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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과학읽기] 인간이 개발한 최초의 정보 기술은 ‘이야기’2025-09-02 1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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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읽기] 유발하라리 <넥서스> 프롤로그 ~ 1부 인간 네트워크들 1장 2장 3장 



인간이 개발한 최초의 정보 기술은 ‘이야기’



칼과 폭탄은 누구를 죽일지 스스로 결정하지 않는다. 반면 AI는 스스로 정보를 처리할 수 있고 따라서 인간을 대신하여 결정을 내릴 수 있다. AI는 도구가 아니라 행위자다. AI는 이미 스스로 예술을 창조하고 과학적 발견을 할 수 있다. AI는 모든 인간이 관심을 가져야 할 문제다. 


AI 권력이 구체적인 형태로 나타나기 전에 먼저 정보가 무엇인지, 정보가 인간 네트워크의 구축을 어떻게 돕는지, 정보가 진실이나 권력과 어떤 관계인지 이해할 필요가 있다. 


정보란 과연 무엇인가? 기본 개념을 정의하는 것은 항상 어렵다. 일상 용법에서 정보는 말이나 글처럼 인간이 만든 기호와 관련이 있다. 순진한 정보관에서는 사람들이 그것을 이용해 진실을 알아내려고 시도하면 그것이 정보라고 말한다. 이 정보관은 정보 개념을 진실 개념과 연결하고, 정보의 주된 역할이 현실 재현이라고 생각한다. 즉 ‘저 밖에’ 현실이 존재하고, 정보는 그 현실을 재현하는 무언가로 우리는 그것을 통해 현실을 대해 알 수 있다. 유발하라리는 이 책에서 순진한 정보관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이다. 진실이 현실을 정확하게 표현하는 것이라는 점에는 동의한다. 하지만 정보의 대부분은 현실을 재현하려는 시도가 아니며 정보를 정의하는 기준은 완전히 다른 무언가라고 본다. 인간 사회는 물론 다른 생물 시스템과 물리적 시스템에서도 정보의 대부분은 아무것도 나타내지 않는다고. 


진실과 현실은 다르다. 아무리 진실에 충실하다 해도 현실을 모든 측면을 표현할 수는 없다. 현실에는 사람들의 믿음에 좌우되지 않는 객관적 사실들로 이루어진 객관적 차원이 있다. 반면 다양한 사람들의 신념과 감정같은 주관적인 사실들로 구성된 주관적 차원도 있다. 이 경우에는 사실과 오류를 구별할 수 없다. 


별자리 운세는 연인을 별점으로 묶고, 선전 방송은 유권자를 정치적으로 묶고, 군가는 병사들을 군사 대형으로 묶는다. 음악은 현실의 아무것도 재현하지 않지만 많은 수의 사람을 연결하고 그들의 감정과 움직임을 동기화하는 놀라운 일을 해낸다. 이처럼 정보의 결정적인 특징은 재현이 아니라 연결이다. 정보가 꼭 어떤 것들에 대해 무언가를 알릴 필요는 없다. 오히려 정보는 서로 다른 것들을 무언가로 묶는 역할을 한다.  


1969년 7월, 6억 명의 사람들이 텔레비전 앞에 앉아 닐 암스트롱과 버즈 올드린이 달 위를 걷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텔레비전 화면에 나오는 이미지는 38만 4,000킬로미터 떨어진 곳에서 일어나는 일을 정확하게 재현했고, 그것을 보는 사람들은 경외심, 자부심, 인류애를 느끼며 하나로 연결되었다. <성경>은 수십억 명의 인간을 종교 네트워크로 묶는 사회적 과정을 개시했다. 종교 네트워크는 사원을 짓고 법체계를 유지하고 기념일을 축하하고 성전을 치르는 등 개인이 할 수 없는 일을 해왔다. 


정보는 현실을 재현하기도 하고 재현하지 않기도 한다. 하지만 정보는 항상 연결한다. 석기시대부터 실리콘 시대까지 정보의 역사를 살펴보면, 연결은 지속적으로 증가했지만 진실이나 지혜도 함께 증가하지는 않았다. 호모 사피엔스가 세계를 정복한 이유는 정보를 현실의 정확한 지도로 바꾸는 데 탁월한 재능이 있어서가 아니었다. 오히려 사피엔스의 성공 비결은 정보를 활용하여 많은 개인을 연결하는 일에 탁월한 재능을 발휘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 능력은 거짓, 오류, 환상을 믿는 것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 


인간이 개발한 최초의 정보 기술은 ‘이야기’이다. 


