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기

제목푸코의 미학 :라면 예술로 끓이기2019-07-25 2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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첨부파일2019, 푸코의 미학 발제.hwp (17.5KB)


 

라면 예술로 끓이기

라면과 삶

자기 삶을 예술로 만들라. 한마디로 실존의 미학. 이것은 푸코의 여러 말들 중 가장 귀에 꽂히는 말이다. 주체가 아니라 주체화, 권력이 아니라 권력관계, 진리가 아니라 진리효과와 같은 비슷한 듯 보이나 전혀 달라 어려운 그의 개념들 중에 그나마 쉬워 보여서다.

 

그러나 과연 쉬울까. 자기 삶을 예술 작품처럼 만든다는 것은, 예술 행위 비슷한 것이라도 해본 경험이 있는 사람은 알 것이다. 이것에는 일종의 제작자 마인드가 필요하다. 하나의 노래를 완성하기 위해 수백 번을 불러야 하고, 글 하나 쓰기 위해 수십 번의 글을 썼다 지워야해야 하며, 하다못해 최고의 라면 맛을 위해 수천 개의 라면을 끓여봐야 한다.

 

하다못해 라면이라니 가당찮다. 라면은 나의 삶이다. 최소 일주일에 한 번씩 라면을 먹었다 치면 40년 라면 인생 동안 족히 2400개의 라면을 먹어치운 셈이다. 이 글을 이래 보자. 라면과 함께 생각해보는 푸코의 윤리적이고 미학적인 삶에 대한 제안.

 

푸코에게 참된 삶과 아름다운 삶은 같이 간다. 여기서 참되다는 것은 불변의 진리가 아니라 그때그때 변화하는 진리이고, 이렇게 영원히 생겨나고 있는힘으로 사는 것이 아름다운 삶, 푸코가 말하는 삶을 예술로 만든다는 것이다. 나는 라면 덕후니까 영원히 생겨나고 있는 중으로 산다는 것을 라면 예술로 끓이기라는 관점으로 살펴보기로.

 

최고의 라면을 찾아서

최고의 라면 맛을 위해 라면 제작자는 기존의 라면 레시피를 수백 번 반복한다. 수백 번의 행위를 반복하기 위해서는 한 번의 과정과 그 다음 번의 과정 사이에 어떤 일이 벌어진다. 이것은 일종의 결별이며, 최소 두 번의 결별이 필요하다. 이것은 기존의 라면 레시피에 대한 지식에서도, ‘라면라는 서로 다른 힘들의 고착 관계에서도 벗어나야 이전과 다른 라면이라는 게 생성된다.

 

우선, 지금의 이 진리와 결별하기 위해. 여기서 다케다 히로나리의 재밌는 어중이 떠중이의 진리를 도입시켜보면, 푸코는 진리가 인식이 아니라 행동이라 했다. 어중이 떠중이의 진리란, ‘말할 수 없는 것이나 감춰져 있는 것을 밝히는 게 아니라, ‘이미 말해진 것을 자신의 것으로 삼고 통합하는 행위다. 이미 있는 것인 고정된 레시피를 자기 것으로 만들고, 그것을 상황의 특수성과 조합시키는 행위.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내부) 라면 끓이기의 프로세스에다 기존 레시피의 진리 대신 다른 걸(외부) 넣어보는 실험적 행위가 다른 진리를 창출한다. 안성탕면에 신라면 스프, 대파 대신 고수, 계란 대신 족발과 같은 것을 넣어보는 실험이 진리의 행동 원리라 할 수 있다. 여기서 타 회사의 스프, 고수, 족발이 바깥이다.

 

이런 우리 실험자들로 살 때, 주체는 한 번도 되어보지 못한 자신이 된다. 자신도 모르는, 자신 속에 존재하지 않는 진리를 익히는 실존의 기예를 실천하는 다른 주체로의 이행. 이것이 푸코의 주체화다.

 

다음으로, 힘들의 고착관계와 결별하기 위해. 앞서 얘기한 것이 진리와의 결별이었다면 이번에는 주체와의 결별이다. 이것은 에 대한 다른 생각이다. 다른 주체로의 이행 과정만 있는 준-주체의 존재, 이게 . ‘는 별 게 아니라, 이런 주체에서 저런 주체로 이행하는 것으로서만 존재하는 어떤 것일 뿐이다. 하지만, 동일한 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이런 생각은 여간해서 하기 힘들다.

