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기

제목[문심조룡] 때로는 균형도 비범함이 된다2024-08-20 1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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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로는 균형도 비범함이 된다

에레혼

글에 진심인 사람들의 출현. 《문심조룡》이 창작된 위진남북조 시기는 이렇게 요약할 수 있다. 고대 중국에서 글 쓰는 일에 심혈을 기울이지 않은 시대가 있긴 한가, 하고 반문을 던지는 이도 있으리라 생각이 든다. 하지만 중국 역사에서 이 시기만큼이나 글 쓰는 일 자체에 열과 성을 다한 사람들로 가득했던 때도 없다. 단서 조항 몇 개를 더 붙여서 위진남북조를 설명하자면, 이 시기는 '문장 미학에 골몰하던 사람들로 가득하던 시대'였다.

글짓기의 아름다움을 논하는 일은 위진남북조 이전 시대에도 나타나는 현상이다. 춘추 전국 시기에 좋은 글을 짓는 방법을 논했던 이는 한 두 명에 그치지 않는다. 한나라 때도 화려하기 그지없는 운문 장르가 유행해서, 오죽하면 그 장르에 '펼치다(, )'라는 이름을 붙일 정도였다. 그러나 위진남북조 때 글 짓는 일에 미친 사람들은 결이 달랐다. 그들은 글 쓰는 일 자체가 좋아서 글에 천착했다. 위진남북조의 문장 광인은 사상과 정치에 비교적 자유로워서, 어딘가에 얽매이는 일 없이 글짓기 미학 자체를 탐구할 수 있었다. 이는 춘추전국시대와 한나라의 글쓰기 경향과 대비된다. 춘추전국시대의 제자백가는 자신들의 사상을 설파하기 위해, 한나라의 문인들은 제왕과 정치에 복무하기 위해 글을 지었던 것이다.

이런 거친 비교를 듣고 나서 수많은 반례(위진남북조 이전의 아웃사이더들)를 떠올리는 게 무리는 아니다. 앞에서 강조하고자 하는 바는 위진남북조는 이런 아웃사이더들의 시대였다는 점이다. 대략 30년에서 50년마다 새로운 왕조가 들어섰던 이 시기에, 지식인들이 공명심이나 출세의 욕구를 강력하게 내세우기는 어려웠다. 게다가 위진남북조라는 '난장판 360'이 등장한 계기라 할 수 있는 한족-중원 왕조(한나라)의 붕괴는, 중국 사회의 사상 및 문화적 압력이 분산되는 사건이었다. 대다수 지식인에게 수호해야 할 중심 문화(한족-유가)는 상징적 구호처럼 변했으며, 심지어 이를 지키겠다고 나섰다가 화를 당하는 이들도 있었다.

위진남북조에 관해 가장 널리 퍼져있는 이미지가 바로 '죽림칠현'이다. 이들은 혼탁한 현실 정치 를 탈피하여 대나무숲으로 향한 지식인 집단이다. 이들은 탈속의 공간을 거닐며 현실과 상관없는 이야기를 나눴다. 혹자는 이러한 공리공론 때문에 위진남북조의 정치가 부패로 가득했으며, 해당 시기 지식인들을 비겁한 인물들이라고 낮잡아 보기도 한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이들이 현실 정치에 일정 정도 거리를 두고 현학에 매달린 결과 중 하나가 위진남북조 시기 글쓰기에 대한 이론의 고도화라는 사실은 부정하기 어렵다.

흔히 위진남북조 때 수차례 일어난 정권 교체와 반란이 문인들의 목숨을 구차하게 만들었다고 말한다. 이런 생명에 대한 집착은 (연단술의 발달이라는 결과로 흐르기도 하지만) 글이라는 도구에 유한한 생명을 승화할 수 있다는 믿음으로 이어졌다. 위진남북조 문장론의 시초라 평가되는 위나라 문제文帝 조비가 문장을 "썩지 않는 성대한 사업(不朽之盛事)"이라고 말한 것이나, 유협이 《문심조룡》에서 "인간의 재능과 지혜는 영원할 수 없기에 명성과 공적의 전수는 오로지 창작에 의지할 뿐"(950)이라고 언급한 데에서, 우리는 공통적으로 '필멸의 운명을 거스르는 기록매체'에 대한 광신을 발견할 수 있다.

정리하자면, 해당 시기 글쓰기에 대한 진지한 탐구는 '현실 정치로부터의 괴리' '유한한 생명에 대한 자각'에서 촉발된 것이다. 당시의 사회 현실과 문화적 배경의 배합은 글쓰기에 대한 사변思辨을 심화시켰다. 위진남북조 이전까지 글쓰기 방법론이란 성현의 뜻을 제대로 실어 나르기 위한 고민의 연장선이었다. 성현 운운할 필요 내지는 책임이 줄어든 유협의 시대에 글쓰기 방법론은 서술자의 생각을 온전히 전달하는 수법에 대한 논의로 흐른다. 《문심조룡》 전체 50편 중에 후반부 스물 다섯편은 이 방법론에 대한 유협의 시각을 담고 있다.

지난 시간에 살펴본 <신사>, <체성>, <풍골>, <통변>만 해도 차례대로 '글짓는 과정의 사고 구조 글쓰는 이의 구체적 특성 파악 및 문장 수사법의 운용 작품 특성 분석 문학 전반에 대한 통시적 고찰'을 논한다. 이어지는 <정세> <정채> 역시 창작의 시작 단계에서 고려해야 할 작품의 큰 틀과 방향성을 논한다는 점에서 글의 구상에 대해서 깊이 있게 논하는, 이전 시기 문학론에서 찾아보기 어려운 '글을 글로 대하는' 서술 중 하나이다.

