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같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 에레혼 『사상사를 어떻게 쓸 것인가』2장, 3장 거자오광의 『사상사를 어떻게 쓸 것인가(이하 ‘사상사를 어떻게’)』는, 단순히 중국 사상사에 대한 새로운 지식을 전달하는 책이 아니다. 거자오광은
책 전반에 걸쳐 사상사라는 학문 분과가 무엇을 채택하고 또 무엇을 배제해왔는지를 묻는다. 2장 「지식사와
사상사」, 그리고 3장 「도道 혹은 궁극적
의거」는 저자의 학문적 야심을 보여주는 장인 동시에, 거자오광의 학술 기획에 내재한 긴장과 모순을 드러내는
부분이다. 거자오광은 2장에서 기존의 ‘위대한 천재 및 경전’ 중심의 사상사 작법을 파괴하기 위한 방법을
모색하지만, 3장에 이르러서는 파괴된 파편들을 ‘궁극적 의거’라는 이름 아래 봉합하는 작업에 몰두한다. 2장에서 거자오광은 기존의 사상사, 혹은 사상사가들이
‘지식’을 경시해온 관례를 비판한다. 현대의 사상사 연구는 근대적인 잣대를 가지고 과거의 풍부한 지식 세계를 멋대로 재단하기 때문이란다. 그의 주장대로라면 사상은 진공 속에서 탄생하지 않는다. 거자오광은
사상이 수술數術, 방기方技와 같은, ‘이단적 요소’를 자양분 삼아 자신의 몸집을 키워왔음을 지적한다. 그러나 기존 사상사 서술에서는 이러한 배경을 의도적으로 무시하거나 격하해왔다.
현재의 사상사는 도리어 수술, 방기와 경학의 지식을 소홀히
하여, 수술, 방기의 연구와 경학의 연구는 마치 완전히 단절된
듯한 전문 분과가 되어버렸다. …(중략)…그러나 수술, 방기와 그 밖의 여러 가지 지식에서 떠난다면 사상사는 배경으로부터 점점 더 멀어지게 될 것이다. 과연 경학사를 떠나서 사상사가 중국사상의 역사를 분명히 말할 수 있겠는가? (본문 89-90쪽) 거자오광은 이러한 ‘무시’가 사상사가 스스로의 고상함을 강조하기 위해 출신을 은폐하려는
의도적인 과정이라고 말한다. “사상이 지식으로부터
자신을 정제한 후, 사상가는 자신의 출신을 인정하지 않으려 들고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자신의 지식
배경을 엄폐하려고 한다.” (본문 102-103쪽) 이 부분까지는 고개를 끄덕이며 읽게 된다. 중국에서 ‘사상가’라고
불리는 이들이 자기 서사를 위해 자신의 잡다한 과거를 숨기고자 했다는 사실을, 혹은 그들의 제자와 그들을
추종하던 후대 학자들이 사상가에 대한 신화를 만들기 위해 얼마나 노력해왔는지는 일일이 사례를 들 필요조차 없다.
이 대목까지 살펴보면 거자오광은 ‘성상聖像 파괴자’에 가깝다. 그는 ‘기존
사상사’의 성상 아래 억압되었던 수많은 지식의 파편들을 해방하는 작업을 수행한다. 그런데 독자는 이어지는 장에서 그 파편을
열심히 수습하고, 새로운 성상을 만들려 하는 거자오광의 모습과 마주한다. 중심지향적 논의-환원적 입론에 대해서 의구심을 제기하던 저자가 돌연
태도를 바꾸는 것이다. 3장 논의의 핵심은 ‘모든 사상과
지식의 배후에는 증명할 필요조차 없이 자명하게 받아들여지는 궁극적 의거가 존재한다’는 명제이다. 거자오광은 이 문장의 그 근거를 찾기 위해 역사의 심층부로 파고든다. 그
민족적 무의식으로부터 거자오광 길어 올리는 키워드란 바로 ‘천天’이다. 나는 고대 중국 사상 세계의 수없이 많은 지식과 사상의 지배적 관념은 모두 천원지방天圓地方, 음양변화陰陽變化, 중심사방中心四方
등, 본래 천문-지리적 경험으로부터 생겨났고 그것을 토대로
하고 있는 게 아닐까 생각한다. …(중략)…또 고대 중국의
천원지방, 천도좌선天道左旋, 중앙사방中央四方, 음양변화陰陽變化, 사계유전四季流轉의
의미지는 상징의 암시와 의식의 신성화를 통하여 사람들의 유추 과정에서 영원히 변치 않는 절대적인 진리의 기점이 되었고, 사람들의 마음속에서 점차 많은 지식과 사상을 이룩하게 되었다. (본문 121-122쪽) 이러한 논리적 도약은 독자에게 당혹스러움을
선사한다. 거자오광은 2장까지 ‘단일한 거대 서사’로 구축된 사상사를 경계하지 않았던가? ‘포스트주의자’가 돌연 궁극적 의거의 모색을 위해 새로운 중심축을
구축하는 광경이 펼쳐지는 것이다. 물론 거자오광이 아무런 토대 없이 중국
사상의 대전제를 논하는 건 아니다. 『사상사를 어떻게』의 2장이
‘지식’을 통해 사상이 형성되어온 과정에 대해 역설하는 부분이라면, 3장은 그러한 지식들이 어떠한 ‘관념’ 내지 ‘무의식’에 의해
형성된 것인지 설명하는 영역이다. 심지어 거자오광은 ‘천’과 관련된 다양한 장소 및 의례, 각종 문물을 근거로 대며 이것이
