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기

제목[동아시아] 탈중화 정체성2023-04-17 10:07: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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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시아 세계질서의 종막: 조선 / 일본 / 청 1860-1882]


탈중화 정체성


“조선을 국제 세계로 이끈 중국과 일본의 정책과 행동은 동아시아 기존 세계질서에 어떤 영향을 줬는가?”          

책의 서두에 있던 질문이다. 질문에서부터 책의 결말을 알 수 있었다. 조선은 빗장을 걸어 잠그고 있었으며, 이는 청과 일본의 영향으로 열렸다. 그리고 기존의 동아시아 세계질서인 조공체제는 변화하였다.

이는 동아시아 세계질서 속에 있던 나라들이 서양에서 정의한 근대국가로 전환되는 장면들이었다. 서양의 ‘국가 간 체제’는 독립적이고 평등한 국가로 이루어진 단순한 형태의 관계를 전제로 한다. 이런 단순한 관계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힘으로, 그 힘의 상대적 배분상태와 그 변화에 따라 질서가 안정화되기도 하며, 반대로 불안정화되기도 한다. 서양의 기준으로 동아시아 질서를 보았을 때, 1870년대에 들어서면서 동아시아 지역에서도 국가 간의 관계가 성립된 것이었다.

그래서 이 시기는 동아시아 조공질서라는 복잡성을 단순한 그릇에 담아 나타난 비극과 같다. 해당 역사를 보면서 계속해서 안타까운 지점은 ‘나에게도 중화가 있고, 너에게도 중화가 있는’ 여러 중화의 입체적이고 복합적인 형태의 관계가 동등한 국가 간의 ‘조약’이라는 틀로 단순하게 잘려지는 데 있다. 그리고 결과론적으로 안타까움 만을 느끼는 것을 넘어, 당시 중화 질서 속에 속한 한 사람으로 내가 정한 것이 아닌 남이 정한 제도의 틀을 강요받은 것으로 상상했을 때, 나 또한 그들과 다르지 않을 것임을 쉽게 깨닫는다.

동아시아 버전 ‘국가 간의 관계’가 이미 존재하고 있었던 만큼, 이 조공질서 속에서 어떻게 스스로를 정의하느냐에 따라 밀고 들어오는 변화의 흐름에 다르게 반응했다. 즉, 단순히 근대 국가관에 기반한 힘의 논리로 이 변화들이 설명될 수 없다. 이는 조공질서 내부의 지위를 기반으로 형성된 정체성과 그 정체성이 유연한 지에 따라 보고 듣는 것이 달랐기 때문이다. 조공질서의 동심원에서 중심에 가까이 있는 변방일수록 조공질서 기반의 정체성은 강화되었으며, 반대로 멀리 있는 변방일수록 그 정체성은 자연히 약화되었다. 또한, 조공질서의 중심에 해당하여 스스로가 질서의 규칙을 주도할 수 있는 상황일수록 더욱 변화에 유연한 태도를 보여주었다. 즉, 중화 정체성이 약하거나, 중화정체성을 조정할 수 있는 상황일 때, 탈중화로 쉽게 나아갈 수 있었다. 

이러한 중화정체성의 강약은 같은 조약을 두고 다른 해석을 하게 했다. 그동안 서양과 불평등한 조약을 맺었던 것과 달리, 조약을 통해 평등한 관계를 상정하고자 했는데, 이 지점에서 기존의 중화정체성에 따른 시각이 작용하여 다른 해석을 낳았다. 형식 상으로는 평등성을 확보하고자 했으나, 관념 상에서 그렇지 못한 결과다. 


조선국은 자주국가로 일본국과 평등한 권리를 보유한다(朝鮮國自主之邦, 保有與日本國平等之權) - 조일수호조규 제1관


강화도 조약의 1조는 조선이 “일본과 동일한 권리를 누리는 독립국”이라고 규정했다. 지대한 정치적 의미를 담은 그 조항은 청으로부터 조선의 독립을 확보하려는 목적에서 일본이 삽입한 것이었다. 그러나 조선은 그에 대해 역사적 사실을 그저 다시 확인한 것으로 받아들였다.(p.338)


1876년 4월 말 청 당국도 일본 공사관으로부터 조약 사본을 받았을 때 그 조항에 의문을 제기하지 않았다. “자주”라는 표현은 “독립”보다는 “자치”로 해석될 수 있었기 때문이며 청은 조선이 자국의 사무를 처리하는 데 “자치적”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에 총리아문도 정부도 그 조항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p.339)




자주지방(自主之邦)은 기존의 조공질서 하에 있었던 조선과 청의 관계에서 모순되는 지점이 아니었기 때문에, 조약 당사자인 조선도, 이를 읽어봐준 청도 그 문제를 포착하지 못하는 대목이다. ‘사대관계 속에서의 자주’와 ‘다른 국가와 대등한 주권적 독립’을 뜻하는 자주가 당시 동아시아에서 교차하고 있었고, 세 국가 각각의 관점에 따라 이를 선택했다. 조선인의 한 사람으로 당시의 역사가 아쉽지만, 당시 행위자들이 스스로의 정체성에 충실했다고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조선/청/일본은 각자가 볼 수 있는 범위 내에서 최선을 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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