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통치를 위한 전략들 ‘주체’의 문제를 푸코 말년의 연구주제로만 국한해도 좋을까. 정신병리학과 광기-비이성의 문제로 시작하여 지식과 담론의 문제를 다루었을 때도 그 작업들 전체를 둘러싼 공통적인 울림은 주체가 무엇에 예속되어 있으며 그 예속으로부터 어떻게 돌파구를 마련할 것인가라는 질문이다. 푸코만큼 주체 문제에 천착하고 그로부터 예속에 대항하는 전복적 이론의 단초를 발견하는 연구자를 나는 알지 못한다. 놀라운 건 그 모든 작업이 자기에서 시작되었으며, 오직 자신이 원하는 자기로 자기를 구성해나가는 여정으로 보인다는 사실이다. 1970년 이후 푸코는 새로운 권력이론을 제시한다. 이는 단지 권력이 무엇인가, 권력은 왜 존재하는가라는 이론이 아니다. 푸코의 주된 관심은 그것이 어떻게 행사되는가에 있었다. 그리하여 푸코의 연구는 권력의 형태와 그 목적에 주력한다. 근대의 권력은 다른 것이 되었다. 그것은 더 이상 누군가에게 소유된 채 부동인 상태로 존재하지 않는다. 권력은 모든 관계에 편재(遍在)하며, ‘행위 속에서만’ 드러난다. 권력은 행사됨으로써 대상의 품행을 인도하지만 그 관계는 불안정한 것이며 즉 역전가능성을 품고 있다. 푸코는 ‘근대적 권력 형태’를 사목권력에서 가져오며 그 특징을 두 가지로 말한다. 개체화하는 규율권력 그리고 생명을 관리하는 조절권력이다. 규율과 조절은 근대적 권력이 갖는 테크네다. 규율테크네가 타겟으로 삼는 것은 개개인의 신체다. 학교, 작업장, 감옥 같은 기구는 신체를 규율에 예속시킨다. 인문과학(특히 통계학)은 개개인을 알고 분류하기 위한 도구로 탄생했다. 조절테크네의 타겟은 ‘인구’라는 집단이다. 인구는 일종의 생명체로서 다루어지며 따라서 이 생명체를 유지하기 위한 조절의 테크네가 필요해진다. 이때 인구의 구성요소로서 개개인은 때때로 도려내지기도 하지만 그것은 수단들 중 하나일 뿐이고 생명체를 더욱 크고 건강한 것으로 만들기 위한 목적 하에 치료약물이 투여되거나 영양제를 투하하는 식으로 배려된다. 예컨대 사회복지제도라는 것은 그런 테크네의 일환이다. 근대적 권력형태가 과거 생사여탈권을 가진 권력과 달리 테크네에 의해서 행사된다는 것은 테크네가 필요하기 때문이며 따라서 그것이 국가이성 즉 합리성에 따르기 때문이다. 즉 국가는 파괴도 소멸도 목적이 아니고 언제나 국가의 힘의 증대다. 따라서 국가는 억압하지만은 않고 관리한다. 국가의 전략은 이기려는 것이기보다는 싸움을 지속되게 하려한다. 대항 세력을 숙청할 때만 권력이 행사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을 수용할 때도 권력은 행사된다. 그러하기에 대항권력의 조준점 역시 전략적인 것이어야 하며, 만약 대항이 권력을 소유하고 있다고 믿는 하나의 고정된 지점에만 향한다면 잘못 조준한 것이 될 공산이 크며 혹여 승리했다할지라도 조절테크네의 배치 속으로 들어간 것일 수 있다. 푸코가 이제 권력이 아니라 통치성에 대해서 말하는 것은 권력 형태의 변화를 염두에 두고 있기 때문이다. 모든 것이 결정되어 있고 다른 가능성이 부재한 상태에서는 통치할 필요가 없다. 변화를 막는 것이 아니라 변화를 용인하면서 어떻게 통치를 지속할 것인가가 문제다. 빠져나가는 힘들을 어떻게 통치 아래 두고 관리할 것인가의 문제. 즉 통치는 그 자체로 반대의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있다. 그것은 통치 대상인 인구가 변화를 거듭하는 하나의 생명체고 그것을 구성하는 요소들 역시 그 변화를 생산하는 작은 생명체들로 다루어지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 개개인이 통치 받지 않을 자유에 대해서 묻는다면 푸코는 근본적으로는 승리할 수 없다고 말할 지도 모르겠다. 왜냐하면 아무리 빠져나간다 할지라도 인구라는 더 큰 생명체 밖에 있을 수는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가능한 것이 있다면 기존의 배치 속에서 머물기를 거부하는 것이며 그 힘은 다른 배치를 가능하게 하고 그것은 결국 다른 형태의 통치를 견인하는 것이다. 푸코는 [비판이란 무엇인가]에서 ‘이렇게 통치받지 않을 권리’에 대해서 말했다. 그것은 완벽한 자유에 대한 것이 아니었다. 다시 다르게 통치받을지라도 적어도 ‘이렇게’는 통치받지 않을 자유다. 그럼에도 거기에 자유를 붙일 수 있는 것은 그것이 기존의 배치 하에서 이 영역에서 저 영역으로 갈아타는 자유가 아니라 어떤 방식으로 권력관계들을 피해가고, 권력관계들의 틈새, 한계, 이면으로 향하는 부정형의 운동이기 때문이고 그 운동이 권력관계를 근본에서부터 흔드는 힘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또 다른 품행(인도)을 목표로 하는 운동들입니다. 