"작가의 정취가 다르면 창작 수법도 변화한다. 정사情思에 따라 체제가 확정되고, 체제에 따라 문장의 기세가 형성된다." (<정세>, 598-595.)

"언어는 문채에 힘입어 오랫동안 멀리 전해진다는 말은 그 근거가 확실하다. 사상과 감정이 확실하게 드러나야 비로소 문채가 풍부하다고 할 수 있다." (<정채>, 619.)

<정세> '세勢를 확정()한다'는 제목은 글을 지을 때 골격을 정하고 체제를 선정하는 단계를 가리키며, <정채>에는 글의 표현 방식에 대한 이야기로 정情(작품의 내용, 본질)이 채采(작품의 형식, 외형)이 조화되어야 좋은 글이 탄생할 수 있다는 주장이 담겨있다.

이처럼 <정세> <정채>가 글쓰기의 초기 단계에 대한 내용이었다면, 이어지는 <용재> <성률>은 글쓰기의 후반 작업에 관한 내용을 담는다.

"정리情理의 문제점을 바로잡으려면 문사의 병폐를 고쳐야 한다. 강유의 근본을 근거로 체재를 선택하고 내용을 규범에 합치하게 만드는 것을 용의鎔意라 하고, 부화한 문사와 필요없는 구절을 산거하는 것을 재사裁辭라 한다. 재사를 통해 문사가 다시는 늘어지지 않게 만들고, 용의를 통해 전편이 강령을 명백하고 분명하게 만드는 것은 마치 목재에 묵선을 긋고 곡직을 헤아려 고끼로 깍아 내는 것과 같다." (<용재>, 624-625.)

"정사情思의 서사는 심원을 추구하고, 음률의 배합은 밀접한 연관에 힘쓴다. 마음에서 운율이 움직이면, 입술에서 음률로 조절된다. 문장의 성률은 요리에 사용하는 염매鹽梅와 유근楡槿처럼 조미와 부드럽게 만드는 작용을 한다. 어울리지 않는 음을 제거함은 성률의 조화 여부를 감추기 어렵기 때문이다." (<성률>, 649.)

<용재>는 글을 다듬는 단계에 대한 논의이며 <성률>은 글을 쓸 때 압운을 사용하는 방법에 대해 탐구하는 장이다. <용재> <성률>은 위진남북조 문학 이론의 특수성을 잘 보여주는 부분이기도 하다. 유협이 <용재>에서 지나치게 간략한 문장을 만드는 것이나 과도하게 번잡한 문장을 적는 세태를 비판하는 지적은 동시대 문풍점에 대한 비판이다. 또한 <성률>과 같은 장을 볼 때에는 위진남북조 시대는 성조에 대한 논의와 이론화 작업이 본격적으로 이뤄진 때이며, 동시에 운문 구절의 특정 위치에 어떤 성조와 어떤 발음의 단어가 배치되어야 하는지에 대한 논의 역시 심화되던 때라는 점을 상기해야 한다.

《문심조룡》은 나름의 유기성에 현학적 글쓰기 스타일이 가미되어 후대인들에게 찬사를 받았다. 글쓰기를 위한 수양을 논할 때의 작가의 발상에서 문학사의 연대기적 고찰로 나아가는 점진적인 설명, 글쓰기 초기 단계와 후반부 작업을 아우르는 논의 등은 어투만 제외하고 본다면 현재의 글쓰기 교재들이 갖추고 있는 체제와 유사한 부분이 많다. 이 때문에 《문심조룡》은 무비판적으로 천재의 작업물 정도로 치부되는 경향이 짙다. 그러나 우리는 반복적으로 질문을 던져야 한다. '유협이 《문심조룡》을 통해 그리는 이상적 작가의 상은 어떠한 모습인가?' 하고 말이다. 《문심조룡》 후반부 여덟 편의 글에서는 좋은 글쓰기를 위해 다양한 논의가 오고 가지만 핵심은 결국 조화에 있다. 유협의 논의는 한 부분에만 특출나지 않은 작가의 탄생을 예비한다.

"……각종 체재를 통괄해 보면 그 효능은 변별을 가늠하는 데에 있다. 마치 음악에 궁상宮商이 있듯, 색채에 주자朱紫가 있듯, 체세에 따라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정세>, 598.)

조화 역시 나름의 미덕이 있다는 변호는 공허하다. 이미 위진남북조에서, 그리고 중국사에서 수많은 기인들을 만나온 까닭일까? 《문심조룡》이 최초가 아니었다면 이토록 높은 가치를 인정받을 수 있을까 하는 생각도 감히 해본다.

어디 하나 부족함이 없는 무난한 글을 쓰는 작가보다는 치명적 결함을 안고도 재기발랄한 글을 쓰는 작가로 남고 싶다는 욕망은 지극히 개인적인 것일까? 유협의 지적으로 미루어 보건대, 튀는 글은 1,500년 전에도 많은 작가들의 지향점이었다. 근대의 작가는 대부분 기이하고 교묘한 것을 좋아하나, 그들 작품의 체제를 고찰해보면 하나의 잘못된 추제로 인해 그렇게 된 것이다. 예전의 형식을 싫어하고 견강부회의 방식으로 신기를 추구했다.”(<정세>, 602.) 《문심조룡》이 언급하는 조화와 균형이란, 무색무취를 이야기하는 바가 아니라 당시 글쓰기의 대세와 거리가 먼 모토였다. 시대적 차이를 고려하면, 유협의 시대에는 무난한 글이 오히려 독특한 글일 수도 있겠다는 전복적 해석을 하는 일도 가능하다. 때로 전복이란 복고 반동의 얼굴을 하고 있기도, 꼰대의 목소리를 내기도 한다는 사실을 잊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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