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미니스트, 퀴어, 불구》 6. 자연의 몸, 7. 접근 가능한 미래, 미래 연합 앨리슨 케이퍼는 이 책에서 페미니즘, 퀴어, 동물과 기계, 자연(생태)과 재생산 권리 등 여러 문제를 장애와 관련하여 서술한다. 저자의 주장도 물론 급진적인 면이 있지만, 실은 앞서 언급한 여러 문제를 장애와 연결 짓는 일 자체가 이미 급진적이다. 이 분야들에서 활동하는 이론가나 활동가들도 각각의 분야에 장애 관련 논의가 끼어드는 일을 불편해한다. 우생학과의 관련이나 장애 차별 논란에서 자유롭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여러 급진적 논의가 이루어지는 다양한 영역들에서조차 장애와의 교차성 논의가 이루어지기는커녕 불편하게 여겨진다는 점은 그만큼 우리가 비장애중심 사회를 살아가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 책을 읽으면서 오직 그 점만이 명확해진다. 저자는 여러 논의를 복잡하게 전개하면서도 명확한 결론을 내리지 않는다. 그 명확한 결론이 누군가를 배제하고 차별하기 위한 명확성임을 알기에 그만큼 망설이지 않았을까? 명확하건, 명확하지 않건 결론을 내리는 일은 급하지 않고 어쩌면 중요하지도 않다. 가장 피해야 할 일은 성급하게 내린 결론이다. 더 중요한 일은 문제를 숙고하는 시간, 새로운 문제를 제기하는 시선, 기존의 결론을 의심하고 과감하게 폐기하려는 관점이다. 저자의 말대로 가장 중요한 지점은 ‘비장애중심주의적 가정을 탈구축’(344쪽)하는 일이다. 문제는 새로운 가정이나 관점을 정립하는 일이 아니라 탈구축하는 일이다. 저자의 말대로 ‘자연/인간(혹은 문명)’의 익숙한 이분법은 자연이 얼마나 인간의 관점에서 만들어진 개념인지를 알아볼 수 없게 만든다. ‘인간’의 관념을 전제하고 있는 자연은 이미 젠더와 계급, 인종, 장애/비장애와 관련된 논의에서 자유롭지 않다. 자연에는 이미 인간이 포함되어 있으며, 그 인간은 우리가 상호작용해야 할 타인이기도 하다. 장애인과 비장애인, 인간과 비인간, 인간과 자연의 상호의존성만이 상실과 실패를 포용할 가능성이다. 저자는 6장의 후반부에서 일라이 클레어와 리바 레러 같은 예술가들의 활동을 예로 들면서, 장애 경험이 자연과 만나는 새로운 방법에 관해 이야기한다. 장애인에게 개방되지 않았던 공간인 자연은 퀴어를 비롯한 다른 문제와 연결되면서 장애와 어떻게 만날 수 있을까? 저자는 클레어와 레러에게서 ‘장애 경험을 자연에 관한 지식 생산의 현장으로 진지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환경주의에 대한 새로운 이해’(370쪽)를 발견한다. 이런 이해가 가능하기 위해서는 먼저 ‘자연에 관한 지식’이 고정되어 있다는 가장을 버려야 한다. 자연에 관한 지식이 언제나 새롭게 생산되어야 한다는 말을 하기 위해서는 그 지식을 생산하는 이들이 누구인가에 관해서도 물어야 한다. 이런 지식 생산에서 배제되는 일이 곧 현실에서의 차별과 배제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장애 경험이 이 지식 생산의 현장으로 들어와야 한다는 앨리슨 케이퍼의 논의가 중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장애란 무엇일까? 온통 비장애 중심으로 살아가는 사회에서 장애를 이해하는 일은 쉽지 않다.’ 이 책의 서문과 첫 번째 장의 발제를 나는 이 두 문장으로 시작했다. 그때 나는 장애가 무엇인지 개념화하기 어렵고, 장애에 관해 말하기 어렵다는 느낌을 받았다. 책의 마지막 장을 덮으면서 나는 조금 다른 질문을 떠올렸다. ‘나는 장애인일까? 만일 사회에서 장애인으로 규정되지 않는다면 이유가 무엇일까?’ 나는 장애인 혹은 불구다. 이 양자 간에 구분은 중요하지 않다고 여긴다. 내가 일상생활을 통해서 신체의 손상이나 역량의 한계를 느낀다고 여기는 면에서 이 점은 분명하다. 신체와 정신의 모든 면에서 그러하다. 어떤 시혜나 동정을 얻기 위해 하는 주장이 아니다. 이 사회의 많은 이들 역시 장애인 혹은 불구라고 여기기 때문이다. 과거에 내가 그랬듯 그들은 그 사실을 인식하지 못하거나 감추면서 장애 문제에 냉담해진다. 넷플릭스에 가입하면서 내가 얻은 이점 중 하나는 ‘한글 자막의 유용성’을 확신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나는 어릴 때부터 한국 영화 보는 일에 어려움을 겪었는데, 대사를 알아듣기가 어려웠기 때문이다. 건강검진에서 청력 문제가 확인되지 않음으로 보아 소리 자체보다는 인간의 발성을 이해하는 일의 어려움 탓으로 보인다. 어릴 때부터 수업에 집중하지 못하거나 전화 통화를 기피하는 등 음성 언어 소통에서는 이미 여러 문제가 엿보였다. 음성 언어 소통에서 오는 한계는 문자 언어에 대한 감각을 예민하게 만드는 결과를 불러오지 않았나 싶다. 그 때문에 넷플릭스의 한글 자막 서비스는 나의 영상 시청을 매우 편안하게 만들어주었다. 이런 경험을 장애와 곧바로 연결 짓기는 무리겠지만, 장애 역시 감각의 편향성이나 다양성 문제와 관련되지 않나 싶다. 우리 미래와 정치에 대해 말하는 일은 언제나 총체성이 아닌 개별 경험이나 감각의 문제에서 비롯되기 때문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