즉 다르게, 다른 인도자들에 의해, 다른 목자들에 의해, 다른 목적을 향해, 다른 구원의 형태를 향해, 다른 절차들을 통해, 다른 방법들을 통해 인도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또한, 아무튼 경우에 따라서는 타자들의 인도로부터 벗어나려고 하는 운동들, 자신을 인도하는 방식을 각자가 정의하려고 하는 운동들이기도 합니다.(123)” ‘이렇게 통치받지 않을 권리’는 푸코의 권력관계 이론이 그대로 투영된 것이다. 권력은 편재하고 주체는 권력관계 밖에 설 수 없다. 다만 그 관계를 다른 것으로 전환하고자할 수 있을 뿐이다. 이때 ‘자기배려’는 어떤 식으로 통치받고 있는 자기가 전제되며, 다른 방식으로 통치받기 위해 자기를 바꾸어가는 실천과 연결된다. 푸코는 고대로부터 자기 변형 중심이었던 자기배려가 데카르트적 계기를 통해서 자기인식으로 완전히 돌아서게 되었다고 말한다. 이때부터 주체와 진리의 관계도 변한다. 주체를 변형시키는 한에서만 의미를 갖던 진리가 순수한 인식대상이 된 것이다. 한편 진리에의 도달은 ‘인식의 자율적인 발전’으로 간주되었는데 때문에 인식능력이 문제가 되고 인식능력을 기준으로 하는 하나의 권력체제가 만들어진다. 진리를 인식해야할 지고의 대상으로 삼을 때 그것은 당연한 수순이다. 만약 하나의 무엇이 진리라면 주체는 이 진리에 통치받는 게 참된 것이기 때문이다. 푸코는 진리체계를 권력체계와 불가분의 관계로 본다. 진리란 근본적으로 분리한다. 집단이 믿고 있는 진리든, 개인적 진리든 마찬가지다. 그것이 진리라고 하는 것의 속성이다. 그렇다면 진리가 어딨어?하는 태도로 살면 될까? 푸코에게 진리 없이 산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권력관계 밖에 살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어떤 식으로 통지받지 않고 산다는 것이 불가능한 것처럼. 오히려 진리는 자기의 자기통치를 위해서도 반드시 필요하다고 푸코는 말할 것이다. 그러나 그 진리는 언제나 자기변형에 도움을 줄 수 있는, 현재의 자기, 현재의 통치성, 현재의 권력체계를 다른 것으로 변형시키는 진리여야 한다. 푸코는 권력은 외부에 존재하지 않는다 했던 것처럼 진리 역시 그렇다고 말함으로서 우리가 고매하게 그래서 무겁게 느끼던 (외재하는) 진리의 위상을 가볍게 무너뜨린다. 그러나 권력이 편재하는 것처럼 우리의 신체성으로서 진리가 각인되어있음을, 우리를 내부에서 통치하고 있음을 되려 깨닫게 함으로서 어쩌면 진리는 더욱 무거운 것이 되었다. 각자의 진리(옳고 그름)를 갖고 있지 않은 자가 없다. 주체는 지금과는 다른 진리를 갖고 살 수는 있어도 진리 없이는 살 수 없다. 이때 파레시아는 다른 진리로의 변형 과정을 이끄는 테크네다. 기원후 1-2세기에 스승의 진실말하기에서 친구간의 진실말하기로 이행한 파레시아는 자기변형을 이루고자 하는 제자 혹은 친구에게 도움을 주는 변형의 목적에 부합하는 말하기였다. 따라서 파레시아는 현 주체에 대한 비판이고, 현 주체를 생산한 사회의 제도, 도덕에 대한 비판이게 된다. 푸코의 연구가 진리의 생산에 관여하는 정치적·경제적·제도적 체제를 파고드는 데는 이러한 이유가 있었다. 파레시아는 다른 주체로의 변형을 꾀한다. 그것은 현재의 진리생산체제를 다른 것으로 바꾸는 것이다. 진리생산체제의 파괴나 소멸이 아니라 진리생산체제의 배치를 바꾸는 것이다. 그렇다면 파레시아는 현재의 배치를 유지하려는 주체와 바꾸려는 주체 간의 싸움이고, 동시에 사회의 기득권과 그 대항세력의 싸움이다. 그러나 싸움은 주체를 변형시키려고 하는 주제의 행위가 일으키는 효과로서이지 싸움을 위한 싸움일 수는 없다. 주체를 변형시키고자 하는 자는 또한 받아들이고자 하는 다른 진리를 스스로 명령으로 만들고 복종하지 않으면 안 된다. 광기는 어떤가. 광기는 초기 푸코의 분석처럼 ‘절대적인 외부’인가. 76년 한 인터뷰에서 푸코는 자기 해석에 수정을 가한다. 광기는 권력관계, 진리생산체제의 바깥이 아니라 그(권력과 진리) 효과들 내부에 생산된다. 즉 어떤 권력체제라도 그 내부에 광기의 범주를 갖고 있다. 권력체제의 배치를 변환시킨다고 하여도 변환된 그 체제 아래 반드시 다른 광기의 범주가 생산될 것이다. 그렇다면 광기로 규정되는 범주는 각 체제의 한계지점이자 다른 체제로의 생산 가능성을 품고 있는 영역이다. 푸코는 광기를 한계 경험이라고 말한다. 주체는 다른 진리를 인식하고 실천함으로서가 아니라, 광기라는 한계경험을 인식대상으로(지식으로) 취함으로서도 주체의 변형에 이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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