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병의 신화》 서문, 서론, 1부 신화의 성장과 구조 (1장 샤르코와 히스테리 문제, 2장 병과 가짜 병, 3장 의료 행위의 사회적 맥락) ‘정신병은 존재하는가?’ 이 질문은 우리 현대인에게 꽤 충격으로 다가온다. 정신병이 질병인지 아닌지에 관한 논의는 이루어지지 않고, 당연히 질병이라는 논의 아래 치료 방식만을 논하는 시대이기 때문이다. 치료 방식을 논한다는 말이 무색하게 정신병은 점점 더 늘어나는 추세다. 이 책의 50주년 기념판 서문을 쓰면서 저자는 단언한다. “정신의학의 역사는 ‘정신이상(mental disorder)’의 목록이 끊임없이 확대되는 역사다.”(14쪽) 저자는 이런 현상이 나타나는 이유를, ‘정신병’이 어떤 사람들의 (나쁜) 행동에 대한 다른 사람들의 판단을 가리키는 용어이기 때문이라고 지적한다. 많은 이들이 ‘미쳤다’는 말을 실생활에서 이해하지 못할, 혹은 나쁘게 해석될 만한 행동을 가리킬 때 쓴다. ‘정신병’ 혹은 ‘광기’는 질병이기 이전에 도덕적 판단을 전제한 말이다. ‘정신병’을 의학이나 과학의 문제가 아닌 법률이나 수사학의 문제로 이해하자는 저자의 주장(13쪽)도 충분히 수긍할 만하다. 오늘날 더 위험한 일은 의학과 국가의 동맹이다. 교회와 국가가 동맹을 맺었던 과거의 사례처럼 현대의 의학은 국가와 동맹을 맺으며 성장했다. 저자는 ‘국가가 승인한 강압을 치료의 이름으로 정당화’(34쪽)한다고 지적한다. 정신의학이 ‘강압적 국가 장치’로 기능하고 있다는 말이다. 정신의학을 비롯한 모든 의학은 ‘개인의 치료에서 정치적 압제로 변질할 위험’이 있다. 정신의학적 개입은 ‘의료 문제가 아닌 도덕 문제에 초점을 맞‘추기 때문이다.(39쪽) 저자에게 정신의학은 과학의 영역이 아닌 믿음(종교)의 영역과 유사하다. 저자가 비난을 받는 이유도 정신병을 믿지 않기 때문이다. 이는 증명보다는 신념의 문제에 가깝다. 어떤 원인이 특정한 결과로 이어진다는 ’역사주의‘의 믿음을 저자는 거부한다. 이런 믿음은 과학을 가장한 종교의 역할이기 때문이다. 물리학 법칙이 선행 요인과 그에 따른 결과로 이어진다고 해도, 사회심리학 영역에서는 이런 법칙(혹은 역사주의)을 적용할 수 없다.(55쪽) 이런 시각은 19세기 프랑스의 내과의사이면서 초기 정신의학에 큰 영향을 끼친 샤르코의 히스테리 연구에 대한 비판으로 이어진다. 프로이트에게도 영향을 미친 샤르코는 신경학적 질병을 정의하고 설명하며 분류하고자 했다. 이 작업은 병원에 수감된 환자들을 분류하고 처리하는 대상이나 사물로 대하면서 진행되었다. 환자들의 지배자였던 샤르코는 노동을 거부하던 당시의 꾀병 환자들을 환자로 분류했고, 그들을 히스테리 환자로 변모시켰다. 어떤 행위를 병으로 분류하느냐, 그렇지 않냐는 당사자인 개인뿐 아니라 분류를 인증하는 사회와 정치 시스템에도 심각한 영향을 미친다. 질병이 단지 인간의 신체 안에서 일어나는 문제가 아니라 어떤 규칙과 체계 안에서 만들어지고, 다시 규칙과 체계에 영향을 미친다는 말이다. 이 규칙과 체계 안에서 의사(전문가-판정자)는 누가 병자이고 아닌지를 결정한다. 저자가 보기에는 자의적이고 부조리한 과정이다.(95쪽) 저자는 정신병과 사회적 맥락이 분리되어 있다는 견해에 반대한다. 정신병은 사회와 개인의 교육적, 경제적, 종교적, 사회적, 정치적 특성에 따라 다르다.(105~106쪽) 저자는 경제적 풍요가 정신 치료 서비스 수요를 자극한다고 설명한다. 물질적 풍요에도 불구하고 “대다수는 여전히 행복하지 않고 그중 일부는 정신 치료를 통해 행복을 찾으려고 돈을 쓴다. … 정신 치료의 사회적 기능은 종교를 비롯한 술, 담배, 화장품, 여가 활동과 비슷하다.”(116쪽) 정신병의 치료와 사회계층에는 명백한 상관관계가 있다. “부유한 정신과 환자일수록 정신 치료를 더 많이 받고 가난한 환자일수록 신체적 개입 방식의 치료를 더 많이 받는다는 사실을 입증한 연구도 있다.”(116쪽) 현재 우리 사회가 개인의 고통을 다루는 방식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는 문장이다. 누군가는 자기 삶의 문제를 정신병과 심리 치료를 통해 해결하려 한다면, 누군가는 몇백 원짜리 진통제 한 알로 잠재우려 한다. 치료와 건강과 행복을 원하는 그들에게 의학, 특히 정신의학은 어떤 답을 줄 수 있을까? 저자는 1부의 마지막에 다시 한번 강조한다. 정신의학적 치료에는 두 가지 측면이 있다. 하나는 아픈 사람을 치료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부도덕한 사람을 통제하는 일이다. 치료와 사회 통제는 동시에 혹은 복잡하게 섞여서 이루어진다. 의료 개입을 온전히 치료로 보아서도 안 되고, 사회 통제만으로 보아서도 안 된다는 말이다.(128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