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이든 부도덕한 성 얼마 전 다녀온 말레이시아 여행 중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필리피노 마켓의 담배 피는 소년이었다. 많아봐야 12,3세 정도 되는 아이가 아무렇지도 않게 시장 한복판에서 담배를 뻑뻑 피고 있는 모습에 놀라는 내 모습은, 여전히 유효한 19세기 도덕적 발작의 결과물이다. 담배가 이런 정도인데 성 관련 문제라면 더 말할 것도 없다. 왜 이런 도덕적 발작이 생겼을까. 그것은 19세기 후반의 영국과 1950년대의 미국과 관련 있다. 언제나 성과 정치는 관련성이 있어 왔고, 그것이 첨예해진 것이 두 시기이다. 성행위에 대한 분쟁은 사회 곳곳에 만연한 불안을 대체하고 이에 수반하는 강렬한 정서를 방출하기 위한 보조수단이었다. 그렇다면 동성애자를 비롯한 온갖 성에 관련한 일 전반은 탄압의 억울한 대상자였던 셈이다. 성적 취향이 범법행위가 되어 범죄로 규정되는 일은 1950년대에 들어 맹위를 떨쳤다. 1950년대 샌프란시스코에서 벌어진 갖가지 동성애자 소탕작전을 보면, 현재의 샌프란시스코가 어떻게 동성애자들의 천국이 되었는지 짐작할 수 있다. 단속은 동성애자에 국한되지 않았다. 매춘과 외설을 규제하자는 강력한 현행법이 법제화되고, 이것은 성의 영역에서 아동을 보호하자는 꾸준한 호소와 이어진다. 섹슈얼리티의 문제에서 법적 규제가 필요한 이유가 아이들을 위해서라는 생각은 전적으로 설득력이 있다. 보수주의자들의 전략은 성공했다. 우리의 아이들이 동성애자가 되는 것을 막고, 성적으로 유해한 시설이나 음란물로부터 보호해야한다는 캐치프레이즈는 시민의 성적 자유를 폐기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미국 우익과 결합하여 ‘도덕적’으로 뜨거운 지지를 받게 된다. 뉴라이트와 신보수주의 이데올로기는 미국의 국력 쇠퇴를 부도덕한 성 행위와 연관 짓고, 마침내 1979년 가족보호법이라는 야심찬 우익의 입법안이 통과된다. 79년 미국에서 생긴 10대 순결 프로그램의 낙태금지법이 우리나라에서 2019년 최근에야 풀린 사실은 많은 것을 시사한다. 선을 어디에 그어야 하는가 성에 관한 몇 가지 고질적 사유 중 하나는 ‘성 본질주의’다. 우리는 성에 대해 사회생활 이전에 존재하는 본능적 리비도라고 믿어왔다. 그러나 섹슈얼리티는 타고난 것이 아니라 사회적 역사적으로 구성되는 것이다. 인종 정치나 젠더 정치를 사회적 구성물이 아닌 생물학적 실제로 여기는 한 명료하게 사유할 수 없듯, 섹슈얼리티의 문제도 생물학적 현상이나 개인의 심리학적 양상으로 인식되는 한 정치적 분석이 스며들 수 없다. 성 본질주의 외에도 급진적 사고를 막는 것이 성 부정성이다. 성 부정성은 성을 위험하고 파괴적인 것 즉 기독교 전통에서 본다면 죄악으로 여기는 것이다. 예전, 교회의 성경 연구 시간에 이 문제가 나오면, 부부간의 신성하고 건전한 성 행위는 괜찮다는 식의 말을 듣곤 했는데, 우스꽝스럽게도 나는 죄짓지는 않았구나하는 생각으로 안도했던 기억이 있다. 이런 문화에서 성 행위는 과도한 의미부여를 받는다. 그것이 성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몹시 히스테릭해지는 분위기에서 성을 사유할 수밖에 없다. 부부의 성이 피라미드의 상위를 차지하고, 대다수의 성적 행위자들을 하위에 위치시키는 것은 이들에게 막강한 통제력을 발휘하기 위해서다. 예전에는 친족을 형성하기 위해서 부적절한 결합을 막았다면, 현재는 의학과 정신의학이 섹슈얼리티에 대해 막강한 통제력을 발휘한다. 정신의학은 성적 성향을 근거 삼아 개인에게 정서적 정신적 결함이 있는 존재라는 무지막지한 고정관념을 심어주었다. 성의 다양성이 아동에서 국가 안보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의 위협요소가 된다는 인식은 섹슈얼리티를 ‘좋은 성’과 ‘나쁜 성’으로 구분하고 선을 어디에 그을까를 논쟁하게 한다. 이러한 경계선은 나쁜 쪽으로 떨어지지는 것을 혐오하는 시스템으로 작동한다. 우리와 다른 문화가 열등하거나 야만인의 관습이 아니라 그들만의 독창성의 표현이듯, 성 문화 역시 그렇게 사유돼야 한다. 정상적이고 자연스러우며 이상적인 섹슈얼리티라는 개념은 다양한 방식의 성을 탄압하는 것이며, 그것은 개인과 집단의 역동성을 소거해버리는 것과 같다. 성을 둘러싼 정치 갈등 중 ‘영토 경계 전쟁’이라 부른 형태의 갈등은 흥미롭다. 