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기

제목[사상사] 완정함으로 수렴하는 나노 단위의 파편들 (1주차 발제문)2025-10-14 1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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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정함으로 수렴하는 나노 단위의 파편들

『사상사를 어떻게 쓸 것인가』 1주차 발제문

에레혼


『사상사를 어떻게 쓸 것인가(이하 ‘사상사를 어떻게’)』는 제목에서부터 목적이 뚜렷하게 드러난다. 저자인 거자오광은 책의 서두에 해당하는 머리말과 1장에서 “왜 하필 ‘사상사’라는 키워드를 내세웠는지”, “이것의 서술 방식에 어떤 문제가 존재하는가”에 대해 설명한다. 


두 질문 중 사상사에 대한 논의를 살펴보자. 이 논의는 중국 20세기 초반 학술계에서 ‘중국식 학문 용어 만들기’ 과정에서 일어났던 혼란상과 관련되어 있다. 거자오광은 ‘철학/철학사’라는 용어를 문제 삼는다. 나는 “삶의 원리는 밝히는[哲] 학문”이라는 의미를 지닌 ‘철학’이란 단어가 그 자체로는 좋은 조어造語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중국의 지식인들은 철학 앞에 수식어로 ‘중국’이 붙을 때 그 의미가 궁색해진다는 문제를 꾸준히 지적해왔다. 이 문제와 관련해서 김악림(金岳霖, 1895~1984)이라는 철학자가 동년배 철학자인 풍우란(馮友蘭, 1895~1990)의 『중국철학사』를 읽고나서 평한 구절을 살펴보자. 


‘중국철학中國哲學’이라는 명칭 자체가 바로 이러한 난제를 품고 있습니다. 소위 중국철학사란 ‘중국철학의 역사[中國哲學的史]’입니까, 아니면 ‘중국에서의 철학사[在中國的哲學史]’입니까? 만약 어떤 사람이 ‘영국 물리학사’를 쓴다면, 그가 쓰는 것은 실제로는 ‘영국에서의 물리학사’이지 ‘영국 물리학의 역사’는 아닐 것입니다. 왜냐하면 엄밀히 말해 ‘영국 물리학’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중략)… 이 근본적 태도에는 최소한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중국 철학을 중국 국학國學 중의 한 가지 특수한 학문으로 간주하여, 보편 철학과의 같고 다름[異同]의 문제를 굳이 논할 필요가 없다는 태도입니다. 다른 하나는 중국 철학을 ‘중국에서 발견된 철학’으로 간주하는 태도입니다.


김악림은 위 글에서 당시 국수주의자들이 ‘중국에도 철학이 있다(=중국철학의 역사를 연구해야 한다)’고 주장하던 이들이 학문의 보편적 기준을 거부한다는 점을 지적하기도 했다. 동시에 ‘중국에서 발견된 철학을 연구하자(=중국에서의 철학사)’는 학문적 주장 역시 (호적이 그랬듯) 특정 사조思潮/주의主義의 시각으로 중국의 과거를 재단하는 방식으로 흐를 수 있음을 경계한다. 


다시 거자오광의 논의로 돌아와서, 그가 ‘철학사’ 대신 ‘사상사’를 살펴야 한다고 주장하는 까닭은 ‘중국 철학’ 딜레마에 빠지지 않기 위한 출구 전략처럼 보인다. 『사상사를 어떻게』의 38쪽부터 40쪽에 펼쳐지는 논의들을 보면, 중국 지식인들이 자국의 ‘철학사’에 대해 서술하는 과정에서 ‘철학이라는 용어는 중국에 원래 없는 말이지만 그렇다고 중국에 철학이 없는 것은 아니다’라는 태도를 줄곧 유지했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다. 


“‘철학’이라는 용어에 매몰되지 않은 채로 중국의 고대사를 들여다볼 수는 없을까?” 거자오광의 ‘사상사’ 제안은 결국 ‘philosophy의 번역어로 기능하는 철학’을 굳이 고대 중국에 들이댈 필요가 없다는 지당한 해결책인 셈이다. 사상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면 ‘무엇이 철학인지 혹은 아닌지’ 구분할 필요가 없으며, 철학에서 논의했던 것보다 연구 대상의 외연을 더욱 확장시킬 수 있다는 장점도 있다. 저자의 말을 빌리자면 “‘사상’이라는 용어가 ‘철학’에 비해 풍부한 포괄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본문 40쪽)


이제 다음 물음. ‘포괄성’은 어떤 것까지 품을 수 있는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는 과정은 거자오광이 “사상사를 어떻게 쓸 것인가”라는 질문을 들고 온 이유와 맞닿아 있다. 그는 지금까지의 사상사 저작에서 등장한 서술 대상이 지나치게 협소했음을 지적한다.


‘사상사’ 혹은 ‘철학사’라고 불리는 저작을 살펴보면 예지를 가진 철인들과 경전적인 저작들이 줄줄이 나열되어 있다. …(중략) … 천재는 매 시대마다 무리지어 등장하고, 경전 또한 매 시대마다 계속적으로 출현하는 듯하다. 따라서 사상사가들은 시대 순으로 그들에 대한 장절章節을 안배하는데, 위대한 사상사에게는 한 장을, 그보다 비중이 적은 사상가에게는 한 절을 할애한다. …(중략)… 한편으로는 화려한 명부처럼 이미 세상을 떠난 천재들의 생애와 저작을 하나 하나 해당되는 항목에 등록한 듯하고, 또 한편으로는 마치 영예로운 합격자 명단처럼 논공행상論功行賞하거나 공을 평가하여 그 순서대로 나열하는 듯하다. (본문 50쪽~51쪽)


‘천재와 경전 위주의 사상사에서 벗어나자’는 논의는, 거자오광이 해당 『중국사상사』를 구상한 시점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기회가 있으면 이야기를 해온 것이기에 이미 익숙한 말처럼 들린다. 기존 사상사의 작법이 문제가 되는 이유 역시 거자오광은 명쾌하게 설명한다. 


