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예수를 구원해주지?
<사상사를 어떻게 쓸 것인가> 발제문(4~5장)
기픈옹달(zziraci@gmail.com)
거자오광은 사상사의 서술을 [역사의 시간 안에서 사상의 여정을 만드는 안내도](136쪽)라고 정의한다. 제목 '사상사를 어떻게 쓸 것인가'는 그의 고민을 담은 제목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원제 '思想史的寫法'에서 볼 수 있듯 사상사 담론에 대한 고민보다는 방법론에 대해 치중된 고민으로 보인다. 이를 이야기하는 것은 그가 영감을 받은 푸코의 <지식의 고고학> 등이 담론의 문제를 다루었지 방법론에 대한 책이 아니라고 알고 있기 때문이다. 요컨대 이런 질문을 던지는 것은 그가 다루고자 하는 문제가 계속 뚜렷하게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역사학은 마땅히 '불연속', 예컨대 문턱·단절·파열·전화·변형 등 이른바 '단절 현상'을 찾아야 하리라는 것이다.](142쪽) 이런 언술에도 불구하고 그 목적이 잘 보이지 않는다. 그에게는 두 가지 욕망이 엿보이는데 하나는 기존의 연속적 사상사 서술의 한계를 벗어나려는 것이다. 저자가 이야기하듯 중국철학사 서술의 줄거리는 사제이왕四帝二王 - 요·순·우·탕·문·무를 이어 공자로 매듭지으며 1부가 끝나고, 2부는 한유와 이고, 송대 사상가들을 이어 주희에게서 다시 꽃피운다. 그 결과물이 <송원학안>, <명유학안>이며 그 서술은 도통론을 뒷받침하고 있다. 도통론에 포착되지 않은 다른 사상의 단절에 주목하고자 한다. 그러면서도 그는 사상사의 공백을 매우고자 하는 욕망을 감추지 않는다. [우리가 사상사에서 역사를 소급하여 서술하고자 할 때 모든 사상의 시간에 대해서 평등하게 서술할 것이고 사상의 의미도 새로이 평가해야만 할 것이다.](183쪽) 역사의 공백이 없듯이 사상사의 공백도 없어야 한다.
그러나 이 두 가지 욕망은 근본적으로 충돌하는 것이 아닌가? 단절과 연속이라는 두 목표를 함께 성취할 수 있을까? 잘 모르겠다. 이러한 의심과 불신은 저자가 새로운 사상사 서술에 대한 포부를 밝히면서도, 그것이 중화질서를 위한 사상사 서술과 얼마나 근본적으로 다를 수 있을까 의문이 들기 때문이다. 비판적 방법론에 머무는 순진한 철학은 자신도 모르게 기존의 질서에 복무하기 쉽다.
좀 다른 이야기를 하면 요즘 아이들과 <소피의 세계>를 읽고 있다. 소설로 쓴 서양 철학사인데 재미있게도 이 책을 쓴 저자 요슈타인 가아더는 노르웨이 사람이다. 서양 철학에서 과연 노르웨이는 언제 등장할까? 누구를 내세울 수나 있을까? 솔직히 아무 것도 떠오르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오래도록 사랑받았다. 철학사, 사상사라고 부를 수도 있는 그 역사를 소설이라는 형식을 빌려 꽤 흥미진진하게 서술한다. 그래서 이런 상상을 해보았더랬다. 사상사를 무협지처럼 서술하면 어떨까.
무튼 서양 철학사는 그 내용에 있어 대동소이하다. 그리스로부터 혹은, 그보다 먼저 문명사에서 시작하고 로마와 중세 유럽을 거쳐 대륙의 합리주의와 영국의 경험주의를 낳는다. 현재 이렇게 근대 철학의 입구까지 왔다. 재미있는 점은 고대 그리스 철학자, 자연철학자와 소피스트, 소크라테스·플라톤·아리스토텔레스에게는 그렇게 많은 장절을 할애해놓고 중세 천 년의 시기는 아우구스티누스와 아퀴나스로 간단히 정리하고 되려 르네상스에 대해 상세히 설명한다. 게다가 르네상스 시대에서는 철학자는 커녕 과학자와 예술가를 들먹인다. 과연 좋은 철학사라 할 수 있을까?
거자오광이 이야기하듯 사상사는 일종의 교과서 같은 역할을 하곤 한다. 사상의 맥락 위에서 각 철학자 혹은 각 개념의 역할과 위치를 가늠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역할과 위치는 저자와 동시대를 살아가는 현재의 철학에서 차지하는 역할과 위치라 할 수 있다. 사상사는 과거의 서술에 머물지 않고 현재의 사상을 구축하고 재구성한다. 저자의 논의를 되돌려준다면, 사상사 역시 하나의 사상일 수밖에 없다. 푸코의 저술이 중요했던 것은 푸코가 담론, 즉 과거를 다시 쓰는 방식을 통해 현재의 지식을 파괴하고 재구축하는 길을 고민했기 때문이다. '사상사를 어떻게 쓸 것인가?' 결국 사상사를 다시 쓴다고 할 때 무엇을 파괴하고 무엇을 재구축할 것인가가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 이 책의 아쉬운 부분이다. 학자연 하는 저자에게 이런 질문은 과도한 지적질이 아닐까? 학문이란 어떤 특정한 목적에 복무하는 것이 아니라고 답할 수도 있을 것이다.
