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기

제목[아나키즘] '길들이기'의 역설 (<농경의 배신> 2~4장 발제)2020-03-18 19:1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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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들이기'의 역설

<농경의 배신> 2~4장 발제


저자는 오래된 상식에 도전한다. 수렵•채집하던 인류가 농경을 통해 오랜 불안정한 방랑을 끝내고 정착하게 되었다는 서사에 그는 도전한다. 중요한 근거 중 하나는 농경이 결코 생존에 적합한 방식의 생활양식이 아니었다는 점이다. 크고 무거운 쟁기를 들어 밭을 일구는 것은 많은 에너지가 필요한 일이었고, 그로 얻어지는 곡물의 열량은 노력에 비해 적었다. 농경으로 풍족한 생활을 누리게 되었다는 것은 거짓이다. 도리어 저자의 질문은 이렇다. 어째서 먹거리가 풍족한, 또한 에너지원이 풍부한 수렵•채집을 버리고 정착하게 되었던 것일까? 


안타깝게도 농경-정착 생활에 대한 적합한 합리적인 이유를 찾기는 힘들다. 몇 가지의 가설이 있으나 저자는 그 가설들이 그리 설득력 있지 않다고 본다. 아마도 그것은 과거 상황을 모두 헤아릴 수 없는 사정 때문이리라. 다만 저자는 정착 생활의 원인보다, 정착 생활이 가져온 변화에 주목한다. 


저자는 고대인들이 농경•목축•수렵•채집을 오가며 생활했을 거라 추정한다. 역사를 훑어보아도 농경으로의 자연스러운 변화를 찾아낼 수 없다는 게 저자의 말이다. 다른 포유류처럼, 혹은 식물과 같은 다른 생물처럼 인간도 자신의 거주지를 바꾸는, 저자의 표현을 빌리면 '경관조성'을 하는 존재이다. 정착생활은 경관을 더 많이 바꾸는데, 이는 정착과 함께 끌어들인 여러 생물들과 함께 빚어낸 결과였다. 호모사피엔스는 홀로 삶의 터전을 일구지 않았다. 


"호모사피엔스가 역사상 가장 성공적으로 가장 크게 불어난 종으로 판단된다면, 이 미심쩍은 성과는 호모사피엔스가 작물 재배와 가축 사육으로 이루어진 연합 부대를 사실상 지구 구석구석까지 함께 데리고 다닌 덕분에 이룰 수 있었던 것이다." (113쪽)


이 연합부대가 함께 어울려 사는 공간을 저자는 '도무스' 복합체라 부른다. '도무스domus'란 가구(집)를 뜻하는 라틴어로 여기서 '길들이기domestication'라는 말이 나왔다. 즉, 이 연합부대가 조성한 경관, 도무스 복합체란 길들이기의 공간이기도 했다. 작물이 길들여졌고, 가축이 길들여졌다. 길들여졌다는 뜻은 조성된 경관을 벗어나 독립적으로 생존할 수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이는 작물과 잡초를 가축과 야생동물을 가르는 기준이 되기도 한다. 따라서 오늘날 우리 곁에 있는 많은 것들이 이 길들이기의 결과물이다. 


보통 사람들은 '길들이기'라는 말 앞에 '인위적으로'라는 말을 붙이기를 좋아할 것이다. 그러나 저자의 입장은 그와 다르다. 우리가 습관적으로 생각하는 방향과 다른 식으로 접근한다. 인류는 스스로를 길들이기의 행위 주체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인간이 작물을, 가축을 길들였다는 식으로. 그러나 저자는 그 반대 방향도 가능하다 말한다. 길들임이 어떤 대상에 종속되었음을 가리키는 말이라면 인간도 작물과 가축에 길들여졌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가축이 제공하는 털과 가죽, 젖과 고기, 작물이 제공하는 곡물과 다양한 야채. 역사는 인간이 이것들을 길들인 과정이기도 하지만, 인간이 이것들에 길들여진 과정이기도 하다. 


