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기

제목[역사] 가해자에게 전쟁은 어떤 의미인가 (<전쟁과 죄책> 발제) 2024-04-15 10:06: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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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과 죄책서장 죄의식을 억압해온 문화, 1장 의사와 전쟁, 2장 길 아닌 길

 

독일 소설가 귄터 그라스가 쓴 작품 양철북에는 두 차례의 세계대전을 배경으로 스스로 성장하기를 멈춘 이가 등장한다. 스스로 성장을 멈췄으나 누구보다 자신이 우월하다는 착각에 사로잡힌 주인공은 한때 나치에 동조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소설에 자신의 이야기를 담았다는 의혹이 오랫동안 따라다녔고, 결국 노년에 이르러 귄터 그라스는 자신이 소년 시절 나치 친위대에 복무한 적이 있음을 고백했다.

 

이후 귄터 그라스는 1999년 노벨 문학상 수상자가 되었다. 전쟁의 세기였던 20세기를 마무리하는 마지막 노벨 문학상은 이렇게 전쟁 가해 경험을 이야기하던 작가에게 돌아갔다. 우리는 전쟁을 피해자의 이야기로 접할 때가 많지만, 전쟁은 이처럼 가해자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전범국가인 일본에서 태어난 이 책의 저자 역시 전쟁 가해의 경험에 주목한다. 그 가해자들의 이야기를 듣는 일이 왜 중요할까?

 

전쟁이 수많은 피해자를 만들고, 피해자들의 삶을 파괴한다는 사실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그렇다면 가해자들의 삶은 어떨까? 우리는 가해의 경험을 솔직하게 고백하지 않은 채 변명으로 일관하는 전쟁 가해자들의 서사에 익숙하다. 그들이 아무 반성 없이 살아간다고 비난하기도 한다. 이 책의 저자는 가해자의 고백을 기록하면서도 여전히 남아있는 일본 사회의 변명과 반성 없음에 주목한다.

 

언제부턴가 나는, 침략전쟁을 재검토하지 않고 그 시기에 어떤 전쟁범죄를 거듭해서 저질렀는가를 검증하지 않고, 그 시대를 부인과 망각으로 넘겨버리는 자세가 얼마나 우리의 문화를 빈곤하게 만들어왔는지 고찰하고 싶어졌다. 죄를 자각하고 살아온 소수의 정신을 통해 다수의 그림자를 부각하고 싶었다.(24) 저자의 의도는 가해자라는 이유로 전쟁을 외면해 온 이들이 자신들의 사회를 어떻게 파괴했는지 밝히는 데 있다.

 

끔찍한 전쟁범죄를 저지른 이들에게 우리가 흔히 상상하는 잔인한 본성이나 사악한 광기가 없다는 점은 놀라운 동시에 또 다른 섬뜩함을 느끼게 한다. 바로 그 전범들이 어떤 면에서 우리와 아주 비슷하다는 점이다. 그들은 국가나 집단이 시키는 대로, 혹은 집단 안에서 더 유리한 위치에 서기 위해 살아가던 이들이었다. 마침 전쟁을 일으킨 국가에서 태어난 그들은 일종의 임무처럼 폭력이나 범죄에 가담한다.

 

여기에는 스스로 깨닫지 못한 채 집단에 준거해서 사는 인간의 정신세계가 잘 나타난다. 자아가 분명하지 않은 사람은 집단으로 있는 한 불안하지 않다. 집단이 혼란에 빠질 때는 자신도 혼란에 빠지지만, 그때뿐이다. 집단은 끊임없이 개개인이 한 행위에 대한 책임을 모호하게 흐리고, 집단이 요구하는 모든 행위에 동의하도록 요구한다.(51) 저자는 자신이 소속된 집단을 기준으로 살아가는 이들에게서 문제를 발견한다.

 

한나 아렌트 역시 독일 전범들에게서 비슷한 문제를 발견했었다. 아렌트는 이 문제를 사유의 무능이라고 지적한다. 사유하는 능력을 자신이 소속한 집단에 맡겨버렸기에, 개인들은 사유가 불가능해지는 상황에 처했다는 말이다. 어떻게 그들은 자명해 보이는 폭력이나 범죄의 기준마저 사유하지 못하는 채로 집단에 모든 결정을 맡겨버리게 되었을까? 여기서 말하는 사유가 집단의 공리를 추구하는 사유가 아님은 명백하다.

 

의사는 환자의 인간관계나 생활사에 별로 관심이 없다. 질병에 관계가 있을 법한 것들을 몇 마디 물어볼 뿐이다. 오히려 환자의 생활을 자세히 알면, 치료할 때 판단이 흐려진다고 생각하기 쉽다. 이렇게 환자를 살아있는 물체로 보는 훈련을 쌓아간다. 하물며 생체 해부한 남자라니. 그의 얼굴이나 손을 기억하지 못하도록 무의식적인 억압이 내면에서 작동했을 것이다. 절개한 장기는 눈앞에 떠올라도, 표정이 있는 얼굴의 생김새는 기억나지 않는다. 그런데 그 어머니의 편지로 인해, 그 남자가 갑자기 하나의 인격체로 떠올랐다.(56~57)

 

이 문장은 전쟁 당시 중국에서 살아있는 인간을 해부했던 일본인 의사의 고백을 재구성한 글이다. 놀랍게도 이 문장은 전쟁과는 무관한 현대를 살아가는 의사의 이야기라 해도 무방할 정도로 우리에게 익숙하다. 우리는 집단 안에서 살아갈 때 더없이 무능한 사유 행태를 보인다. 그런 상황에서 자신이 가해자임을 고백하는 일은 어떤 의미일까? 그 고백은 저자의 말대로 죄를 죄로 인식하는 능력을 보여준다.

 

저자가 한국어판 서문에서 지적한 대로 우리나라도 이 가해의 경험에서 자유롭지 않다. 외국인이나 장애인, 소수자들에 대한 혐오는 집단 안에서 힘을 얻는다. 베트남 전쟁에서 우리 군이 저지른 범죄는 사회적으로 거의 언급되지 않으며, 군수산업의 성장은 다른 국가의 전쟁을 이익의 수단으로 삼는 일을 정당화한다. 우리 역시 일본과 마찬가지로 집단 안에서 죄를 죄로 인식하는 능력을 발휘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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