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 길 떠나려는 사가史家에게 말했으면
-『사상사를
어떻게 쓸 것인가』 8, 9장 발제
거자오광 『중국사상사』는 2000년에 2권이 출간되었으니 벌써 세상에 나온 지 사반세기 지난 낡은 책이라 할 수 있겠다. 하지만 21세기 초 중국 기사들에서 중국의 문사철 전공에서
해당 책을 전공 교재로 사용하기도 했다는 이야기를 심심치 않게 발견할 수 있다. 당시에는 그의 학문적 성과를
지지하는, 또는 비판하는 수많은 논문이 게재되기도 했다. 지금도
거자오광, 하면 사상사라는 키워드가 자연스레 떠오를 정도로 그의 『중국사상사』는 현상이었다.
이 신드롬의 열기는 끊어질 듯 끊어지지 않았다. 거자오광은 기회가 되면 꾸준히 사상사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논했다. 그리고
올해에는 『중국사상사』의 출간 25년을 맞아 해당 저서의 개정판이 세상에 나왔다. 이쯤되면 거자오광에게 ‘사상사 깎는 장인’이라는 별명을 붙여도 되지 않을까? 『중국사상사』 개정판에는 새로운
고고학의 연구 성과들이 반영되는 등 (신간 소개 기사만 보아서는) 단순히 표지갈이만 한 소장본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거자오광의 명성이 높아질수록 자연스레 회자되는 인물이 있다. 바로 천커지엔(陈克艰)이라는
교수이다. 그는 거자오광의 철두철미한 비판자로 유명한데, 거자오광의
『중국사상사』가 세상에 처음 나왔을 때부터 해당 저서에 대한 비판을 제기한 인물이다. 천커지엔은 수학을
전공했으나, 최종적으로는 과학 철학과 사상사에 종사하고 있다. 거자오광과
동일한 분야에 몸담은 인물이 거자오광에 대한 논적論敵으로 자리하는 셈이다.
「사상의 근거 없는 오만(思想的无端骄傲)」이라는 제목을
한 비평문은 거자오광 학술의 약점을 찌르기도 하지만, 그 비꼬는 말투 덕에 더 많은 주목을 받았다. 천커지엔은 거자오광이 천天 개념을 이야기하며 궁극적 의거 운운하는 지점을 두고 다음과 같이 비꼰다.
[거자오광 선생의 대의론은 잘못이라고 말할 수조차 없는, 쓸데없는
소리이다. 그것들은 모두 몇 글자만 살짝 고치면, 통째로
단락째 『그리스 사상사』 제 1권에 가져다 쓸 수 있을 터이고, 다시
『이집트 사상사』 제 1권에도 가져다 쓸 수 있을 것이며, 또
다시 『인도 사상사』 제 1권에 쓸 수도 있을 것이다.]
「사상의 근거 없는 오만」
이외에도 천커지엔은 거자오광이 의도적으로 펑유란, 허우와이루, 런지위 등의 교과서적 사상사 저술에만 주목하여 ‘엘리트 사상 이외의 사상 계보에 주목한 저작’을 무시한다고 비판한다. 천커지엔에 따르면 거자오광의 비판 대상 설정 방식은 ‘땅에
금을 그어서 그것을 감옥으로 삼고(劃地爲牢)’ 몸을 날려서 돌파하는 시늉을 하는 일이다.
천커지엔은 특히 엘리트 사상과 일반 사상의 구분하는 거자오광의 태도를 비판한다. 이 양분론이 비판의
도마에 오를 수밖에 없는 이유는 거자오광이 이러한 구도를 자주 언급하기 때문이다. 『사상사를 어떻게
쓸 것인가』8장과 9장에서도 마찬가지이다. 거자오광은 『사상사를 어떻게』내내 ‘엘리트 사상’과 ‘일반적 지식’ 사이
구획을 나누고, 후자를 온전한 사상사를 위해 복원해야 할 원초적 자료로 소환해왔다.
