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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중국] 태평천국 운동과 동치중흥 그리고 청일전쟁2020-08-19 10:0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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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이나리터러시] 하버드 중국사 청_ 0819 발제



태평천국 운동과 동치 중흥 그리고 청일 전쟁



이상화된 유교적 관점으로 사회가 운영되는 것 같지만 같은 상황에서 본질적으로 무질서를 조장한다는 도적, 비밀결사, 반란자들이 넘쳐나는 영역이 있다는 사실. 그리고 이 두 가지 영역이 서로 상부상조하는 현상. 어느 시대나 권력을 유지하는 건 표면적으로 권력집단인 것 같지만 그에 저항하는 세력 덕분에 권력 유지가 가능하다는 사실과 연결된다. 협력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지만 권력의 유지는 반대세력과의 보이지 않는 상호 협력이 밑바탕을 이룬다. 

청이 쇠퇴하면서 다양한 형태의 일탈 집단들이 강력한 세력으로 성장했다. 이 중 대표적인 것이 백련교도의 난과 태평천국 운동이다. 백련교의 난은 종파 활동 조사, 농촌 기근, 화신 일당이 자행한 재정 착취가 직접적인 원인이었다. 난은 대규모로 발생하지 않았고, 반란 지도자들은 대부분 단기간 내에 살해되거나 체포되었다. 1799년 퇴위한 건륭제가 죽고 가경제가 친정을 시작했을 때 2000명 정도의 백련교도들만이 싸우고 있었다. 그러나 가경제는 백련교도들과의 전쟁을 종식시킬 수 없었다. 모든 부대들이 가능한 모든 속임수를 통해 전쟁을 질질 끌었다. 많은 전투가 지방 장교들의 통제를 받는 용병에 의해 수행되었고 지방군은 전투 때마다 상여금을 받았기 때문에 용병과 지방군이 공모한 채 전쟁을 질질 끌었던 것이다. 백련교도의 난은 청이 군대를 장악할 능력을 상실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사건이었을 뿐만 아니라 해안에서 발생하는 해적의 위협을 격퇴하거나 영국의 침략에 대항할 만한 능력이 없음을 보여주었다. 게다가 재정 손실도 엄청났다. 건륭기에 축적된 국부는 백련교도와의 전쟁을 진압하느라 완전히 소모되고 말았다.

태평천국 운동의 창시자인 홍수전은 객가 촌락의 훈장이었다. 홍수전은 지방 과거에 급제한 후 광주에서 행해지는 향시에 세 번이나 응시했으나 모두 낙방했다. 그는 와중에 기독교 전도용 소책자인 <권세양언>을 아주 색다른 방식으로 해석하였고 기이한 꿈을 통해 예수의 동생이 되었다. 비록 태평천국과 삼합회의 이념은 근본적으로 달랐지만, 두 조직은 북쪽 사람들이 몇백 년 동안 내륙 아시아 정복 왕조 시기부터 혼혈로 오염되었기 때문에 남쪽 사람들이 ‘진정한’ 중국인이라는 믿음을 공유했다. 태평천국은 때때로 충돌하기도 했지만 대부분 지방 신사들과 합을 이루었다. 공자는 우상 숭배 척결을 위한 적으로 규정되었으며 만주족 청의 관리들 또한 사라져야만 하는 악귀였다. 1853년 태평천국군은 청의 국내 상업 중심지인 무한을 함락했고, 홍수전은 남경을 태평천국의 수도로 선포하고 거의 10년 동안 천왕의 지위를 유지했다. 이렇게 태평천국 운동이 한창일 때 청 조정은 유럽의 두 번째 침공에 처하게 된다. 태평천국의 도전에 대처하느라 유럽의 침공에 크게 주의를 기울이지 않은 청은 결정적인 멸망 서사에 직면하고 만다. 

청이 내전에 휘말려 있는 동안 애로호 사건이 발생했다. 광주의 관헌들이 아편을 수입하려는 중국인 선원들을 체포하기 위해 애로호에 승선했고, 그 과정에서 영국의 광주 영사 해리파크스가 중국 관헌들이 영국 국기를 끌어내려 여왕을 모욕했다고 항의했다. 그러나 나중에 조사해 보니 영국 국기는 아예 게양되어 있지 않았다. 해리 파크스의 교묘한 거짓말과 속임수로 인해 영국의 시모어 제독은 광주를 포격하여 전쟁을 개시했다. 그러나 애로호는 핑계였고 진정한 개전 이유는 물론 영국과 중국 간의 무역, 영국의 인도 식민지, 그리고 영국 경제에서 절대적인 핵심이었던 아편이었다. 2차 중영전쟁은 1차 중영전쟁, 즉 아편 전쟁을 반복한 것에 불과했다. 청은 가능한 광주 주변으로 전투 지역을 국한하려고 했던 반면 영국은 전투를 확대하여 해안을 거쳐 남경까지 들어가려고 했다. 그러나 남경을 태평천국군이 잡고 있었기 때문에 이 전략은 통하지 않았다. 전쟁은 천진 조약과 북경 조약으로 이어졌고, 청은 구룡 반도를 할양하고 천진을 추가로 개항해야 했다. 