<사상사를 어떻게 쓸 것인가>를 읽으며 <소피의 세계> 서술이 자꾸 떠올랐다. 물론 <소피의 세계>가 하나의 훌륭한 사상사라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서양철학사의 중요한 특징을 발견할 수 있었다. 철학사는 곧 이주의 역사라는 점이다. 철학사는 정주의 역사가 아니다. 그리스에서 로마로, 로마에서 서유럽으로 그리고 각각 독일, 영국 나아가 신대륙까지 이동한다. 거자오광은 동양화를 예로 들며 역사의 공백을 지우고자 한다. 공백도 나름의 의미가 있다며. 시간의 흐름을 공간의 배치로 비유한 것을 차용해 중국 영토 위에 사상사를 그려본다고 하자. 지도 위에 중국 철학사를 그린다면 그 영토는 어떻게 그려질 것인가? 서양철학사 서술처럼 그 역시 이주의 방향과 흔적을 보일까? 왕조의 역사를 차용해 이렇게 이야기할 수도 있다. 장안에서 낙양, 그리고 개봉과 임안을 거쳐 남경과 북경으로 이동했다고. 그러나 이럴 때에도 공백은 지워지지 않는다. 과연 공백 없는 사상사란 가능한 것일까? 아니, 지도 위의 그 여백에도 여전히 어떤 의미가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저자는 왜 단절 없는 연속적 역사에 집착하는 걸까? 앞의 논의를 끌어들이면 역사를 차용해 자신을 설명했던 중국의 독특한 정체성 때문이 아닐까? 과거의 중국인에게 역사는 모범이었고, 그 맥락 위에서 사상이 꽃피웠다. 역사란 중국인을 중국인이게끔 하는 중요한 맥脈이다.
한편 오구라 기조의 <한국의 행동원리>라는 책이 떠오르기도 했다. 그는 일본인의 관점에서 한국의 특성으로 '도덕성의 추구'를 든다. 이런 식의 접근이 갖는 근본적 한계에도 불구하고 꽤 재미있는 서술이었다. 내용을 넘어 그가 가지고 있는 관찰자적 입장이 흥미로웠다. 외부인의 서술이 갖는 힘이야 말로 철학사 서술에 중요하지 않을까.
그의 사상사에 대한 논의가 답답한 것은 바로 그런 외부자적 시선이 없기 때문일 테다. 해체와 파괴, 재구축의 방향이 보이지 않는다. 과연 그는 다른 사상사를 쓸 수 있을까? 이쯤에서 뜬금없이 대문에 건 제목에 대한 이야기를 해야겠다. 서양 철학의 역사, 그 가운데 근대 철학의 역사는 신학으로부터의 탈출이라 할 수 있다. 신학이 이루어놓은 보편성을 깨트리는 것, 보편보다는 특수, 신보다는 인간, 순종보다는 자유, 차별보다는 평등. 이런 까닭에 누군가는 철학을 도끼로 비유할 수 있었다.
신학은 학문일 수 있을까? 신에 대한 학문이라면 그 역시 학문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때의 신은 객관화 되지 않는 신이다. 결국 신학은 자기 모순에 빠지고 마는데, 바로 신앙을 위한 신앙에 의한 학문이기 때문이다. 거자오광의 책을 읽으며 신학자들의 답답한 논의를 떠올랐다. 중국인에 의한 중국 사상사이기 때문이다. 나아가 중국을 위한 중국 사상사라는 인상을 지울 수 없었다.
신학의 세계에서 오래도록 예수는 억압과 차별, 보편과 신성의 역할을 했다. 과연 그것이 인간 예수의 삶이었을까? 나는 변방 혹은 이방의 탐구자들이 신학의 그물에서 예수를 해방시켰다고 믿는다. 해방신학 혹은 민중신학이라는 이방의 변종이 예수를 인간으로, 나아가 그의 생애를 저항과 해방의 운동으로 재구축 했다. 신학자들은 그것이 신 없는 신학이라 손가락질한다. 그러나 그런 탐구는 폭압의 지옥에서 해방의 천국으로 예수를 구원했다. 이단자와 이방인이야 말로 예수를 구원했다.
저자가 비판하는 도통론은 동아시아 사회의 억압적 사유 구조로 작동했다. 남성과 여성을 나누었고, 지배자와 피지배자를 구분했으며, 중심과 주변을 갈라놓았다. 도통론으로 중화中華와 이적夷狄을 구분했다. 따라서 이렇게 물어볼 수밖에 없다. 공백을 드러내며, 보편의 사상을 이야기하는 그는 중화를 무너뜨릴까? 아니면 이적을 중화에 포괄시킬까? 내가 보기에 그의 철학 작업은 후자로 수렴되고 있다. 중화민족의 환상이 도래하고 있다. 황제黃帝이래로 면면이 끊이지 않고 이어온 문화 민족이 있다며. 21세기 중국은 단일 민족의 환상을 결코 버리지 못할 것이다. 이런 배경에서 그의 사상사는 어느 위치에 있을까? 그 역시 중국인이라면 지나친 비판일까? 대문자 역사의 그물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그의 서술이 중화中華사상사 혹은 화하華夏사상사 서술이 아닐 수 있을까? 예컨대 19세기 이후 서세동점 시기 근대 동아시아 사상사를 서술한다고 할 때 중국을 넘어 조선과 일본의 사유에도 그는 관심을 가질 것인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