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기

제목[신유물론] 신유물론과 페미니즘의 소용돌이 속으로2024-03-04 09: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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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유물론×페미니즘: , 물질, 생명1부 젠더에서 성(): 신유물론의 지도그리기

· 신유물론()과 페미니즘, 그리고 버틀러 비판 김남이

· 신유물론의 렌즈로 읽는 그로스의 육체유물론: 사회구성주의와 생물학적 결정론을 넘어서는 을 향하여 이현재

 

연휴 동안 두 편의 논문을 읽으면서 소설 하나가 떠올랐다. 신유물론이나 페미니즘과는 아무 상관도 없는 에드거 앨런 포의 <소용돌이 속으로>인가 하는 소설이다. 바다에서 고기를 잡다 배와 함께 소용돌이에 휘말린 남자의 이야기가 소설에 등장한다. 함께 탔던 형제들은 모두 죽었지만, 남자는 소용돌이 속에서 살아 돌아왔다. 소용돌이를 관찰하는 남자의 집요한 시선과 빠른 판단력, 잽싼 몸놀림이 기억에 오래 남았던 소설이었다.

 

읽은 지 오래되었으므로 소설의 내용을 엉뚱하게 기억할 수도 있다. 다만 이 소설은 내게 생존을 추구하는 인간의 욕망이나 역량은 언제나 신체/정신의 이분법으로 구현되지 않음을 각인시켰다. 뇌가 신체의 한 부위이면서 기억과 사고에 관계하듯 몸은 단지 신체가 아니다. 마찬가지로 물질 역시 단지 물질이 아니다. 세계를 바라보는 우리의 틀이었던 이분법에서 벗어나야 신유물론이라는 새로운 틀로 세계를 바라볼 수 있다.

 

과거의 틀을 벗어나는 일은 마치 목숨을 걸고 소용돌이를 빠져나오는 일처럼 어렵다. 신유물론과 페미니즘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논쟁들은 그 소용돌이가 얼마나 크고 깊은지를 보여준다. 물론 신유물론이라 불리는 흐름들 내부와 페미니즘의 흐름 내부도 매끈하지 않다. 내부라고 부르기 힘들 정도로 경계가 불분명한 동시에 복잡한 결이 소용돌이치고 있음이 분명하다. , 이제 우리는 온몸으로 이 소용돌이에 뛰어들었다가 빠져나와야 한다.

 

이 책의 1부에서 읽은 두 편의 논문은 신유물론이 부상하는 현장에서 우리를 소용돌이 안으로 이끈다. 물질을 강조하는 신유물론은 여성을 사회적 구성물로 보는 고전적 페미니즘의 입장을 비판한다. 캐런 바라드의 경우에는 신유물론의 학풍을 만들기 위해 페미니즘 계보 안에서 이루어진 물질과 관련된 논의를 축소하고 부정한다. 사라 아메드는 이런 행위가 페미니즘을 대하는 신유물론의 특정 제스처라고 다시 비판한다.

 

이 비판의 소용돌이는 더 많은 이들이 가세하면서 폭을 넓힌다. 이들은 페미니즘과 신유물론 양편의 입장에 서서 페미니즘이 과학을 멀리하고 물질을 경시했으며, 신유물론이 자기 영역을 만들기 위해 페미니즘 내부의 물질 논의를 삭제했다는 주장을 반복한다. 특히 생물학적 성과 젠더가 구분되지 않는다고 주장하면서 수행성을 강조하는 버틀러 같은 이들에게는 물질(신체)을 중요하게 보지 않는다는 신유물론의 비판이 쏟아졌다.

 

다양한 신유물론의 입장은 버틀러 같은 학자들을 비판하며 세분화되고 다듬어졌다. 들뢰즈의 유물론을 소개하면서 기존의 유물론과 차별화하기 위해 신유물론이라 명명했다는 브라이도티 역시 마찬가지다. 브라이도티는 포르노와 성매매 논쟁 속에서 섹슈얼리티를 부정적으로만 보던 80년대 미국 상황에서 버틀러가 등장했음을 알고 있다. 버틀러의 초점이 권력의 이성애주의 매트릭스라는 사실도 마찬가지로 이해한다.