(1) 실제 사상의 변천과정은 대다수 사상사 저작들이 서술하는 시간순서대로 진행되지 않았다. (본문 53쪽) 우리는 자신이 몸담던 시기에는 전혀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하다가, 몇 백 년이 지난 후에 구출된 사상가의 이름을 어렵지 않게 떠올릴 수 있다. 

(2) 거자오광은 실생활에서 영향을 미치는 사상과 학술계-지성계에서 주류가 된 사상에 괴리가 존재할 수 있음을 지적한다. (본문 54쪽) 이를테면, 특정 왕조의 황제가 지식인들과 도모하여 강력한 불교 억제 정책을 펼쳤다고 해서, 모든 나라가 불교를 멀리하는 결과가 도출되었으리라고 결론을 내려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3) 사상사의 상당수는 과거의 자료들을 포괄적으로 검토할 수 있는 사상사가의 주관이 개입될 여지가 높다는 점 역시 언급해야만 하는 문제이다. (본문 55쪽)


이제 모든 권위(사상사의 저자, 사상사의 체제, 사상사의 서술 대상인 소수 엘리트)를 해체한 사상사는 어디로 흘러가는가? 거자오광의 ‘해체적 서술 작법’이 향하는 행선지는 예상보다 더 극단적인 지점인데, 그것은 바로 ‘일반적 지식ㆍ사상ㆍ신앙’을 사상사의 새로운 연구 및 서술대상으로 삼는 것이다. ‘천재와 경전 위주의 사상사’가 드라마틱한 변화와 사상사의 내러티브를 중시하는 작법을 택한다면, 거자오광의 사상사 작법은 거두들의 등장 이면에 흐르는 ‘느리면서도 잠재적인 변화’에 주목한다. 


의심할 여지없이 나는 사상사 안에서 이러한 천재들과 경전에 대해 쓰기를 희망하며, 이렇게 해야 비로소 사상사는 시간의 흐름에 따라 사상의 기복에 의한 높낮이를 묘사해낼 수 있다. 그러나 내가 이와 더불어 표현하기를 희망하는 ‘일반적인 지식ㆍ사상과 신앙의 세계’는 상당히 긴 시간을 통하여도 눈에 띌 만한 변화를 내보이지 않을 수도 있다. (본문 63쪽)


이러한 관점에서 사상사를 서술하려면, 재료가 아닌 것을 찾기가 더 어려워진다. 그릇의 문양, 지식인들이 경전을 읽으며 수기로 작성한 메모, 심지어는 사이비 역사서(‘왜 그런 위조를 감행해야 했는가’라는 측면에서), 민간 예술 자료까지, 천재들이 뛰어 놀 수 있는 배경을 담당했던 세계관에는 다양한 ‘읽을거리’가 존재한다. 다만 예전의 사상사가들은 이것이 독해의 대상이라고 생각하지 못했을 뿐이다.


발제문을 마치면서, 『사상사를 어떻게』를 거자오광 방식으로 설명해보려 한다. 해당 저서를 사상사 작법에 대한 저서로 보는 데에서 그치는 게 아니라, 이 책에 드러난 용어 사용과 문제 의식을 ‘거자오광 개인의 사상사’를 탐지하는 기저 사료로 보는 것이다. 책을 읽으면서 그동안 무심코 지나친 최근 거자오광의 행보들이 이미 20여년도 더 전에 『사상사를 어떻게』 속에 복선처럼 깔려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왜 그는 중국의 정체성과 중국의 영토에 대한 연구를 하는 과정에서 중국의 변강지역을 연구하는 과목을 대학원에 개설했을까? 거자오광은 자신의 수업에서 몽골어 사료나 페르시아어 사료를 읽어야 한다고 실라부스에 밝히고 있는데, 이것이 단순한 ‘허세’가 아님을 『사상사를 어떻게』의 아이디어들이 변호해줄 수 있지 않을까? 


미시적인 요소들을 역사 연구에 끼워넣으면서 극단적인 거시 담론(중국 정체성 탐구, 온전한 사상사의 복원)을 이야기하는 거자오광의 학문적 실천이 언제 완수될 수 있을지. 모든 게 연구 및 서술 대상이 될 수 있는 세계관에서 ‘온전한 형태의 복원’이란 캐치프래이즈가 실현 가능한 한 일이긴 한지 궁금해진다. 희망회로를 돌리면, 풍우란의 책에 대한 또다른 심사보고서의 저자 진인각이 말한 것처럼, 일반적 지식-사상-신앙에 대한 주목은 고대인들에 대한 ‘동정적 이해[[了解之同情]’(본문 36쪽)을 실천할 방법일지도 모른다. 동시에 책을 읽는 과정에서 부러 깐깐한 태도를 취해보려 한다. 거자오광의 사상사 서술 방법이 ‘그들이 직접 말하게 할 방법’마저 앗아가는 또 다른 엘리트주의로 이어질 위험성은 없는지, 감시하는 독자가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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