1860년대 말 청 제국은 멸망 직전의 상태였다. 외국의 야만인들은 수도를 점령하고 원명원을 불태웠으며 국내의 반역자들은 남경을 점령하고 반체제 정부를 수립한 상황. 그럼에도 청은 살아남아 있었다. 청의 지식인들은 서태후의 아들인 동치제의 치세(1862~1874)를 ‘중흥기’로 선언하기 시작했고 조정은 이를 받아들였다. 페어뱅크는 동치기를 서양이 중국에 끼친 영향이 발현되는 최초의 중대한 시기이자 청의 ‘근대화’를 이룬 시기로 만들었다고 보았다. 천진 조약과 북경 조약을 통해 중국이 국제 사회의 일원이 되었다는 것이다. 서구 열강들은 ‘기독교도’인 태평천국 세력보다 청에 호의를 보였다. 그들은 조약을 통해 보장된 상당한 특권을 보유했고 중흥이 그들에게 이익임을 알고 있었다. 메리 라이트는 페어뱅크와는 다르게 동일한 사건을 비극으로 평가했다. 서양으로부터의 차용물은 소수에 그쳤고 마지못한 타협에 불과했다는 것이다. 한편에서는 동치 중흥을 정치권력이 분권화되는 현상의 시작으로 보기도 했다. 

서부 국경에서는 대규모의 분리주의 운동이 일어났다. 강희제와 건륭제가 18세기에 거쳐 잔인하게 정복한 북서부 신강에서는 이슬람 전사 야쿱 벡이 이끄는 자치 정권이 생겼다. 야쿱 벡 정권은 1875년 좌종당에 의해 토벌됐으며 이는 광대한 이슬람 중앙아시아의 재정복을 의미했다. 1884년 신강은 중국의 성으로 선포되기에 이른다. 이는 변경에 대한 청 말기의 통상적인 지방화를 보여주는 단면이다. 대만은 신강 정복 3년 후에 성급 지위를 인정받았고 만주족의 발원지인 만주는 동북 3성이 되었다. 한편, 태평천국 이후 발생한 또 다른 추세는 인구의 중산 계급화(부르주아화)였다. 신사 계층과 상인 계층이 결합하여 신상 계층이 등장하였고 상인 단체들의 활동도 점점 정교해졌다. 새로 설립된 기업체는 모두 최근에 문을 연 개항장에 들어섰고, 이들은 외국의 설계사, 기술자, 관리자, 그리고 기계에 의존했다. 이 기업체들은 중앙 정부가 아닌 성급 지방의 총독과 순무의 주도로 설립되었다. 이홍장과 장지동 같은 지방 관료들은 서양 문물의 선택적 도입에 적극 찬성해 양무파와 불리기도 했다.

이러한 중흥의 움직임과 초기 산업화는 청일 전쟁의 패배의 인해 철저하게 실패했다는 평이 우세하다. 그 중 서구 ‘제국주의’가 끼친 영향을 무시할 수는 없다. 서양의 역사가들은 19세기의 서양 국가들이 일본 시장보다 중국 시장에서 더 탐욕스러웠으며, 군사력과 법적 권한을 동원하여 청을 세계 경제 안에서 ‘속국’이나 ‘주변국’의 지위로 격하시키려 했다고 주장했다. 서양 국가들이 자신의 이익을 유지하기 위해 중국이 정치적으로 유능한 민족 국가로 거듭나지 못하도록 낡고 비틀거리는 청 제국 정권을 의도적으로 지지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어떠한 원인으로 평가하든 청말의 초기 산업화는 모택동 이후의 개혁 시대의 극적인 성공과 직간접적인 영향이 있음을 주지해야 한다. 

청의 마지막 반세기 동안 가장 위험한 적대국은 서구 열강이 아닌 일본이었다. 서구 충격에 대한 일본의 반응은 중국보다 훨씬 신속하고 단호했다. 청일 전쟁은 청 제국에게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큰 재앙이었다. 청이 더 우수한 화기와 큰 전함을 보유했지만 일본에 비해 기술적으로 열등했다. 가장 결정적이었던 것은 청 지상군의 수준이 매우 형편없었고 전략적으로도 서투르고 지리멸렬했다는 점이다. 청은 1895년 일본과의 평화를 모색하다 시모노세키 조약에 사인했다. 청일전쟁은 수십년 동안 주변국에 자신의 권세를 적극적으로 과시해온 청 제국이 실제로는 놀라울 정도로 허약했다는 것을 처음으로 만천하에 보여주는 계기가 되었다. 청의 취약성이 만들어낸 힘의 공백은 동아시아에서 제국주의의 범람을 야기했다. 청은 일본식 서구화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고 느꼈고 일본으로 유학생을 보내는 정책을 강화하기도 했다. 양계초와 같은 젊은 지식인들이 메이지 일본의 예를 들어 입헌 군주제의 가치를 주장한 ‘입헌 운동’을 주장했으며, 이는 중국의 제국 체계에 종말을 가져오는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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