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의 무대》 <쾌활한 지식>, <주름을 따라 주름을>, <본다는 것, 신체> 1978년 푸코의 두 번째 일본 방문과 관련하여 기획된 이 책은 푸코의 죽음 이후에도 이어진다. 초판의 이야기는 푸코의 방문과 함께 끝나지만, 이어지는 글은 모두 그 후 꽤 긴 간격을 두고 쓰였다. <쾌활한 지식>은 ‘푸코가 죽었다.’라는 문장으로 시작한다. 푸코의 이야기를 귀담아듣고 그 안에서 무언가를 발견하여 활용하고자 했던 이들이 느낀 황망함이나 상실감이 강하게 드러난다. 그들은 그렇게 푸코의 죽음에서 다시 이야기를 시작한다. 《성의 역사 1: 앎의 의지》를 번역한 와타나베 모리아키는 이 책과 푸코의 죽음 직전에 나온 《성의 역사 2: 자기 배려》와 《성의 역사 3: 쾌락의 활용》 사이에서 어떤 변화를 읽어낸다. 와타나베는 그 변화의 키워드로 들뢰즈의 푸코론에서 언급된 ‘주름’이라는 단어를 꼽는다. ‘주름’은 들뢰즈나 롤랑 바르트 등 여러 프랑스 학자가 언급한 단어이며, ‘사유의 외부성’을 말하기 위해 사용될 때가 많다. 이 ‘사유의 외부성’을 통해 사유는 더 이상 주체 내부의 문제가 아니게 되며, 주체가 소멸된 공간에서 바깥이 출현한다. ‘권력’을 분석하는 푸코는 이 내부와 외부에서도 ‘힘의 관계’를 읽어낸다. 이는 푸코에게 꼭 필요한 작업이기도 했다. 《성의 역사 1: 앎의 의지》가 세계에서 큰 반향을 일으킨 이후 푸코의 ‘권력’ 분석도 큰 비판에 직면했기 때문이다. 와타나베는 푸코가 새로운 돌파구를 찾다가 과거의 자신과 결별하게 되었다고 설명한다. 푸코는 《성의 역사 1: 앎의 의지》에서 예속된 주체를 논한다. 이 논의는 8년의 시간을 거친 후 출간된 《성의 역사 2: 자기 배려》와 《성의 역사 3: 쾌락의 활용》에서 ‘자기’의 윤리와 ‘생존의 미학’으로 변형된다. ‘주름’이 습관이며 내부와 외부의 힘 작용으로 생겨난다면, 주체는 외부가 뒤틀려 내부가 될 때 생겨난다. 이제 ‘주체’는 ‘투쟁적 관계’라는 ‘주체화’ 과정을 통해 생겨나며, 이는 윤리를 구성하는 ‘생존의 미학’이다. 다만 와타나베는 푸코의 이런 방향 전환에서 느껴지는 기묘한 고요함을 불길하게 받아들인다. 와타나베가 장 주네의 작품을 언급하며 말하듯, 푸코가 18세기 초 범죄자들의 조서를 편집하며 쓰던 글에서 보이는 격렬한 투쟁은 그 고요함에서 느껴지지 않는다. 와타나베의 우려대로 푸코의 이 ‘자기 기술’ 혹은 ‘생존의 미학’은 1980년 이후 아주 통속적인 방식으로 ‘치유적이고 미국화된 푸코 소비’(247쪽)로 나타난다. 세 편의 글을 읽으며 흥미로웠던 지점은 와타나베 모리아키가 푸코의 죽음 이후 푸코를 이야기하는 방식이다. 와타나베는 푸코의 작업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지점이나 자신이 관심 있는 지점을 강조하지 않는다. 오히려 자신이 미처 보지 못한 지점이나 접근할 수 없었던 지점을 파고들려고 한다. 그는 푸코의 예술론을 주체나 권력에 관한 논의로 읽으려고 한다거나, 출간되지 않은 텍스트에서 어떤 정황과 의미를 읽어내려 노력한다. 이런 노력은 <본다는 것, 신체>에서 와타나베가 언급한 일본의 ‘푸코 수용’ 특징과 관련된다. 우선 일본에서 푸코는 ‘구조주의’라는 이름과 함께 문학자나 문예론으로 소개되었다. 그렇기에 푸코의 철학 작업보다는 담론 퍼포먼스와 문장의 매혹에 민감할 수밖에 없었다. 또 푸코는 일본에서 동시대성을 보여준 최초의 철학자였기에 와타나베는 푸코를 소개하면서 그의 ‘문제 형성’에 동참해야 한다는 책임감을 느꼈다. 푸코의 죽음 이후 푸코에 대한 독해는 세계화되었기에 와타나베는 미국 등 외부에서 독해된 푸코에 관해서도 관심을 보인다. 이제 ‘외부의 시선’까지 고려해 푸코를 ‘다시 읽’을 때가 왔다는 주장이다. 푸코의 ‘마네론’도 그런 맥락에서 읽는다. ‘마네론’은 푸코가 출간을 포기한 작업이었고, 사후에 강연록으로 출판되었다. 결국 와타나베는 푸코의 ‘마네론’을 미학이 아닌 ‘주체’와 ‘권력’에 관한 집요한 작업으로 읽어낸다. 푸코의 ‘마네론’에서 중요한 지점은 공간과 시선이다. 회화는 평면에 2차원의 공간을 창조하는데, 푸코는 여기서 공간의 ‘물질성’을 발견한다. 또 마네가 사용하는 빛의 위치와 시선에서 ‘권력’을 포착한다. 회화는 응시하는 시선이 있기에 성립한다. 이 시선은 권력과의 관계에서 새롭게 파악되어야 한다. 푸코는 1963년 《임상의학의 탄생》에서 다음과 같이 쓴다. “이 책은 공간과 언어와 죽음의 문제를 다룬다. 시선의 문제를 다루는 책이다.”
권력을 사회의 시선과 연결한 힘은 계몽사상이다. 계몽이 ‘빛’(회화에서도 사용되는)이라면, 공간의 ‘가시성’은 유토피아에 대한 욕망과 같다. 와타나베는 푸코가 ‘마네론’ 출간을 포기한 이유에 대해 굳이 쓸 필요가 없었으리라고 짐작한다. ‘시선’과 ‘빛’은 푸코에게 더 능동적인 권력 분석 작업으로 연결되었고, 권력은 더 이상 배제와 격리를 통한 부정적 권력이 아니라 ‘권력으로서 지식’을 욕망하는 주체의 문제로 변모했기 때문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