경멸이었다. 인천에서 용산까지 전철을 타고 이동하는 시간은 자신에 대한 경멸과 사랑으로 나를 할퀴고 쓰다듬는 과정의 반복이었다. 그러다 전철이 한강 철교를 지날 때면 비로소 하루가 새롭게 시작된다고 느꼈다. 용산역이 가까워질 때마다 내릴 준비를 하고, 조금씩 어제와는 다른 내가 되어갔다.

 

벗들이여, 취향과 입맛은 다툴 문제가 아니라고 하려는가? 하지만 모든 삶은 취향과 입맛을 두고 벌이는 싸움이거늘!

- 213. 고매한 자들에 대하여

 

아침 햇볕을 받아 반짝거리는 한강의 수면을 홀린 듯 바라보며 다짐했다. ‘그저 이 풍경이 마음에 들어서 이 길을 다니는 것뿐이다. 전철 안만큼 한강이 잘 보이는 곳이 또 어디 있겠는가! 목적 없는 공부라 해도 좋다. 한강의 풍경이 질려서 전철 안에서 내다보지 않게 되었을 때, 그때 그만두면 된다. 모든 설렘이 사라져 이 강에 더 이상 눈길을 빼앗기지 않을 때 그때 끝내자.’

 

가르침 하나가 선포되었고 그것과 나란히 신념 하나가 퍼졌다. ‘만사가 다 공허하다. 만사가 다 똑같다. 만사가 다 끝나버렸다!’

- 219. 예언자

 

공부가 즐거웠던 시절도 있었고, 누군가의 말에 남몰래 이를 악물던 시절도 있었다. 자신에 대한 사랑만큼 경멸도 컸던 시절이라 타인에게 인정받고 싶은 마음과 의존하고 싶은 마음이 마구 뒤엉켜 자주 볼썽사납게 드러났다. 함께하던 공간에서 많은 이들이 떠난 후에는 가장 좋은 시절이 이미 지나갔다는 느낌에 사로잡혔다. 다시 시작한다고 해도 더 잘 될 리가 없음이 분명했다.

 

하지만 용기는 최고의 살해자다. 공격하는 용기는. 이 용기는 죽음마저도 죽인다. “그것이 삶이었던가? 좋다! 그렇다면 다시 한번 더!”라고 말하기 때문이다.

- 32. 환영과 수수께끼에 대하여

 

2021년 말에 해방촌에 있던 공간을 정리했다. 누군가는 공간의 정리를 공동체의 해산으로 받아들였다. 사실 그때 나는 비로소 무언가가 가벼워졌다는 느낌을 받았다. 물리적 공간을 지탱하고 공동체를 유지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나를 위한 공부를 시작할 수 있다고 느꼈다. 한강은 여전히 내 시선을 붙들었지만, 이제 한강을 지나지 않아도 나는 내가 무엇을 위해 어디로 가는지를 알았다.

 

비애는 말한다. “사라져라! 가버려라, 너 비애여!” 하지만 고통받는 것 모두는 살기를 바란다. 성숙해지려고, 기쁘게 되려고, 동경하려고,

좀 더 먼 것, 좀 더 높은 것, 좀 더 밝은 것을 동경하려고. 고통받는 것 모두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상속자를 원한다. 아이들을 원한다. 나는 나를 원하지 않는다.”

하지만 기쁨은 상속자를 원치 않는다. 아이들을 원치 않는다. 기쁨은 자기 자신을 원하고, 영원을 원하고, 회귀를 원하며, 모든 것이 영원히 자신과 동일하기를 원한다.

비애는 말한다. “깨져라, 피 흘려라, 심장이여! 방랑하라, 다리여! 날아올라라, 날개여! 저 위로! 저 높이! 고통이여!” 좋다! ! , 내 늙은 심장이여. 비애가 말한다. “사라져라!”

- 419. 밤에 방랑하는 자의 노래

 

고통이 동경과 방황을 원하고, 비애는 비애를 향해 사라지라고 소리친다. 깨지고, 피 흘리고, 방황하는 동안에 비애는 사라져 기쁨이 자신을 기다리는 시간이 온다. 그렇게 몇 번이고 반복될 시간 속에서 나는 다른 누군가가 아닌 나를 원한다는, 오래전부터 그래왔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위버멘쉬와 힘에의 의지와 영원회귀로 표현되는 니체의 말을 알아듣기 오래전부터 그래왔다는 사실을.

 

모든 것이 다시 시작되고, 모든 것이 영원하며, 모든 것이 사슬로 연결되어 있고, 모든 것이 실로 묶여 있고, 모든 것이 사랑에 빠져 있다. , 그대들은 이런 세계를 사랑한 것이다.

그대 영원한 자들이여, 이러한 세계를 영원히 그리고 항상 사랑하라. 그리고 비애에 대고 사라져라. 하지만 때가 되면 돌아오라!”라고 말하라. 모든 기쁨은 영원을 원하기 때문이다!

- 419. 밤에 방랑하는 자의 노래

 

일종의 변형이었고, 회귀였다. 이것이 다른 시작임을 나는 알았다. “그것이 삶이었던가? 좋다! 그렇다면 다시 한번 더!” 나는 원했고, 준비가 되어 있었다. 전철 안에서 한강의 수면을 바라보던 그때부터 지금까지. 욕망이 나를 생존으로 이끌고, 기쁨이 나 자신을 원하게 했다. 한강의 반짝이는 수면은 일종의 증거였다. 내가 세계를 사랑하며, 거듭되는 비애 속에서도 기쁨을 느낀다는.

 

기쁨은 비애를, 지옥을, 미움을, 비방을, 불구를, 세계를 갈구할 정도로 풍요롭다. 왜냐하면 이 세계는, , 그대들은 이 세계를 잘 알고 있지 않은가!

그대 좀 더 높은 인간들이여! 기쁨은, 그 억제하기 어려운 복된 기쁨은 그대들을 동경한다. 그대들의 비애를 동경한다. 그대 실패한 자들이여! 모든 영원한 기쁨은 실패자들을 동경한다.

- 419. 밤에 방랑하는 자의 노래

 

스스로 신을 거부하고도 신이 사라진 자리를 견디지 못하는 이들은 나귀를 신의 자리에 모시고 경배한다. 비워둔 신의 자리를 없애지 않는다면 그 자리를 노리는 존재는 어디에나 있다. 가족, 국가, 자본, 명예 같은 자잘한 이름의 나귀들이. 기쁨이 실패를 동경한다는 사실을 잊어버리면 허무와 비애는 언제든 빈틈을 노리고 음울한 예언자와 나귀를 소환할 준비가 되어 있다.

 

한때 나는 내 삶을 실패의 기록으로 정의했다. 2015년 니체 수업을 듣기 직전이었다. 이 글을 쓰는 책상 책꽂이 한쪽에는 우리실험자들 개소식 초대장이 놓여있다. 2015년 가을 그 초대장에 나는 이런 인사말을 적었다. ‘우리는 다가올 계절처럼 우리 자신을 기다립니다.’ 나는 원했고, 준비가 되어 있었다. 앞으로도 기쁨과 함께 무수히 반복되는 실패를 겪을 준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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