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적 올바름에 대하여: 개인에서 정치로, 다시 정치에서 개인으로
얼마 전부터 ‘정치적 올바름’(PC)은 자칭 진보를 표방하는 사람들에게 중요한 문제가 되었다. 진보는 더 이상 좌파나 맑시즘 같은 단어와 동의어가 아니다. ‘정치적 올바름’은 ‘진보’라는 개념 자체의 변화를 실감하게 해 주었다. 그 실감이 지나치게 강력한 나머지 어떤 이들은 ‘정치적 올바름’에서 일찌감치 교조주의의 냄새를 맡는다. 우려를 떨치지 못하면서도 ‘정치적 올바름’이 가져오는 사회의 변화들을 무시할 수는 없다. 우리는 여전히 ‘정치적 올바름’에 주목해야 한다. ‘정치적 올바름’이 무엇이며, ‘정치적 올바름’이 진보라고 할 수 있는지에 대해 물어야 한다.
토론을 위해 네 명의 토론자가 모였다. 사전인터뷰를 통해 토론자들을 만나 보니, 이들의 토론이 어떻게 진행될지 궁금해진다. 일단은 사용하는 단어의 용법에서부터 차이가 있다. 누군가는 타인의 말을 이해한다는 것이, 그가 단어를 어떤 의미로 사용하고 있는지를 아는 것이라 했다. 토론의 시작과 끝은 단어의 용법에 있다. 그만큼 단어의 용법을 이해하는 일은 어렵고도 중요하다.
‘정치적 올바름’에 대한 토론을 하기 전에 각 토론자들이 ‘정치적 올바름’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지를 확인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그들 각자가 ‘정치’와 ‘올바름’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지 확인하는 게 필요하다. 그들은 같은 단어를 왜 다르게 이해하여 사용하고 있을까. 각자가 처해있는 상황이 다르기 때문이다. 국적도 다르고, 성별도 다르고, 성적 지향도 다르며, 인종이나 계급, 종교도 다르기 때문이다. 국적·성별·성적 지향·인종·계급·종교는 사회적 분류이지만, 개인의 특성에서 기인한다. 개인의 특성들이 인간을 사회적으로 분류하고, 정치적 대상으로 만든다.
정치가 개인의 특성에 연결되어 있다고 한다면, 개인은 자신의 특성대로 ‘정치’를 이해하게 된다. 한 사안이 정치적인가, 그렇지 않은가를 이해하는 문제도 이 특성에 따른다. 정치가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가, 그렇지 않은가의 문제도 마찬가지다. 그러면 그 개인들의 특성을 ‘정체성’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토론자 중 한 명인 마이클 에릭 다이슨은 ‘흑인들은 인종을 만들지 않았다’라고 말한다. 인종차별은 흑인들 개인이 처한 문제이지만, 문제의 시작과 끝은 흑인들에게 있지 않다. 정체성은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의 문제이다. 사회적 관계에서만 정체성이 문제가 된다. 개인의 특성이 문제의 주관식 답안이라면, 정체성은 선택지가 있는 객관식 답안으로 볼 수 있다.
정체성이 정치와 연결되는 일은 사실이지만, 각 개인들이 단 하나의 정체성만을 가지고 있다고 말할 수는 없다. 한 사람의 특성은 단 한 가지가 아니라 여러 가지일 수밖에 없다. 게이이면서 작가, 백인이면서 기독교인, 흑인이면서 남성, 백인이면서 여성과 같은 식으로 여러 가지 복합되고 교차된 정체성을 가진다. 이 정체성은 자기 자신에 대해 말할 때보다 무엇을 적으로 삼고 있는가를 밝힐 때 더 잘 드러난다. 남성들에 대항하는 여성들, 백인들에 대항하는 흑인들, 자산계급에 대항하는 무산계급과 같은 방식으로 말이다. 개인들의 복잡한 특성들은 이 대항의 방식을 통해 다시 정체성이라는 큰 틀로 묶이고 있다.
