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울: 공적 감정》 후기 올해 초에 대통령 파면 선고 이틀 전 서울에서 열린 집회에 참석했다. 지난해 가을 난데없는 계엄과 탄핵을 둘러싼 소동 이후 광장은 수많은 사람들의 욕망이 충돌하는 공간이 되었다. 나는 그 공간에 간절하게 가 보고 싶기도 했고, 한편으로는 가능하면 참석을 미루고 싶기도 했다. 그러다 파면 선고 날짜가 확정되었다. 더 이상 미룰 수 없어 등 떠밀리는 심정과 다시 못 올 장면을 목격한다는 기대감이 동시에 나를 그곳으로 이끌었다. 광장의 집회는 평화로웠다. 흥겨웠고, 친절했고, 적어도 그 자리에서 소수자들을 배제하지 않으려 노력한다고 느끼게 했다. 승리를 코앞에 두었다고 여겨서인지 여유와 즐거움이 넘쳤다. 그런 자리에서 나는 어쩐지 동떨어진 기분이 들었다. 잘못 꿰맨 솔기나 튀어나온 실밥처럼 도드라지는 사람이 아닐까 싶어 조마조마했다. 그러면서도 광장 안에 깊게 드리운 우울을 느꼈다. 나에게 가까운 냄새와 온도라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날 나는 집에 돌아오는 길에 이 책을 주문했고, 우울에 관한 세미나를 열어야겠다고 결심했다. 내가 궁금했던 부분, 책을 읽고 여러 사람과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던 부분은 크게 두 가지였다. 첫 번째는 왜 어떻게 해도 우울은 사라지지 않는가. 과연 사라지기는 하는가. 희망을 이야기하고 승리를 예견하는 순간에도 광장의 사람들 사이에 넘실거리는 우울은 사그라지지 않았다. 승리를 예견하는 만큼 우울을 예견하는 일도 어렵지 않았다. 광장 바닥을 떠받치며 스며드는 우울을 보며 두 번째 질문을 품었다. 우리의 우울도 쓸모가 있을까. 나와 이들의 우울이 무가치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세월호 유가족들의 여러 활동이 십 년 넘는 시간 동안 우리 사회에 미친 영향력, 그 이후에도 이어진 참사들을 다른 시선으로 바라보게 해 준 힘은 우울과 동떨어진 힘이 아니었다. 어떤 희망이나 낙관보다 끈질긴 우울의 힘이 우리가 사태를 냉정하게 바라보며 버티도록 해 주었다. 내가 우울에 관한 책을 읽든 안 읽든, 이런 세미나를 하든 안 하든, 우울한 이들은 각자의 힘으로 자기 몫을 다하리라 믿는다. 그런 믿음에도 불구하고 세미나를 열고자 했던 이유는 우리가 각자의 우울을 무어라 부르고 어떻게 바라봐야 할지 모른다는 데 있었다. 우울을 자기 삶에서 몰아내야 한다고 믿는 사회는 우울의 힘을 인정하지 않을 테다. 그러니 그 힘으로 무언가를 이룬들, 애국심이나 정의감 같은 낡은 단어들로 포장되기도 쉽겠다. 지금 와서 돌이켜 보면, 광장에서 돌아오는 긴 귀갓길에 나는 그런 욕망을 품었는지도 모르겠다. 그 광장을 채우던 우울한 에너지에 영광을 돌려주자. 우리가 자신에게서 떼어내려 노력했던 어둡고 습하고 지긋지긋한 일부가 그 모든 힘의 배후에 있었다고 인정해 주자. 지금 내 삶에서 내가 이룬 모든 성취 역시 그 힘을 바탕으로 가능했다고 고백하자. 내 일상의 작은 습관들 하나하나까지도 우울과 무관한 부분은 없음을 당당하게 밝히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