 

브라이도티가 푸코와 들뢰즈처럼 권력의 양가적 성격을 이해하고 권력과 욕망을 분석의 핵심으로 삼는다면, 니체와 푸코를 경유한 버틀러의 입장도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럼에도 버틀러(게일 루빈까지 포함하여)가 큰 비판의 대상이 되는 이유는 버틀러가 여성 주체에 관심이 크지 않기 때문이다. 단일한(혹은 몰적인) 페미니즘의 운동성(혹은 정치성)에 대한 집착이 여전히 대문자 여성 주체와 이성애 중심 페미니즘으로 쏠림을 보여준다.

 

만약 페미니즘(을 포함한 모든 정치적 논의)이 과학에서 무언가를 배워야 한다면, 그것은 세계를 설명할 유일한 법칙이나 결정론 같은 태도가 아님이 분명하다. 김남이가 결론에서 밝히듯 자연과학은 자괴파괴적 힘으로 기존의 개념들을 해체하는 일을 멈추지 않는다. 답을 내놓기 위해 몰두하는 듯 보이지만, 실상은 기존의 답과 질문을 부수는 일이 반복될 뿐이다. 신유물론 역시 페미니즘에 대해 그런 역할을 할 수 있다. (46)

 

이현재의 글은 그 과정을 조금 더 자세하게 다룬다. 신유물론과 페미니즘의 결합은 페미니스트들이 몸의 재형상화에 관심을 보이기 시작한 지점에서 이루어졌다. 몸을 정신의 대립물이나 수동적 대상으로 보지 않고, 행위자성을 갖는 물질로 보는 신유물론적 전회가 나타났다. 버틀러의 수행적주체성과 달리 몸을 중심에 놓고 주체성의 원료로 삼으려는 이런 경향이 바로 신유물론 페미니즘이다. (55)

 

이 새로운 유물론에서 물질은 수동적 질료 이상을 의미하며, ‘행위자성을 갖는 자기-조직적물질이다. 신유물론은 존재들의 위계보다 관계를 강조하며, 이 관계를 이종적 집합체로 이해하면서 인간중심 사고를 벗어난다. 또 몸이라는 맥락을 강조하면서 초월적이고 보편적인 인간 시점이라는 환상에서도 벗어난다. 이 몸은 생물학적 몸과 사회적으로 구성된 몸이 상호작용하는 되기의 존재론적 지점이다. (57 ~ 59)

 

몸을 문지방에 비유하는 그로스에게 몸은 비결정적인 경계이자 이질적 집합체이다. 그로스는 삼투성이라는 말로 통제나 예측이 불가능한 몸의 생산력을 설명한다. 경계 역시 더 이상 분명하게 통합된 전체와 관계되는 말이 아니다. ‘삼투성이라는 말에서 연상되듯 그로스에게 몸은 고체가 아닌 액체로 형상화된다. 이렇게 몸의 유연함을 설명하면서도 그로스는 성차를 전존재론적이며 전인식론적인 영역으로 본다. (68 ~ 69)

 

성차화된 몸들 사이에 환원 불가능한 간극이 있다는 그로스의 입장은 트랜스섹슈얼과 관련하여 오해를 낳기도 한다. 문제는 간극 자체가 아니라 이런 간극을 대하는 우리의 태도에 있다. 그로스는 이 간극이 배제의 조건이 아닌 협상의 조건임을 밝힌다. 우리는 언제나 차이 안에서 타자성과 만나게 된다. 중요한 일은 가부장제적 권력관계에 문제를 제기하는 여성되기이며, 여성 정체성을 탈안정화하는 일이라고 할 수 있다.

 

몸을 비환원적 성차의 지점으로 이해하면 우리에게 자유롭고 중립적이며 보편적이고 객관적인 입장이란 불가능하다. 오히려 이런 몸은 우리에게 되기의 성차화가 중요함을 일깨운다. 우리는 같은 몸으로 태어나지 않았고, 다른 몸의 삶을 온전히 이해할 수도 없다. 다만 윤리적 관계를 맺기 위해 각자의 몸이 가진 조건으로 협상할 뿐이다. 이해나 통제가 불가능한 이 소용돌이에서 살아나오려면 끊임없이 협상하고 협력하고 때로는 저항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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