8장 ‘무엇이 사상사의 자료가 될 수 있는가’에서 거자오광은 사상사의 자료가
더 이상 엘리트의 경전과 문집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고 선언한다. 그에 따르면 사상사 자료의 범위는 역서歷書, 각종 지침서, 당안檔案, 아동
학습서, 소설에 이르기까지 확장되어야 한다. 이어서
9장 ‘사상사 연구의 시야에서 보는 고고와 문물’에서는 20세기에 일어난 출토문헌의 대거 발굴이 사상사의 불연속성을
해소했다는 언설이 등장한다. 옥 그릇이나 청동기 문양, 고지도와 같은
‘문자 없는 유물’ 속에서 ‘사상적 언어를 재건’해야 한다는 것이 거자오광의 주장이다. 그가 “일반 지식, 사상, 신앙 세계”를 복원해야 한다고 선포한 이래, 8장과 9장은 그 실천 방도를 모색하는 장절로 역할을 다한다.
그런데, 거자오광은 이러한
주장 속에 도사리는 모순적 결론을 예견한다. 8장 말미의 서술을 보자.
[사상사 연구에서 관념의 변화는 이미 과거에는 사용하지 않았던 수많은 것들을 모두 자신의 자료로 삼도록
변화시켰다. ... 지금 나조차도 곤혹스러운 문제는 사상사가 어떻게 자기의 경계선을 확립하여, 한편으로는 다른 역사의 영역을 침범하지 않고 또 한편으로는 자기의 영역을 지키는가 하는 것이다. ... 아무도 사상사란 무엇이며 어떤 범위여야 한다고 규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 무한정 자신을 확장하는 것은 곧 자신을 녹여 없애는 결과를 가져오기 때문이다.] (본문 283~284쪽)
거자오광의 당혹스러움은 다음과 같은 물음으로 치환할 수 있다. “기존 사상사가 바라보지 않던 자료에 주목하여 사상사를 다시 쓴다면, 새롭게
탄생한 ‘온전한 사상사’는 일반 역사와 무엇이 다른가?” 조금 더 노골적으로는 이렇게 질문할 수 있다. “이것저것 다 동원해서
사상사를 서술하려고 한다면, 사상사는 더 이상 분과사分科史가 아닌, 대문자
역사 아닌가?” 거자오광의 사상사 기획은 결국 사상사라는 영역의 소멸로 귀결될 것이다. 이러한 미래를 무의식적으로 목도하고 있음에도, 거자오광은
사상사 다시쓰기 프로젝트를 멈추지 못한다.
‘거자오광식’ 중국 사상사 프로젝트의 동력은 (세미나에서 꾸준히 제기된 바) 중국
사상사라는 명칭 자체에서 온다. 거자오광은 사상사가
온전해야 하는 까닭을 기존의 중국 사상사가 제대로 된 중국의 면모를 드러내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이러한
‘은근한 민족주의’는 9장에서
출토 문헌의 발견을 두고 내리는 평가에서도 여실히 나타난다.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상고 시대의 중국 역사와 사상의 연속적인 의미를 새로이 이해하도록 촉구하고
있다. … 중국학자들은 이러한 발견에 근거하여 중국의 고대와 중세, 근세
지식의 연속성이 우리가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강하며, 이것이야 말로 중국사상사가 가지는 하나의 특징일
수 있다는 사실을 지적한다.]
(본문 294쪽, 296쪽)
나는 거자오광이 고고학 성과를 보고 연속성 운운하는 모습을 어떻게 평가해야 할지 난감한 기분이 들었다. 이 성과가 몇 천년 전 역사의 연속성을 복원할 수 있다는 ‘믿음’에 주목한다면 그의 말은 순진함에 가깝다. 반면 그러한 출토문헌들이 가진 이질적ㆍ예외적 성격을 고려한다 그가 말하는 연속성은 기만이자 선택적 해석에 가깝다. 거자오광 부류는 마왕퇴에서 출토된 도가와 의술에 대한 자료와 곽점 초묘에서 발견된 초기의 『노자』 판본 등을
두고, 중국 지식 세계의 선형적 계보도를 보충할 수 있는 자료라고 말한다. 하지만 또 다른 누군가에게 이러한 예외적 사료의 등장이란 중국 사상 체계의 다원성과 파편성이 입증되는 순간이기도
하다.