누가 누구를 길들인 것이 아니라 길들임의 효과는 모두에게 나타났다. 도무스 복합체 속에 살아가는 모든 개체들에게. 저자는 이를 도무스 효과라 부른다. 그 결과 뇌가 더 작아졌고, 감정적 반응성이 낮아졌다. 포식자의 위협을 민감하게 파악할 필요도 없으며, 예리한 눈으로 먹이를 찾을 필요도 없기 때문이다. '온순함'이 도무스 복합체에 길들여진 동물들에게 나타나는 공통된 특징이다. 그러나 이는 거꾸로 '우둔함'이라 부를만한 것이기도 하다. 작물과 동물은 물론 인간도 이 도무스 복합체에 길들여졌다.


이 길들임의 구체적인 예로 저자는 '템포'를 이야기한다. 수렵•채집을 하던 인류는 자연의 리듬을 예민하게 관찰하는 능력을 가질 수 있었다. 그러나 정착-농경의 삶에 익숙해지자 자연의 리듬 대신, 작물의 리듬에 맞추어야 하는 상황이 되었다. '우리 생활시간표의 많은 부분을 주요 작물이 결정한다.(129)'


저자가 하나의 통념, 정착의 이점을 가볍게 부수어버린 것처럼 여기서 또 하나의 통념이 와르르 무너지고 말았다. 24절기, 72절후라는 전통적인 개념을 '자연의 흐름'이라 생각했던 통념이. 실상 따져보면 저자의 말처럼 그것은 자연의 리듬, 자연을 이루는 수많은 동물과 식물의 생태를 관찰하여 나온 결과물이 아니었다. 그것은 오롯이 하나의 템포, 그것도 벼농사라는 매우 특수한 목적을 위해 개발된 것이었다. 파종과 수확의 리듬을 어찌 자연의 템포라 할 수 있을까. 저자의 표현을 빌리면 전통적인 율력이란 '작물의 메트로놈에 종속되고 규율되었다.(130)'는 사실을 보여주는 징표에 불과하다.


함께 씨를 뿌리고 함께 거두는 것. 협력이란 바로 그러한 것이라고 지레 생각하곤 한다. 그러나 저자는 수렵•채집의 활동에도 다양한 도구를 다루는 숙련된 기술이 필요하며, 다양한 사람과 협동•분업이 있다 말한다. 하긴 어찌 동시에 하나의 노동을 하는 것을 협동이라 말할까. 


단 하나의 작물, 단 하나의 노동, 단 하나의 템포. 저자는 이렇게 획일화된 생태가 매우 취약했을 거라 말한다. 특히 전염병에. 이 위험에 노출된 것은 인간만이 아니었다. 과밀화된 공간에 사는 인간, 가축, 작물도 전염병에 의해 몰살당하곤 했다. 비록 역사는 이를 잘 기록하지 않았지만 이런 식의 몰살이 빈번히 이루어졌을 거라 추측한다. 


도무스 복합체, 정착으로 인한 과밀화가 이런 근본적인 취약성을 내재하고 있었음에도 사라지지 않았던 이유는 무엇일까. 저자는 이것이 도무스 현상의 또 하나의 결과, 즉 번식력의 증대 때문이라 본다. 많이 죽었지만 또 많이 태어났다. 또한 인류는 결손분을 보충하는 법을 익혀버렸다. 전쟁의 포로와 노예라는 방법. 


저자는 충적토로 이루어진 공간에서 국가의 씨앗이 발아했을 거라 말한다. 다양한 생물군이 군집하는 풍요로운 습지는 국가의 탄생에 적합하지 않았다. 건조함이 국가를 낳았다. 국가는 이 충적토 위에 특정한 곡물을 토대로 삼아 세워졌다. 밀, 옥수수, 벼 따위의. 저자는 어째서 고구마, 콩, 감자 국가는 없는 가 묻는다. 경작이나 수확도 쉽고, 영양가도 높은 작물이 있는데 어째서 단일 곡물이 국가의 근간을 이루었을까. 그것은 조세가 편리했기 때문이었다. 언제든 눈으로 확인할 수 있고, 셀 수 있으며, 또한 창고와 같은 독립된 공간에 보관할 수도 있었으므로.


저자는 농경과 자연의 신화를 깨뜨린다. 농경은 결코 자연스럽지 않다. 자본의 대안으로 농경의 신화에도 자연스레 의문이 든다. 낱알 곡식에서 화폐가 나온 게 아닐까? 만약 크기도 제각기인데다, 적당히 나누어 경작할 수 있는 감자가 조세의 단위였다면 그때그때 합치고 나누는 화폐가 나왔을지도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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