약 7만 년 전 호모 사피엔스는 무리들끼리 협력하는 전례 없는 능력을 보이기 시작했다. 다른 무리들과 무역을 시작하고, 예술이 출현했으며, 인류의 고향 아프리카에서 지구 전체로 빠르게 확산한 데서 그것을 알 수 있다. 사피엔스 무리들 사이의 협력이 가능해진 것은 허구적 이야기를 말하고, 믿고, 그런 이야기에 깊이 감동받을 수 있게 되면서부터다. 이런 능력은 아마도 진화과정에서 뇌 구조와 언어 능력에 변화가 일어나면서 생겼을 것이다. 호모 사피엔스는 인간과 이야기의 연결이라는 새로운 유형의 사슬을 갖게 되었다. 사피엔스는 서로를 개인적으로 알지 못해도 협력할 수 있었다. 똑같은 이야기를 알고 있기만 하면 되었다. 그리고 그 똑같은 이야기를 수십 억 명이 공유할 수 있었다. 이렇듯 이야기는 많은 사람들이 무제한으로 접속할 수 있는 무제한의 콘센트를 제공하는 중앙 연결 장치이다. 예를 들어 가톨릭교회의 14억 신도들을 연결하는 장치는 <성경>과 기독교의 핵심 이야기들이다. 중국의 14억 국민을 연결하는 장치는 공산주의 이념과 중국 민족주의에 대한 이야기들이다. 그리고 세계 무역망의 80억 구성원을 연결하는 장치는 화폐, 기업, 상표에 관한 이야기들이다. 


이야기의 사실 여부나 모순은 중요하지 않다. 이야기는 오랜 시간에 걸쳐 수없이 회자되면서 무엇이 사실이고 무엇이 허구인지 구별할 수 없을 정도로 뒤엉킨다. 


스토리텔링 이전에 있었던 두 차원의 현실은 객관적 현실과 주관적 현실이다. 객관적 현실은 돌과 산, 소행성 같은 것들이다. 즉 우리가 그 존재를 알든 모르든 관계없이 존재하는 것들이다. 그다음에는 주관적 현실이 있다. 고통과 즐거움, 사랑처럼 ‘저 밖’이 아니라 ‘이 안에’ 있는 것들이다. 주관적인 것들은 우리가 그것을 인지하는 순간 생긴다. 

어떤 이야기는 세 번째 현실을 창조한다. 상호주관적 현실이라고 부른다. 통증과 같은 주관적 현실은 한 개인의 마음 속에 존재하는 반면, 법이나 신, 국가나 기업, 화폐와 같은 상호주관적 현실은 수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연결하는 곳에 존재한다. 말하자면 상호주관적 현실은 사람들이 서로에게 말하는 이야기 속에 존재한다. 사람들이 상호주관적인 현실에 대해 주고받는 정보는 정보 교환 전부터 존재하던 무언가를 나타내지 않는다. 오히려 정보를 교환할 때 상호주관적 현실이 생긴다. 


국가도 상호주관적인 현실이다. 우리는 보통 때는 상호주관적 현실을 의식하지 못한다. 미국, 중국, 브라질의 존재를 모두가 당연하게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특정 국가 존재하는지에 대해 사람들의 의견이 일치하지 않는 경우가 있는데, 그럴 때 국가가 상호주관적 현실임을 의식하게 된다. 이스라엘-팔레스타인은 분쟁은 이 문제를 잘 보여준다. 일부 사람들과 정부는 이스라엘의 존재를 인정하려 하지 않으려 하는 반면, 또 다른 사람들과 정부는 팔레스타인의 존재를 인정하려 하지 않기 때문이다. 미국도 독립 투쟁 과정에서 일시적으로 존재가 논란에 휩싸이는 시기를 거쳤다. 플라톤은 이미 <국가>에서 이상적인 국가의 헌법은 ‘고귀한 거짓말’에 기반해야 한다고 상상했다. 


이야기는 가짜 기억을 심고 허구적 관계를 형성하고 상호주관적 현실을 창조하면서 대규모 인간 네트워크를 짰다. 이런 네트워크들은 세상의 힘의 균형을 완전히 바꿔놓았다. 이야기를 바탕으로 짜인 네트워크를 구축한 사피엔스는 사자와 메머드는 물론 네안데르탈인 같은 고인류 종들에 비해서도 결정적인 우위를 점함으로써 지구상에서 가장 강한 동물이 되었다. 


이야기를 연결 장치로 이해하면 우리 종의 힘이 어디서 나오는지 알 수 있고, 왜 힘이 커진다고 지혜도 함께 커지지 않는지도 설명할 수 있다. 하지만 이야기는 정보 기술로서 나름의 한계가 있었다. 문서와 관료제가 생겨나면서 인간은 뇌가 기억할 수 없는 상호주관적 현실까지 통제할 수 있게 되었다. 문서, 기록 보관소, 서식, 면허, 규제 등의 관료 절차는 사회에서 정보가 흐르는 방식을 바꾸었고, 권력이 작동하는 방식도 바꾸었다. 좋든 나쁘든 문서를 다룰 줄 아는 관료 집단은 일반 시민을 희생시켜 중앙정부의 권한을 강화하는 경향이 있었다. 중앙정부는 국민에 대한 정보를 더 많이 수집하고 기록할 수 있었지만 국민은 시스템 자체가 어떻게 작동하는지 이해하기 어려운 처지가 되었다. 


미래의 이야기와 관료제는 어떤 모습일까. AI에 기반한 네트워크의 양상을 쉽게 예측할 수 있을 것이다. AI 시스템은 데이터를 찾고 처리하는 방법을 인간 관료들보다 잘 알고, 이야기를 지어내는 능력도 대부분의 인간보다 나아지고 있다. 하지만 오류 없는 AI 시스템을 창조하고자 한다면 그간 인간의 정보 네트워크들이 오류 문제를 어떻게 다뤄왔는지 참고해야 한다. 거룩한 책 <성경>의 발명 과정도 중요한 참고 자료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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