잠시 천커지엔의 언어를 차용해보자. 그는
거자오광을 “사상사 국장思想史局長”이라고 비꼰다. 그리고는 덧붙이기를, 거자오광이 ‘지식사’나 ‘고고학’ 등의 주변
자료를 소환하는 것이, 거자오광 자신이 속해있는 사상사국思想史局이라는 상위 부서 주도의 거대 프로젝트
원료로 삼기 위함이라고 쏘아붙인다.
[거 선생이 “엘리트 사상과 일반 사상”, “사상사와 지식사” 등등의 원리를 이용해 구축한 이론의 틀은, 행정 기관의 조직 틀과 극히 유사하다. 사상사는 대국(大局, 상위 부서)이고, 국장은 거 선생이 아닐 수 없다. 지식사는 소국(小局, 하위 부서)이며, 인원은 많지만 급이 낮으니, 리링(李零, 국내에서 『집 잃은 개』 등의 공자 관련 저작으로 유명함)은 그저 국(局) 아래 어느 처(處)의 처장(處長)으로 만족해야 할 따름이다. 시대와 형세가 다르면, 부문 간의 중요성에도 기복과 변화가 있기 마련이다. 문화대혁명 시기
중국 국유 기업에서는 분명 선전처宣傳處가 재무처財務處보다 중요했다. 개혁개방 이후에는, 명백히 재무처가 더욱 중요해졌다. 하지만 문화 시스템 내에서는, 사상사국은 영원히 지식사국보다 중요하다. 계획 경제 시대에는, 부문 간에 서로 왕래가 없었다. 개혁개방 이후에는, 각 부문 간에도 종종 협력 프로젝트가 있다. 협력은 언제나 가장 중요한 대국의 국장이 앞장서기 마련인데, 이번에
거 선생이 지식사까지 끌어들여, 새로운 “사상사의 쓰는 법”을 시도한 것은, 바로 이러한 협력 프로젝트이다. 여기서는 설령 지식 문제가 불거져도, 앞장 서 있는 거자오광 국장에게는
결정하고 처리할 권한이 있다.]
「사상의 근거 없는 오만」
거자오광은 『사상사를 어떻게』 내내 다원성의 증거를 연속성의 증거로 치환해버리는
모습을 보여왔다. 천커지엔의 논의는 거자오광의 근본적 약점을 공격하는 것 아닐까.
거자오광의 태도와 천커지엔의 비판을 보니 『논어』의 한 구절이 떠오른다. “비록 작은 길(小道)이라도
반드시 볼 만한 것이 있으나, 멀리 가는 데는 진흙에 빠질까 두려우니,
군자는 이를 도모하지 않는다.” 이 말은 중국 역사에서 줄곧 회자되어, 글 공부를 하는 사람이 사소한 기예를 다루는 글에 집착하면 안되는 이유를 논할 때 필수적으로 등장한 글귀였다. 거자오광은 서신, 민간의 읽을거리 같은 ‘소도小道’가 당시 사상을 알려줄 수 있기에 ‘볼만하다(可觀)’고 그
가치를 역설한다. 하지만 거자오광은 그 작은 길에 머무르며 진흙탕에 구르려 하지 않는다. 그가 이러한 주변부 자료들을 호명하는 이유는 소중한 건 옆에 있다는 유행가 가사 속 깨달음 때문이 아니다. 그저 ‘위대한 중화민족의 완벽한 사상사’라는 머나먼 여정을 위함이다. ‘사상사 다시 쓰기’라는 그의 해체적 수사를 따라왔던 독자들은, 그 종착지에서 다시 중심으로
향하기를 마주할 뿐이다. 『사상사를 어떻게』를 읽는 일이란, 이
머나먼 길 떠나는 여정의 끝에 오롯이 쓴 맛만을 느끼는 경험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