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기

제목 [윤리학] <페미니스트, 퀴어, 불구> 2장 일치한 시간과 어긋난 시간2024-06-28 22:06
작성자

[윤리학세미나] ‘페미니스트, 퀴어, 불구

 

2장 일치한 시간과 어긋난 시간

2024-06-28라라

 

언젠가 어디선가

 

2장은 애슐리X 사례를 통하여 장애를 극복하고자 하는 노력들이 바람직한 것인지 문제를 제기한다. 애슐리는 1997년에 태어나 몇 달 후 정적 뇌병증이라는 진단을 받는다. 심각한 신경 질환으로 비장애인과 같은 인지나 신경학적으로 발달을 기대할 수 없는 상황이 된 것이다. 애슐리가 7(2004)이 되었을 때 애슐리의 부모는 집에서 그녀를 돌봄에 있어 애슐리의 사춘기와 신체 성장이 어떤 영향을 끼칠지 의사들과 논의한다.

 

결론은 애슐리의 성장을 억제하기 위해 고용량의 에스트로겐 요법, 자궁과 유방싹을 절제하는 치료(Treatment)를 하기로 한다. 애슐리의 부모와 의사들은 애슐리의 미래를 위해서 필요한 것이라고 믿었다. 아이가 크면 부모가 돌보기 어려울 것이고 심지어 부모가 아이를 다른 사람에게 맡겨야 될지도 모른다는 불안은 치료를 앞당겼다.

 

애슐리는 7살에 치료(Treatment)를 시작했다. 13(2010)이 되었을 때는 9세 소녀의 평균 키와 몸무게로 성장이 멈췄다. 의사들과 부모의 기준에서는 치료는 성공적이었다. 그러나 장애인과 장애 활동가에게 애슐리 치료는 그냥 받아들일 수 없었다. 법적으로 항의하였으나 이후 병원에서 장애 아동에 대해 성장 억제나 불임시술을 할 경우 법원의 허가를 받고 관리 감독을 철저히 하는 것으로 합의했다.

 

의사들[건서와 디에크마]은 애슐리의 치료(Treatment)에 있어 몸집이 작으면 신체적으로 정서적으로 도움이 될 것이라고 주장한다. 애슐리는 정상적으로성장하지 못하기 때문에 몸과 마음이 떨어져 자란다는 논리로 몸에 개입을 시도 하는 것이다. 심신의 격차를 줄여야 삶의 질이 높아진다는 것이다.

 

건서와 디에크마은 성장억제를 위한 치료에 자궁절제술은 부수적인 문제로 여긴다. ‘불임시술이란 단어조차 언급하지 않는다. 애슐리는 자녀를 양육할 능력이 없으므로 자궁이 필요없다는 논리이다. 미래에 재생산이 없다면 윤리적 우려없이 없애도 된다는 이야기이다. 여성을 재생산을 위한 범주에 놓아두는 것이다. 또한 유방절제술의 경우도 유방암이나 섬유낭종의 성장 가능성을 없애고 성애화되는 걸 막을 수 있다는 이유이다.

 

애슐리의 치료는 몸과 마음 사이의 괴리를 교정하는 한 방법으로 설명되었다. ‘신체적자아를 인지적 자아에 더 가깝게만드는 것이 올바르다고 인식하는 것이다. 마음과 몸이 일치하기 바라는 욕망은 누구나 있다. 하지만 일치하는 사람이 존재하기는 할까? 일치한다고 믿는 것은 아닐까? 아동을 미완성의의 성인으로 보면 아동은 항상 성장과 발달을 통해 어른으로 상향이동 해야 한다.

 

어른으로 나아가지 못한다고 여기는 지적 장애는 흔히 아동기와 연결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애슐리의 경우 정상적인 성인으로 활동할 수 없다고 기준을 두는 것은 성인이라면 생산성과 연결이 되어야 하는데 애슐리는 그럴 수 없다고 단정 짓는 것이다. 그녀는 베개 천사로만 남아 있어야 한다.

 

치료(Treatment)를 받은 애슐리의 삶의 질은 나아졌을까? 사실 을 측정한다는 것은 무리다. 많은 사람들이 경험을 바탕으로 사용하지만 장애인들은 정확하게 평가하기 어렵다. 삶의 질은 몸과 마음의 조건보다는 자원 및 지식체계에 대한 접근성에 영향을 더 받기 때문이다. 애슐리의 삶의 질을 분석한다는 것은 모호하고 모순이다. 누구도 을 측정할 기준이 없기 때문이다.

 

애슐리의 삶의 질을 논할 때 통증없음에 초점을 맞추는 것보다 즐거움에 무게를 두어보자. 애슐리가 섹슈얼리티를 상상할 수 있을까? 부모와 의사들은 애슐리가 자기 생성적이고 자기 주도적인 섹슈얼리티의 잠재력을 인식조차 못한다고 여긴다. 그러나 애슐리가 지적으로 이해하지 못한다고 해서 느낄 수 없다고 해석되어서는 안 된다.

 

그래서 애슐리치료가 불러온 미래는 완전히 사유화된 미래이다. 장애와 장애인이 핵가족에 의해, 핵가족 내에서 돌봄 받는 사적인 영역에 귀속되는 미래이기도 하다. 혈연관계로 맺어진 가족관계에서 이루어지는 돌봄이 최선인 것처럼 여겨지게 만든다. 혈육만이 사랑과 돌봄을 유지할 수 있다는 착각을 만들기도 한다. 그런 가족이 결정한 치료와 돌봄는 사적인 영역이 되고 돌봄 노동자의 열악한 처우와 보상의 근거가 되기도 한다.

 

사회적 지원도 중요하지만 사회적 지원을 유토피아적인 것으로 규정하면 다른 미래, 다른 현재의 가능성이 부정될 수 있다. 장애권리 운동과 자립생활 운동을 지지하지만 성장억제, 불임시술, 유방절제술이 시설화를 막는데 필요한 일인 것처럼 활용되는 상황은 우리가 맞서서 싸워야 한다.

 

엘리슨은 여기서 더 나아간다. 불구의 미래성. 미지의 것을 붙잡으려한다. 애슐리같은 백인 베게 천사에 가려진 표준 치료는커녕 가난, 폭력, 불평등에 희생되는 아이들, 인종과 계급으로 고통받고 있는 사례도 있기 때문이다. 또 주류 페미니스트들이 애슐리 사건을 단순히 장애의 문제로 보고 침묵을 지켰다는 것에 배신감, 분노, 수치심을 느낀다고 한다.

 

엘리슨은 애슐리를 예외적인 사람이 아니고 다른 장애인들과 다르지 않다고 주장한다. 애슐리를 장애인이 아닌 불능인으로 재현하는 것은 손상을 본질적으로 탈정치화된 것으로 위치 짓는 비장애중심주의적 논리를 승인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비동시적인 몸과 마음을 기괴하거나 병리적인 것이 아닌 다른 방법으로 접근하는 방식을 요구한다.

댓글

(자동등록방지 숫자를 입력해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