중국인의 무의식 심층부였음을 증명한다. 하지만 여전히 몇몇 의혹을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다. 첫 번째로 과연 ‘천’의 신성화 및 종교화가 정말로 고대 중국인들의 보편적인 무의식이었는가
하는 점을 이야기할 수 있다. 사실 ‘우주론의 일관성’을 불식하려는 시도는 이미 여러 번 이뤄진 바 있다. 이를테면 공자의
논의가 공자 이전의 신비론적 천론天論과 인간 중심의 천론을 구분하는 지점이라는 주장이나, 공자의
유세가 당시 제후들에게 받아들여지지 않은 이유가 그의 말이 ‘원시종교적 유교에서 인문주의적 유가로의
전환’이었기 때문이었다는 주장 등이 대표적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거자오광이 복원하려는 ‘천’ 중심의 세계관은 유학의 주류가 극복하고 지양하려 했던, 원시적/원형적 사유인 셈이다. 거자오광은 이러한 환원주의적 세계관의 구성을
비판하려 했지만, 결과적으로는 3장에서 사상사의 발전 과정을
평면화하는 오류를 범하는 것이 아닌가? 다음으로 거자오광이 궁극적 의거로서 ‘천’을 언급하고자 한다면, 그는
‘과연 모든 중국의 고대인이 같은 형상의 천을 사유했는가?’ 하는
물음에 답해야만 할 것이다. 거자오광이 자신의 논거로 삼는 양저良渚 문화의 옥종玉琮이
보여주는 질서정연하고 기하학적인 우주관은 그의 논의에 부합하는 듯하다. 그러나 비슷한 시기 다른 지역에서
출토된 유물 역시 하늘에 대해 같은 방식으로 표현했다고 주장할 수 있을까? 굳이 지리적 결정론 같은
논의를 도입하지 않아도, 장강 중류와 하류, 그리고 요하의
상류 각각의 지역적 차이는 거주민의 상이한 자연관에 영향을 미친다. 또한 이들이 생각하는 하늘과 천문
현상에도 뚜렷한 차이가 드러나며 이러한 차이는 그들이 하늘을 묘사하는 방식에도 영향을 미쳤다. 다소
유치한 질문일 수 있겠으나, 중국 각기 다른 지역에 살았던 사람 역시
‘같은 하늘’을 보았다고 단정할 수 있는가? 이
물음에 쉬이 긍정할 수 없다면 거자오광의 논의 역시 비판적으로 바라보아야 하지 않을까. 그의 논의는
중원中原 문화를 디폴트 값으로 상정하고, 그 틀로 중국 전체를 설명하려는 위험한
시도 아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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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저 문화권 태양신 형상
(장강 하류 지역)
| 홍산 문화권 태양신 형상 (동북
랴오닝성 일대)
| 성배계 문화권 태양신 형상
(장강 중류 지역)
| 기원전 3400년경 ~ 기원전 2250년경 | 기원전 4000년경 ~ 기원전 3000년경 | 기원전 6500년경 ~ 기원전 5000년경 |
→ 동일하게 하늘을
신격화한 유물이지만 지역별로 현격한 차이가 나타난다
 → 성배계문화의
위치 참조(위 사진의 아래에 있는 가작 작은 넓이의 도형 부분) 
→ 홍산문화(왼쪽 위 구리색 원형)와
양저문화(왼쪽 아래 연구색 원형)의 위치
정리하자면 거자오광은 ‘천재와 경전’ 중심의 거대 서사를 해체하고 잊혔던 민중의 지식과
같은 ‘미시세계’를 복원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3장에 이르러서는 그 모든 미시 세계의 목소리를 ‘천’이라는 총체성 아래 포섭하고 만다. 이러한 과정에서 거자오광이 주장한
‘일반적 지식의 해방과 복원’ 과정에서 일반 대중은 자신의
목소리를 잃는다. 『사상사를 어떻게』는 거자오광 같은 엘리트 연구자가 발견한 원리를 입증하기 위해, 미시적 존재를 동원하는 저작이라는 의혹을 피하기 어렵다. 거자오광의 하늘 타령을 보니 『사상사를
어떻게』가 오래된 책이구나, 하는 생각이 절로 든다. 이
유행 지난 타령에 오래 되어버린 시 한 편을 짝지어 주고 싶어진다. 이제 교과서에서도 수록되지 않을
정도로 오래된 시, 「누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 말이다. 해방과
복원을 논하는 책에서 기대하는 바는 연구자의 시선을 통해 굴절된, 영원의 하늘이 아니다. 일반적 지식-사상-신앙에
방점을 두었다는 홍보 문구에 끌려 책을 펼친 독자라면, 중국이라는 넓은 영토 가운데 다양한 모습으로
살아간 중국인의 ‘삶들’을 마주하고 싶을 터. 하지만 저자는 그러한 다양성이 어떻게 사상사 체계 아래 공존하고 있는지 논하지 않는다. 거자오광이 독자에게 보여준 하늘은 찢어버려야 하는 쇠항아리일 뿐이다. 이론의
단단함으로 모든 예외적인 빛을 가두어 버린 거대한 쇠항아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