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기

제목[과학읽기] 생명의 세계와 컴퓨터가 만났을 때2025-06-24 12:19
작성자

[과학읽기]<자연에 이름 붙이기> 6장 워그의 유산/7장 숫자로 하는 분류학

 

생명의 세계와 컴퓨터가 만났을 때


AI에게 산과 바다가 어우러진 풍경 사진을 보여주고 업스케일을 주문한다. 조금 화려한 사진이 출력된다. 또 한번 업스케일을 요청한다. 조금 다른 형태의 풍경이 된다. 이 작업을 백 번 이상 하면 AI가 보여주는 사진에는 더 이상 산과 바다가 없다. 작은 점들이 질서있게 찍혀있는 의미 없는 형상만이 남는다. 인간이 대면하는 세상에서 의미있던 모든 것들이 점과 선으로 숫자화된다. 모든 것이 ‘수’가 되었을 때 기계는 쉽게 계산을 할 수 있게 되고 세상은 ‘객관’이라는 진리를 확보한다. 


과학이 ‘객관’을 확보할 수 있는 것은 다른 곳에서 같은 실험을 했을 때도 같은 결과를 도출했을 때이다. 때문에 날씨에도 감정에도 영향을 받지 않는 ‘수’라는 과학은 언제나 ‘객관’의 왕좌를 차지하고 있다. ‘객관’의 힘은 너무도 강력해서 과학을 넘어 종교가 되었고, 과학자들은 사제들처럼 ‘수’를 신봉하고 경배했다.(<물리학이 잃어버린 여성(원제:피타고라스의 바지)>참고) ‘수’는 언제나 옳고 세상의 진리를 보여주는 단서라고 믿을 때, 인간이 인식하는 세계는 어떤 모습일까? AI가 최종적으로 보여주는 풍경 사진에 그 힌트가 있다. 

 

인간이 지금까지 생명(생물)의 세계를 마주하며 함께 살아갈 수 있었던 것은 끊임없는 호기심으로 생명의 세계를 분류하고 명명해서 나름의 방식으로 세계를 읽어왔기 때문이다. 이 능력이 결핍된 종의 후손은 이미 이 지상에서 볼 수 없다. 인간은 진화를 통해 그 방식과 선호, 요령을 장착한 뇌를 지금과 같은 형태로 지니게 되었다. 그러나 이 뇌로 감지할 수 있는 것은 한계가 있다. 적응하고 살아남기 위한 착각과 오류도 뇌가 세상을 감지하는 방법 중의 하나이다. 

“우리가 감지하는 자연의 질서는 단순히 외부 세계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우리가 그것들을 알아보도록 진화한 것이다. 우리는 온갖 찬란한 혼란으로 가득한 세계를 있는 그대로 지각하지 않는다. 우리는 그럴 수 없으며, 그 모든 것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우리는 우리를 둘러싼 모든 것 가운데 매우 특정한 부분집합을 감지하며, 그것도 유독 인간에게 특유한 방식으로/유리한 방식으로 인지한다. 이것이 우리의 과거가 남겨준 유산이다.”(<자연에 이름붙이기>248p)


태곳적부터 자연에 적응하며 키워온 움벨트, 즉 인간이 생명의 세계를 감지하고 분류하고 명명하는 능력은 발생한 그대로가 아니라 인간의 진화와 함께 진화를 거듭했다. 처음에는 이 광대한 생물권 가운데 아주 작은 조각만 처리하는 움벨트면 충분했을 것이다. 그러다 야생의 시대를 거치고 머나먼 대륙의 생명들까지 마주해야 했던 린네의 시대와 다윈의 시대를 거치면서 움벨트가 처리해야 하는 정보들이 많아졌고, 서로의 움벨트는 충돌하고 논쟁을 치러야만 했다. 움벨트의 시각이 지닌 보편성에도 불구하고 각각의 모든 개인이 무한히 많은 세부에 대해서까지 정확히 똑같은 질서를 감지하는 것은 아니(259p)었으니 말이다. 1960년대에 이르러 과학자들은 인간 감각의 구속에서 벗어나 좀더 엄격하고 객관적인 과학적인 분류법을 제시하게 된다. 숫자로 하는 분류학, 이름하여 수리분류학이다. 


