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기

제목[문심조룡] '조룡'보다 '문심'2024-08-13 11: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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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룡보다 문심

에레혼

워드 프로세서 프로그램을 클릭하면 빈 문서가 펼쳐진다. 깜빡이는 커서가 새로운 내용을 채우기를 종용한다. 글쓰기는 긴장과 고통을 동반한다. 누군가 '글 짓는 마음(문심文心)'이 무엇인지 묻는다면, 망설임 없이 달갑지 않은 심사라고 답할 테다. 아무 글자도 없는 화면, 그곳에 방만한 생각을 정리해서 글자들을 건져 올리는 일. 문장을 짓는 매 순간이 선택의 과정이다. 훌륭한 글감이라 판단했던 아이디어도 텍스트가 구체화되는 과정에서 수십 번, 수백 번 폐기된다.

글을 적어 내려가는, 글쓰기 시간 자체는 그나마 나은 편이다. 진정한 고통은 글쓰기 이전까지의 과정에서 발생한다. 내가 글을 쓰는 일을 달갑지 않게 여기는 데에는 다가올 고통을 잘 알기 때문이다. 문장을 완성하기까지의 지난한 과정에서 나는 스스로를 쥐어짠다. 글 쓰기를 위한 준비 단계는 나 자신을 소모하는 과정이다.

누군가는 글짓기에서 자아 탐구를, 세상에 대한 이해를, 창조에서 오는 희열감을 말한다. 이 모든 건 나와 거리가 멀다. 나는 종이 위에 생각을 그대로 옮기는 방법에 골몰한다. 이러한 생각 전이의 과정에서 스트레스가 최소화된다면 더할 나위가 없겠다며 글을 적을 뿐이다. 애초에 남이 어떻게 글을 써보라고 조언해주는 것은 크게 도움이 되지 않은 적이 많았다.

이런 고집 때문인지, 《문심조룡》에 대한 나의 평가도 마냥 긍정적일 수는 없다. 블로그와 베스트셀러 매대를 가득 채운 대가들의 글쓰기 비법. 나는 이런 비법들에 '흐린 눈'을 하고 바라본다. 글 쓰는 방법이란 작가의 숫자만큼, 그리고 쓰고자 하는 글 종류만큼 다양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글쓰기의 강령을 언급하는 듯한 유협의 태도에 반감이 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심조룡》은 중국 문학을 공부하면서 내내 눈에 밟히는 책이었다. 유협의 이야기가 단순히 글을 적는 세부 지침에 대한 이야기에 그치지 않고 글을 둘러싼 온갖 메타적 담론으로 확장되기 때문이었다.

'어떻게 하면 더 멋진 글을 쓸까.' '그 글이 유독 훌륭하다고 평가받는 이유는 무엇을까.' 유협은 《문심조룡》의 후반부에서 글을 한 번이라도 써본 사람이라면 공감할 고민을 내비친다. 유협은 성인의 말을 되뇌기만 해도 충분하고, 그들의 글쓰기-말하기 스타일만 답습해도 되는 시대를 산 인물이다. 그가 적은 《문심조룡》은 한마디로 동시대의 시각과 불화하는 책이었으며, 좀 더 확장된 차원의 문장론을 다루는 책이었다.

글쓰기의 출발점이 머릿속 생각이라는 데에 이견이 있는 사람은 드물 것이다. 《문심조룡》 역시 같은 이야기로 글 짓는 방법론에 대해 설명한다.

"문장의 구사에서 상상이 요원한 곳까지 비상한다. 따라서 묵묵히 정신을 하나로 모으고 사고하면 마음속 생각은 천년이 지난 것까지도 접촉할 수 있다." (<신사>, 534.)

"문사가 허공을 날아다니는 것 같은 상상을 발휘하면 기특한 연상을 만들어 낼 수도 있다. 그러나 언어는 실제적인 것이라 교묘하게 운용하기가 어렵다." (<신사>, 537.)

<신사>편에서 유협은 글쓰기 과정에서 구상의 단계에 대해 설명한다. 유협의 설명대로 글을 쓰기 위한 상상은 무궁무진하게 뻗어 나갈 수 있다. 하지만 마냥 상상력이 확장되는 것이 무조건 좋은 일은 아니다. 어차피 이러한 아이디어를 손으로 옮기는 과정에서 정보값 손실은 불가피하기 때문이다. 유협은 생각이 글로 온전하게 전환되는 일을 "재봉 자국조차 보이지 않는 천계의 옷(천의무봉天衣無縫)"과 같은 경지로, 그 반대의 경우를 천 리 이상의 간극으로 표현했다. 《문심조룡》에서는 글쓰기의 과정에서 온전한 생각의 전달과 생각과 전혀 다른 글이 나오는 경우가 모두 가능한 일인 듯 적었지만 어떤 상황이 더 빈번하게 나타나는지에 대해서는 굳이 설명을 보탤 필요가 없을 것이다.