 

라면을 예술적으로 끓이고 싶어 하는 라는 관점에서 보자.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나, 그리고 내일의 내가 동일한 라는 생각은 어제의 라면과 오늘의 라면, 그리고 내일의 라면 역시 동일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논리를 낳는다. 과거에도 맛있었으며 현재도 맛있고 미래에도 틀림없이 맛있어야 할 라면을 끓이는 동일한 나. 그러나, 애석하게도 이런 건 존재하지 않는다. 물의 양, 냄비의 종류, 미세한 불 조절의 차이, 실수로 1그램의 스프를 흘린 날, 기분 안 좋은 때라는 수많은 변수들이 라면과 나 사이에 존재한다.

 

를 끊임없이 흐르는 비정형의 힘이라 생각하면, ‘라면라는 주체와 대상의 고착된 관계 역시 언제든 변할 수 있다. ‘도 사라지고 라면도 사라진 관계에 대한 상상은 두 가지다. 우선 고정된 , 고정된 재료로서의 라면도 아닌 전혀 다른 존재의 출현이다. 동일하지 않은 조건에서 동일하지 않은 내가 끓이는 동일하지 않는 라면은 지금껏 한 번도 되어보지 못한 다른 신라면의 탄생이다.

 

두 가지 상상 중 다른 하나는 라는 힘은, 하나가 아닌 무수한 존재들이 된다는 것이다. 힘으로서의 는 매번 새로운 곳에서 새롭게 출발할 수 있다. 힘은 주체와 주체 사이를 연결하며, 존재들 사이를 횡단한다. 이런 주체화의 과정은 하나의 주체나 개인의 차원에서 벌어지는 힘의 차원이 아닌 세계로 뻗어나간다. 힘은 푸코가 말하듯 권력이 아니라 권력관계라 말 할 수 있는데, 힘이 기존 질서에 대한 저항이자 자유의 다른 이름이기 때문에 그렇다. 이를테면 라면 예술로 끓이기를 넘어 스테이크를 예술로 굽거나 이전과 전혀 다른 먼지다듬이를 사랑하는 모임과 관계 맺기가 가능해진다. 라면에서 먼지다듬이에 대한 사랑으로의 변신의 변신 또 그 변신의 변신!

 

바깥의 주체, 바깥의 라면

이러한 무한 변신이 마냥 반갑냐 하면 그렇지 않다. 동일한 내가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것이 마음 편하다. 하지만 조금 생각해보면 나는 한 순간도 동일한 적이 없었다. 푸코는 자아 대신 점멸하듯 출현하는 주체성을 말한다. 이러한 반짝거림. 반짝거림은 형태를 갖추지 않는 안개와 같은 두께와 존재감으로 우리를 엄습하고, 덮치고, 우리 앞에서 작렬한다. 푸코의 그 어디에도 우리에게 익숙한 라는 자아는 없고 이런 주체성만이 있다.

 

영원히 생겨나게 만드는 삶의 작동 원리인 은 항상 형태의 통제를 벗어나는 바깥의 요소다. 라면 맛이 동일하든 말든 맛이 나아졌든 말든, ‘은 앞으로 나아간다. 라면과 다음 라면의 사이에서 이번 라면의 바깥으로 다음 라면을 만들게 하는 힘. 바깥의 주체, 바깥의 라면. 이것이 라면 예술로 끓이기이자 삶을 예술로 만드는 것이다. 내 안에 갇힌 라면 맛 너머에 있는 미래의 라면에 대한 상상. 이것이 최고의 라면이라서 예술이 아니라, 라면 끓이기 자체가 예술이 되는 지점이다.

 

어느새 아련해진 새해의 운동다짐을 떠올릴 때마다 라면을 끊어야 하나 고민했었다. 그러지 말자. 지금은 먹는 것이 나에게 윤리적이자 미학적인 태도다. 매번 라면을 끓일 때마다 바깥의 라면이 될 테니. 라면을 예로 들어 그렇지, 여기에 모든 고상한 주제들을 대입시켜 봐도 마찬가지다. 자기 계발서에 나오는 말 같은 자신의 삶을 예술 작품으로 만든다는 것은 의외로 이런 것인지도 모른다. 이번 호흡과 이 다음 호흡으로 살아있다는 것, 그 자체가 예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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