집단저항의 정체성으로만 개인들이 두드러진다고 해서, 개인들의 복잡하게 교차되는 특성들을 무시할 수는 없다. 개인들의 입장이란 단지 정체성만으로 환원될 수 없는 복잡하고 미묘한 문제이기 때문이다. 학력이나 지역 특성·신체의 특성도 개인의 입장 선택에 많은 영향을 미친다. 오늘 만나게 될 네 명의 토론자들도 마찬가지다. 그들은 각자 다른 이유로 ‘정치적 올바름’이 진보라고 말하거나, 진보가 아니라고 말한다. ‘정치적 올바름’이 진보가 아니라고 말한다 해서 그가 반드시 보수적 입장을 가진 것도 아니다.
토론자 스티븐 프라이는 ‘정치적 올바름’의 스타일 자체를 문제 삼는다. ‘정치적 올바름’을 좌파의 전략으로 이용한다면, 역효과를 일으킬 만큼 허술한 방식이라고 꼬집는다. 누군가에게 특정 단어를 사용하라고 면박을 주면서 자신이 진리임을 주장할 때, 포용과 다양성은 오히려 지연된다는 것이 스티븐 프라이가 우려하는 지점이다.
조던 피터슨은 사람들이 ‘정치’라는 말을 남발하는 일 자체를 불쾌하게 여긴다. 가난한 이들이 자신의 가난을 개인의 문제로 여기지 않고, 자꾸만 정치의 문제로 연결하려는 데서 오는 불쾌감이다. 사회 안에서 좌파 집단의 결집과 부흥을 과장하며 호들갑을 떨고 두려워하는 그는 ‘특권’ 혹은 ‘권력’이라는 말에도 역시 민감하게 반응한다. 사회의 분열을 걱정하는 그는 아이러니하게도 개인들이 자신의 특성에 매몰되어 정체성으로 집단화되지 않기를 바란다.
흑인 인권운동가인 마이클 에릭 다이슨의 관점은 더 복잡하다. ‘정치적 올바름’ 역시 편견으로 작동하면서 표현의 자유를 억압한다고 여기지만, 사람들이 ‘정치적 올바름’을 통해 자신의 삶을 비판적으로 보게 되기를 바란다. 그는 ‘정치적 올바름’을 조롱하는 백인 남성들을 경멸하면서, 그들이 자신들의 주장대로 진정한 남성이라면 자신들이 누려왔던 특권을 인정하고 약한 이들을 보호해야 한다고 요구한다.
여성들의 임신·출산권에 대한 책을 쓴 미셸 골드버그는 사회정의를 강조하는 문화에 회의적이다. ‘정치적 올바름’을 온전하게 진보로 여기지는 않지만, 조던 피터슨이 거기에 반대한다면 자신은 찬성하겠다는 입장이다. 자신과 이해관계를 달리하는 누군가에게 대항하여 자신의 입장을 내세우는 것, 미셸 골드버그에게 정치란 그렇게 이해되는 듯 보인다. 그는 ‘정치적 올바름’에 대한 남성들의 과장된 공포를 비웃기도 하고, 위로하기도 한다. ‘정치적 올바름’이 부자연스러운 억압으로 느껴진다 해도, 사회적 효용이 있다면 곧 완벽하게 우리의 언어생활에 통합될 것이고 기괴한 요구라 여겨지는 것들은 서서히 사라질 것이라고,
토론자들의 이야기를 통해 개인의 특성이 정치와 연결되는 지점들을 확인했다. 이 특성이 정치와 연결될 때, 우리는 그 특성을 정체성이라고 부른다. 정체성을 하나의 사회적 초점으로 본다면, 시사는 결코 우리의 일상에서 동떨어진 이야기가 아니다. 개인의 삶에 개입하는 사회의 문제인 동시에, 개인이 사회에 관심을 가지고 적극 개입해야만 하는 이유가 된다. 세미나의 카테고리를 ‘시사’로 분류하면서 일말의 걱정이 있었다. ‘시사’라는 단어에서 가질 수 있는 선입견 때문이었다. 일단은 정면으로 부딪혀 보기로 했다. 세미나를 통해 우리가 시사를 현재 자기 삶의 문제로 다시 볼 수 있을지에 대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