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클럽 자본 5 <공포의 집>발제
마침내, 공포의 집에서 들리는 유령의 목소리들 “다행히 나는 1944년 아우슈비츠로 이송되었다.” 작가는 서문에서 프리모 레비의 [이것이 인간인가]에서의 한 구절을 인용한다. 곧 다가올 죽음을 유보한 채, 살아 있다는 ‘지금’(이 ‘지금’은 벤야민식으로 말하자면 현재와 나란히 놓인 과거로 현재에 파국을 불러올 수 있다.)의 다행스러운 상황은 18세기의 강제노동수용소인 ‘구빈원’과 이후의 모든 노동 현장에 똑같이 적용된다. 물론 자본가는 노동자들을 강제로 고용한 것이 아니며 노동자는 자유롭게 노동력을 팔았다. 동등한 권리와 권리 사이의 계약이다. 문제는 자본가가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노동자의 피 한 방울까지 짜내 강탈한다는 데 있다. 노동자는 생명에 위협을 무릅쓰고 노동을 해야 한다. 먹고 살기 위해서는 이러한 ‘강제 관계’를 다행으로 여겨야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자본가는 왜 흡혈을 하는가? 잉여노동을 통해 잉여가치를 창출하기 위해서이다. ‘필요노동’과 ‘잉여노동’의 합계를 노동일이라고 할 때, 자본가는 잉여노동을 늘리기 위해 안간힘을 쓴다. ‘레글르망 오르가니크’가 농노제에서 강제로 노동을 부역하도록 하는 법률이라면, 영국의 공장법은 노동일을 늘릴 수 없도록 강제하는 법이었다. 자본가의 탐욕을 제어하지 않으면 생명을 유지할 수 없을 정도의 상황이었던 것이다. 당시 자본가는 노동자의 짜투리 시간들을 도둑질(이는 현재에도 마찬가지이다.)하며 24시간 공장을 가동하기 위해 임금이 싼 아이와 여성들을 고용한다. 노동자의 노동으로 자본주의는 움직이는 것이다. 하지만 자본주의는 자본의 운동으로 나타나는 것처럼 보이는 착각을 일으킨다. 가치의 생산과 증식이 노동이라는 것이 감춰진 채, 자본이 역사적으로 특정한 사회적 관계라는 사실이 망각된 채. 마르크스는 감춰지고 망각된 존재들을 불러와 우리의 착각을 바로잡는다. 마르크스가 불러온 것은 노동자들의 목소리들이다. 직접 인용을 통해 들리는 노동자들의 생생한 목소리. 이는 자본가가 ‘우리’라는 말을 통해 자기 목소리를 모두의 목소리로 만드는 것을 막고 노동자의 목소리를 강탈하거나 훔치는 것을 막기 위한 마르크스의 간절한 노력이다. 마르크스는 또한 살인자가 된 피살자인 철도 노동자들의 재판 과정을 드라마로 그려내는데, 이 책의 저자는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가 철도 노동자뿐 아니라 당시의 공장 노동자들을 유령으로 등장시킨 노래극을 통해 당시의 상황과 인물들을 되살려낸다. 이는 저자가 언급한 가야트리 스피박의 <서발턴은 말할 수 있는가>에서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 그들의 말, 그들의 저항을 유효하게 해줄 제도적 배경, 조건들을 제공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저자는 <자본>을 지적으로 이해할 뿐 아니라 정서적으로도 겪어야 한다고 말한다. 이번 책에서는 특히 이 말이 어떤 의미인지 절실히 느껴진다. 밤샘 노동에도 낮에 잠들지 못하는 아이들이 거리를 배회하고 죽어서도 구천을 떠도는 억울한 혼령들의 알아들을 수 없는 중얼거림이 들리는 것 같다. 알아들을 수 없을 뿐, 듣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보이지 않는다고 없는 것이 아닌 것처럼. 이 무한한 구천에서 자본주의는 어쩌다 이곳에 우리의 영혼 깊이 뿌리박혀 있는 것일까? 질문의 대답은 내가 발 딛고 있는 이곳에, 아직 듣지 못한, 보지 못한 가능성 속에 있지 않을까 싶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