한 가지 질문을 던져볼 수 있다. 생각이 글로 전환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간극이 사람마다 균일할까? 이 질문에 대해 쉬이 그렇다는 대답을 하기란 어렵다. 어떤 사람은 말하듯이 유려한 글을 쓰고, 또 어떤 사람들은 자신의 간단한 의사조차 제대로 문장화 하지 못해 오해를 사곤 한다. 유협은 이러한 능력차가 선천적인 요소의 영향이라고 이야기한다.

"(글쓰기의) 여덟 가지 풍격은 여러 번 변화하며, 성공은 학문에 달려 있고, 개인의 잠재적 재능은 타고난 기질에서 비롯한다. 기질은 감정과 의지를 충실하게 만들고, 감정과 의지는 언어의 문사를 확정하며 발언의 정교함은 성정과 관련이 없는 것이 없다." (<체성>, 554.)

어떤 사람은 트위터에 140자의 짧은 글을 쓰는 데에 재능이 있고, 또 어떤 사람은 페이스북에 몇 천 몇 만 이상의 긴 글을 쓰는 데에 재능이 있다. 에세이처럼 쓰는 글에 능한 사람이 있는가 하면, 논문과 같은 학술적 글쓰기가 가장 쉽다고 이야기하는 사람도 있다. 글쓴이가 장점을 드러내는 매체를 통해 그의 성격이나 재능을 역으로 유추하는 것 또한 가능하다. (물론 섣부른 판단이 될 수 있다.) 요즘 유행하는 MBTI 테스트처럼, 어떤 사람이 잘 쓰는 글을 보고, 그리고 그 사람이 자주 사용하는 수사법을 통해서 그이의 성품을 알아볼 수 있다고, 유협은 그렇게 믿었다.

"……겉으로 드러난 문사는 내재된 성정, 기질과 서로 부합하니 이로부터 천부적 자질과 재기의 대략을 알 수 있지 않겠는가?" (<체성>, 555.)

글쓰기 방법론에 대한 유협의 논의는 '창작의 정신적 과정(<신사>)' '작가 구체적 특성과 그들이 잘 운용할 수 있는 수사법(<체성>)'을 거쳐서 '작품 특성에 대한 분석', <풍골>로 향한다. 유협은 ''을 설명하기 위해, 고대 성인이 자신의 뜻을 전달할 때 풍이라는 단어를 사용했던 용례를 소개한다. ''이란 이러한 ''이 효과적으로 전달되기 위한 개요 내지는 구성을 가리킨다. 둘 중 하나라도 부족하면 훌륭한 글이 될 수 없다는 것이 유협의 주장이다.

"……문사가 골을 필요로 하는 것은 마치 형체에 골격이 필요한 것과 같다. 감정을 표현하는 데 풍이 있어야 하는 것은 마치 형체에 생기가 필요한 것과 같다." (<문골>, 565.)

"의의가 부족하고, 사조가 과해 번잡하거나 조리가 없으며 문골이 없다는 증거다. 사고가 주밀하지 못하고, 억지로 창작해 생기가 결핍되면 문풍이 없다는 증거다." (<문골>, 567.)

유협은 풍과 골이 조화를 이뤄야 훌륭한 글이 된다고 했으며, 여기에 <체성>에서 강조한 '기법의 완벽함(채採)'이라는 경지를 이룩해야 문장의 봉황(文筆之鳴鳳)”으로 거듭난다고 이야기한다. 유협의 요구 사항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글을 위한 발상, 수사법, 주제 의식과 논리적 구조에만 집중하는 작가는 자신이 사는 시대에만 매몰되는 우를 범하는 것이다. "각종 문체를 알아야 새로운 내용이라도 혼란해지지 않으며, 문학 창작의 변화를 알아야 문사가 기발해도 혼란에 빠지지 않게 된다.(<풍골>, 571.)" 《문심조룡》의 논의는 자연스레 '작품에 대한 통시적 탐구(<통변>)'로 이어진다.

고대 중국인들의 글에서 동시대의 요소를 부정적으로 인식하고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과거의 이상적 가치를 소환하는 논리 구조가 쉽게 발견된다. 유협 역시 <통변>에서 이와 비슷한 문제 의식을 보여준다.

