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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문학] 텁텁하고 눅눅한 (《에세이즘》 2주차)2024-06-26 17: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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텁텁하고 눅눅한 

기픈옹달([email protected])


'5년이 채 안 되는 간격으로 부모를 잃은 한 청년, 아니 한 소년에게 '(대문자) 이론'이 왜 그토록 매력적이었는지 이제는 안다.'(69) 이 문장에 이르러 쓴 웃음을 짓고 말았다. 들을 필요가 없는, 반갑지도 않고 그렇다고 어떤 연민이 생기지도 않는. 조금 심하게 말하면 신파라고 할까. 충격적인 개인사 - 특히 가정내 문제 - 를 현대철학을 통해 치유했다는 식의 이야기는 나에게는 낡디낡은, 뻔한 서사였기 때문이다. '어머니는 짜장면이 싫다고 하셨어'와 같은 식의 눅눅하고 빛바랜 호소. 글쓴이의 진정성을 의심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 진정성 때문에 고개를 돌려버리게 되는. 


돌아보면 그렇게 여리고 섬세한 영혼들을 숱하게 만났다. 자크 데리다의 이름을 만나는 순간 심증은 확증이 되었고 그렇기 때문에 실소를 터뜨렸다. 물론 해체주의는 누구에게는 구원이었을 테다. 혼란스럽고 어지러운 세계를 설명하는, 재난 속의 섬광으로 다가왔겠지. 그렇게 해체주의자들에게 열광하는 사람들을 오래전에 지나쳤다. 프랑스 현대 철학자들의 세례를 받은 산만하고 어지러운 문장들. 단절과 도약을 위한 쉼표들, 그 쉼표들 사이를 널뛰는 국적없는 단어들. 


지금은 그런 글을 읽지 않는다. 그것은 그런 사람들과 멀어졌기 때문일까. 아니면 시대가 달라졌기 때문일까. 전자라면 지극히 개인적인 소회에 불과할 것이고, 후자라면 어떤 변화가 있었기 때문일 테다. 후자를 말해보자. 해체주의가 이야기하는 곤혹스런 주체의 문제가 한 시대의 과잉된 자의식이 아닐까 질문해 보는 것이다. 주체의 붕괴, 해체된 주체가 내놓는 산산조각난 문체가 더이상 매력적이지 않은 것은 그 해체가 낳은 것이 폐허나 공허도 아니며 나아가 타자에게 친절한 무엇도 아니라는 생각 때문이다. 해체주의자들이 겪은 재난적 현실에도 불구하고 더 좋은 세상이 나오지 못한 것은 그 해체 작업의 미완 때문일까 아니면 그것이 힘없는 공염불이었기 때문일까. 나는 방황이 저항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방황이 스타일이 될 때 그것은 저항이기는 커녕 지독히도 고집센 권위있는 독백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스타일. 그것이 해체건 변화건 발명이건 새로운 스타일은 새로운 메시지를 낳는다. 누구나 명징하게 직조한 문장을 쓰고 싶어하나 그것이 늘 환영받는 것은 아니다. 자칫 어떤 스타일은 무겁고 둔탁하게 독자를 단련한다. 스타일에 복종하기를. 그래서 몇번이고 문장을 앞으로 뒤로, 뒤에서 앞으로 앞에서 뒤로, 밑줄 그어가며 분절하고 분석하게 만드는 것이다. 언어란 권력을 낳는 도구이기 때문에 독자는 길들여지거나 아니면 미끄러지거나 둘 가운데 하나를 선택하도록 강요받는다. 


책을 읽으며 매력적인 스타일은 무엇일까 생각해 보았다. 쫄깃쫄깃한 무엇. 꽁끼꽁기하고 선득선득한 무엇. 반쯤은 비어 있는 말. 그래서 그것을 사용하는 사람들이 마음껏 채울 수 있는 풍성하고도 주인 없는 언어. 주인 없는 말, 의미에 붙어 있지 않고 수행하며 표현하는 단어. 누군가는 그것이 해체주의의 세례를 받은, 혹은 해체 이후에 도래한 것들이라 하겠지. 무튼 저자가 이야기하는 것처럼 기존의 단어를 배열하고 배치하여 의미의 차이, 그 변주를 즐기는 것보다는 출발을 알 수 없는 말들을 좋아한다. 아마도 그것은 언어를 사용하는 다른 방식, 저자가 기원에서 출발하여 언어를 재구성하고 재정의하고자 한다면 반대로 기원이 상관없는 뿌리없는 말들을 그저 빌려쓰고 사용함으로, 때로는 강탈하면서 말을 가지고 노는 식의 방식에 익숙하기 때문일 테다. 


요즘 내가 쓰는 글은 설명하는 글이다. 쉽고 친절하게 이야기해주는 글. 아니, 글을 쓴다고 하기 보다는 교안을 만든다고 하는 것이 더 정확한 말이겠지만, 그래도 쓴다고 한다면 '말'을 쓰고 있다. 그것이 '가르치는 말'이라는 점에서는 권위적이지만 들려주어야 하는 말이라는 점에서는 친절하다. 매 시간 읽어줄 글을 쓰고 있는 셈이다. 구어체 문장을 쓰면서 느끼는 것은 그것은 그것대로 또 다른 어려움이 있다는 사실이다. 독자를 상상하는 글이 아닌 청자를 상상하는 글. 그 글은 결코 내지르는 글이 될 수 없다. 저자는 저자 고유의 무기, 마음껏 자신의 말을 내놓을 수 있다는 그 자유를 박탈 당한 채 글을 써야 한다. 최소한의 공통된 규칙에서 일단 출발해야 한다. 


문어文語적 세계에서 구어口語적 세계로. 문어적 세계와 달리 구어적 세계에서 주체는 스스로를 탐구하지 않는다. 주체는 자신을 분석하거나 해체하지 않고 자신을 드러낼 뿐이다. 때로는 발화와 동시에 혹은 말한 뒤에 사후적으로 자신을 발견하기도 한다. 주체는 해체되었는가? 아니 주체의 해체는 성공할 수 있는가? 문어적 세계, 언어의 집에서 탈출하지 못하는 주체는 거대한 독백의 블랙홀로 독자를 끌어들일 뿐이 아닐까. 해체주의자들의 추종자들이 자유로워 보이기보다는 해체라는 사슬에 묶인 것 같아 던지는 질문이다. 독백같은 글을 읽으며 저자의 내면에, 저자의 자아에 천착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다.


현대철학이 주체의 해체, 혹은 주체의 종말을 도래하게 만들었는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저자의 종말은 코 앞에 닥친듯 하다. 작사와 작곡가보다는 가수, 그것을 수행하는 자가 주목받듯 저자는 뒷방으로 물러나고 크리에이터라는 이름의 새로운 인종이 무대를 채우고 있다. 요즘 보니 크리에이터들의 에세이가 인기다. 저자가 이야기하는 '에세이'와 이들의 에세이를 같이 놓고 볼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그렇지만 독자건 구독자건 누군가를 선망하고 소비한다는 점에서는 똑같다. 도리어 의문이 드는 것은 무엇이 더 평등한 언어인가 하는 점이다. 

 

적어도 나는 우울과 위안을 이야기하는 글에서 평등을 찾지는 못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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