수리분류학에서는 생물의 형질에 숫자를 붙여 부호화한다. 이 분류학에서 모든 형질은 똑같은 크기의 영향력을 지닌다. 각 형질이 얼마나 중요한지 혹은 중요하지 않다고 인식되든 상관없이, 가장 많은 수의 유사성을 공유한 종들은 함께 모여 동일한 속에(282p) 들어간다. 흥미롭게도 이렇게 수량화하여 만든 나무의 지식과 직관/움벨트를 사용해 추론한 나무의 지식이 비슷했다. 물론 똑같지는 않았다. 수리분류학은 생명 분류를 객관적으로 수량화할 수 있는 방법의 가능성, 전문 분류학자의 직관에 맞먹을 정도의 가능성을 지니고 있었다. 200년 동안 직관의 안내를 따라왔던 분류학이 이제 정량적 과학이 된 것이다. 생명의 세계에 더 이상 신비스러울 것도 없고, 이 분류가 맞다 아니다 싸울 필요도 없어졌다. 이것은 진보의 길이었고, 완전히 새로운 방법이었으며, 마침내 주관성의 늪에서 탈출할 방법이었다. (284p)


수리분류학이 내세우는 원칙은 단순명료했다. 객관성, 반복 가능성, 수량화, 그리고 명시적이고 설명 가능한 방법, 가중치 조정은 금지다. 어떤 특징도 따로 뽑아내 무의미하다거나 착각을 유도한다거나 특별히 유용하다고 구별하지 않는다. 오히려 모든 걸 다 던져 넣고 섞어버린다. 모든 형질은 일종의 다수결 시스템 안에서 동등한 표를 행사한다. 사용되는 형질이 많을수록 더 좋다.… 알고 보니 수리분류학의 탄생은 컴퓨터의 확산과 동시에 일어났다. (287p)


이렇게 분류학이 생명 세계와 맺는 관계가 변하기 시작했을 때 다른 모든 사람과 생명의 관계도 변했던 것은 우연의 일치가 아닐지도 모른다. 생명 세계의 광경과 냄새와 소리에 탐닉했던 일에서 멀어지고 있던 것은 과학자들만이 아니었다. 우리 나머지도 그랬다. 종일 낚시를 하거나 꽃 핀 들판을 들쑤시고 다닐 가능성은 훨씬 줄었고 아파트에서 쇼핑몰에서 멋진 실내의 경이를 즐기며 보낼 가능성이 훨씬 커졌다. 때는 DDT 살충제를 뿌리던 최전성기였고 심지어 집 마당까지 살균되었던 때다. 이런 집에서 뽀드득 소리가 날 정도로 깨끗이 닦은 유리창을 통해 텔레비전 보듯이 자연을 바라본다. 자연은 예쁜 장식적 배경 역할만을 했다. 손을 댈 필요도 없었다. 


이렇게 숫자와 배경으로 만나는 자연은 인간에게 어떤 세계를 안겨주었을까. 객관성이 확보된 진리의 세계? 인간의 직관과 움벨트를 무시해도 진화에 아무런 지장이 없다는 정보? 수리분류학은 지금껏 보아온 가장 비인간적인 분류학이었다. 형질을 선별하는 것 자체가 지극히 주관적인 일임에도 수치화된 이후에는 더 이상 문제삼지 않는다. 분류학자들에게 수리분류학은 컴퓨터가 자신의 일을, 예술과 과학이 미묘하고 섬세하게 혼합된 그 일을 한다는 생각이 그냥 모욕적으로 다가왔다. 이제 거대한 야생의 생명 세계는 전문가들의 몫이 되었다. 생명은 새로운 영역 아래로 들어가고 있었고, 보통 사람이 닿을 수 없는 거리 너머로 이동하고 있었다. 수와 컴퓨터가 점령한 이 시기 분류학을 보면서 우리에게 밀려들어온 AI 시대의 단면을 떠올린 것은 우연이 아닐 것이다. 





댓글

(자동등록방지 숫자를 입력해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