"질박함에서 거짓된 것으로 변하면서 문학은 시간이 흐를수록 그 맛을 상실했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 그것은 근세의 것만 모방하고 먼 옛날의 작품을 귀감으로 삼지 않아 문풍이 암담하게 되어, 문장의 기세가 사라진 데 그 원인이 있다." (<통변>, 582.)

이러한 유협의 태도는 시대적 한계처럼 보인다. 위진남북조 시대 특유의 겉만 번지르르한 문체를 개혁하기 위한 방안으로 유협이 제시하는 해결책이란 경서에 대한 존숭이다. 좋은 글을 짓기 위해서 통시적 안목을 갖춰야 한다던 《문심조룡》의 핵심은, 경서의 뼈대가 이어져 온 전통을 발견하는 통찰력을 갖추는 데에 있다. 따라서 유협이 '' '' 중에 무엇을 더 중시했는가에 대해서는 굳이 자세하게 설명할 필요조차 없다. "푸른색과 붉은색을 제련하려면 남초와 천초를 이용해야" 하는 법이란다. 유협이 생각했을 때 '요즘 것들'이 제대로 된 글을 쓰지 못하는 데에는 본질을 보지 못하고 말단에만 천착하기 때문이다.

뼈대에서 멀어지고 나서부터 모두가 '같은 방식으로 용을 새기는' 시대가 열린다. 유협이 그나마 긍정적으로 바라봤던, 양나라보다는 공자님의 시대와 훨씬 가까웠던 한나라 시기에 문인들이 썼던 글을 보자.

"멀리 동해를 바라보니, 푸른 하늘과 이어졌구나." (매승, <칠발>)

"바라보니 끝이 없고, 살펴보니 끝이 없다. 해는 동쪽 연못에서 떠오르고, 달은 서쪽 언덕에서 솟아오른다." (사마상여, <상림>)

"하늘과 땅이 이어져 끝이 없고, 태양은 동쪽으로 솟아 서쪽 언덕 아래로 들어간다." (마융, <광성송>)

"해와 달이 이곳에서 뜨고 지나니, 하늘과 땅이 하나가 되네." (양웅, <우렵부>)

"태양과 달이 뜨고 지는 곳, 부상인가, 몽사인가?" (장형, <서경>)

다섯 시인이 쓴 시 어디에 문학사적 변화와 발전을 논할 근거가 있을까? 유협이 다섯 개의 구절을 인용한 의도가 "복잡한 변화 과정에는 반드시 계승도 있고 혁신도 있으며, 이것이 바로 통변의 방법"이라는 사실을 보여주기 위함이었다면, 이는 공감을 얻기 어려운 예시이다. 각 시에서 다루는 모티프나 운용하는 어휘에서 큰 차이를 보기 어렵기 때문에, 이는 ''에 대해 언급하기 좋은 사례일 수는 있으나 ''에 대한 심화된 논의로 이어질 수 없다.

변화하는 문장과 진화하는 문학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했다면, 시대의 흐름을 벗어나는 작가를 소개하는 것이 올바른 수순이리라. 《문심조룡》이 언급하는 작가들은 하나같이 용을 조각하듯 문장을 조심조심 써 나가던 이들 뿐이다. 유협은 도통의 줄기에서 벗어난 이들을 아예 다루지 않았다. 그들은 ''을 넘어선 이단이기 때문이었을까?

《문심조룡》의 독해를 가로막는 요소가 있다면, 그건 아마 '문심(文心)'이라는 핵심 아이디어가 아니라 '조룡(雕龍)'이라는 방법론적 강령일 것이다. '문심', '글 짓는 마음'에 대한 유협의 통찰은 시대를 초월하는 보편성을 지니고 있다. 반면 문장을 쓸 때 '용의 비늘 조각하듯' 하라는 '조룡'이 상징하는 기법과 규범에 대한 강조는 다소 경직되고 제한적으로 느껴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심조룡》이 여전히 가치 있는 이유는, 1500년의 시간을 뛰어넘어 현대의 독자와 여전히 공감대를 형성한다는 점에 있다. <신사>편에서 유협은 이렇게 말한다. "상상이 활동을 시작하면 여러가지 상념이 어지럽게 일어나고 … 붓을 들어 글을 쓸 때의 기세는 두 배는 왕성하지만, 다 쓰고 나면 처음 기세의 반밖에 되지 않는다." 이는 글쓰기의 희열과 탈고 이후의 허무함을 정확히 포착한 것이다.

글쓰기의 본질적 경험에 대한 시대를 뛰어넘는 공감. 이는 한시나 중국 소설을 읽을 때와는 다른, 새로운 차원의 독서 체험이다. 이것이 《문심조룡》의 방점이 앞 두 글자에 찍혀있다고 말하는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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