시골보다는 대도시가 자신의 성정체성을 숨기고 살아가기 쉽기에 그들은 대도시에 밀집 지구를 만들어 산다. 그런 그들에게 대중은 범죄자의 소굴이라는 편견어린 시선을 던진다. 그들은 거주지 문제를 놓고 늘 투쟁을 해야 하는 상황에 처하는 것뿐 아니라, 도시 게이들은 이제 도시 생활이 만들어낸 욕구불만의 화풀이 대상까지 된다. 대기업의 도심 확장 공사에 의해 이들 대부분은 싹쓸이 된다. 앞서 말했듯, 도덕적 공황은 정치적 순간과 연결된다. 성적 행위들은 아무런 내재적 관련성이 없는 개인적이고 사회적인 불안을 표상하는 기표로 작용한다. 모든 문제는 비정상적인 성행위집단, 이들 탓이 된다. 게이 집단이 화풀이 대상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도덕적 공황은 애초부터 망상과 기표에서 시작되기에 어떤 문제도 해결되지 않는다. 금지와 탄압은, 어떤 행위가 해가 되지 않는데도 나쁜 것으로 ‘번질’ 위험이 있다는 이유로 금지된다. 포르노를 보는 것, 기분 전환용 대마초나 마약을 피우는 것에 질겁하며 우익은 포르노그래피를 반대하면서 페미니즘의 반포르노그패피 논점을 차용한다. 페미니즘을 어떻게 보아야 하나 페미니즘을 어떻게 봐야 하는지 잘 모르겠다. 요즘 벌어지는 수많은 페미 담론을 보면, 젠더문제와 섹슈얼리티의 문제가 뒤섞여 있어 어떻게 구분지어 생각해야하는지 잘 모르겠다는 게 솔직한 심정이다. 게일 루빈도 이런 뒤섞임을 경계하라고 말한다. 페미니즘이 성과 맺고 있는 관계는 복잡하다. 여성도 성해방을 이루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한편 성해방이 본질적으로 남성 특권의 문제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런 전통은 성을 반대하는 보수주의 담론과 공명한다. 여성의 성해방을 얘기하려다보니 성 표현의 거의 모든 표현을 비난하게 되고 대부분의 성행위를 가장 추악하게 현시한다. 성의 악마학이다. 이러한 반포르노그래피에 대한 생각은 희생양 색출과 책임 전가로 귀결된다. 악마적 성과학은 여성이 성행위에서 안전하지 못하다는 공분을 겨냥하여 무고한 개인과 공동체에 불리하게 작동한다. 페미니즘 담론이 극보수주의 성도덕을 다시 창조하는 결과가 된 것. 반포르노그패피 운동의 화신들은 자신들이 모든 페미니즘의 선봉에 서왔다고 자부하지만, 페미니즘 운동 자체 내에서 다른 방식의 운동 또한 전개되어 왔다. ‘문제가 많은 에로티시즘’인 섹슈얼리티는, 자연을 거스르는 끔찍한 행위라는 전제에 기초하지 않는 것이라야 하며, 성법 제정에 있어 합의에 의한 것과 강제에 의한 것으로 구분되어야 한다. 성애적 다양성을 ‘심신상실상태’라 간주되는 상황에서 심리학은 이들 일탈자들에게 유아기 권력투쟁의 강박적 재현이라는 해석을 덧씌운다. 페미니즘이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은 젠더 억압과 성 억압을 뒤섞어버리는 것이다. 젠더의 파생물로 섹슈얼리티를 다루는 현재의 페미니즘은 문제가 있다. 마르크스주의 했던 자본주의 하의 계급관계에 대한 해석처럼 성 억압에 대한 급진 이론과 페미니즘과의 관계도 이와 마찬가지다. 페미니즘은 성 억압에서 해방되기 위해 국부적으로 효용될 수 있지만, 섹슈얼리티까지 포함한 성 전체의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다. 성애가 아닌 섹슈얼리티가 쟁점이 될 때 페미니즘 분석은 잘못된 방향으로 전개되기 쉽다. 우리는 어디까지 받아들일 수 있을까 19세기 말과 1950년대의 탄압은 역설적으로 새로운 성애 공동체의 탄생을 가져왔다. 성에 대해 50년대는 억압의 시대이자 동시에 형성의 시대이기도 했다. 성에 대한 탄압은 개인의 성적 자유의 탄압일 뿐 아니라, 하나의 권력 시스템을 유지하기 위한 정치적 도구로 이용하기 위한 것이다. 성에 대한 정보의 축적과 활용을 통제하려는 정책은 결코 사소한 문제가 아니다. 에이즈 교육이 될 수 있는 성에 대한 정보를 금기시하는 일은 일종의 살인 행위다. 50년대로부터 많은 시간이 지났지만, 어디에 선을 그어야 하나의 문제는 여전하다. 이것은 아기의 생명을 보호해야한다는 차원에서 벌어지는 낙태금지법의 부당함, 동성애자에 대한 탄압, 성적으로 활발한 10대에 대한 편견, 약물 중독을 어디까지 받아들일 수 있는가의 문제다. 사회문제를 내 문제로 끌어와 인식해야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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