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없는 중국철학은 가능할까 <사상사를 어떻게 쓸 것인가> 발제문(10~11장)
기픈옹달(zziraci@gmail.com)
보편이 가지고 있는 힘은 마치 강한 체취와 비슷하다. 정작 당사자는 잘 맡지 못하는데 특수에 위치한 사람들은 아주 예민하게 느낀다. 거자오광의 <사상사를 어떻게 쓸 것인가>에서 만나는 불편함도 비슷하다. 그는 '사상사'라는 보편의 문제를 다루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읽으면 읽을 수록 그 앞에 감춰진 '중국'이라는 두 글자가 더 선명하게 도드라진다. 그는 '사상사'를 논의한다고 하나, '(중국)사상사'를 이야기하며 결국 '중국사상사'는 '중국'에 대한 이야기로 귀결되고 만다.
책의 제목 <사상사를 어떻게 쓸 것인가>는 하나의 방법론인 동시에 윤리론이기도 하다. 연구자에게 방법과 윤리는 자주 포개어진다. 주체는 어떻게 대상을 탐구할 것인가. 누구는 객관성을 누구는 주의를 이야기할 것이다. 그러나 그에게는 이것이 흐릿해 보이는데, 거자오광이라는 연구자 주체가 중국이라는 관찰 대상과 잘 구분되지 않기 때문이다. 나아가 대상이 더욱 비대해져서는 주체를 집어삼키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중국사상이라는 하나의 보편으로 집어삼켜진다는 뜻이다.
그는 포스트모더니즘 역사학을 이야기하며 '엄격한 역사학'을 이야기한다. [내가 생각하는 최후의 경계와 한도는 확실히 존재했던 하나의 '과거'가 있음을 인정하느냐 안 하느냐, 그리고 모든 역사학자들의 '서술' 및 '텍스트'가 모두 일찍이 존재했던 '과거'에 의해 제약당해야 함을 인정하는가의 여부다.] 잘 가다 왜 이런 문제로 빠지나 했는데 역시나 하는 예상은 역시나였다. [거대한 은허의 유적지를 보고서도 '은상'과 '하'가 똑같이 존재하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이십사사의 기록을 보고서도 역사상의 왕조는 허구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그는 허구성을 너무 크게 받아들이고 있다. 고대 왕조의 허구성은 엄밀하게 말하면 그 왕조의 객관적 실존 여부보다는 그 존재여부가 큰 상관이 없다는 뜻이다. 없다는 확고한 주장보다 있건 없건 상관없다는 것이고, 더 중요한 것은 그것을 다루는 주체가 그 서사를 어떻게 읽고 해석하고 있느냐의 문제이다. 그렇기 때문에 고고학이라 부르고, 현재로부터 출발해 과거를 해석한다고 말한다. 이런 식의 역사를 이야기하면 종종 어떤 위협감을 느끼는 이들을 만나게 되는데, 이 경우 과거의 연장으로 자신을 정의하고 있기 때문이다. 은상과 하, 그리고 이십사사가 중요한 것은 그 맥락에서 현재를 보기 때문이다. 현재는 과거의 산물이며, 발전이자 계승이라는 식의 생각. 이런 역사적 주체는 과거를 상대적으로 볼 역동성을 상실하고 만다. 따라서 그를 이렇게 비판할 수 있다. 그는 '중국사'를 쓰지 못하고 '중국의 중국사'를 쓸 뿐이라고.
역사가 문학이 되었다고 할 때, 그 배경에는 진리 혹은 실체에 대한 해체가 있다. 즉 주체는 인식해야할 진리가 없다는 생각. 신으로부터 부여받은 이성의 힘으로 탐구할 실체에 대한 의문. 객관의 자리는 사라지고 주관의 자리만 남는다. 지성사로 본다면 신학에서 철학으로 떨어지고 문학으로 떨어진다고 할 수도 있다. 역사가 문학이 되었다고 할 때, 그 배경에는 하나의 역사를 지탱하는 신의 몰락이 함께 이야기 되어야 한다. 포스트모더니즘의 조상격인 유물론자야말로 신을 죽이는데 앞장서지 않았나.
유일신에 대한 관념이 없는 동양에는 진리가 다르게 배치되는 듯하다. 나는 종종 동양의 '국가'가 서양의 신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건 아닐까 생각한다. 신의 능력을 부여받은 이성이 진리를 탐구하는 것처럼, 사가史家는 대체로 철저한 국가의 수족이었다. 역사란 곧 국가의 역사일 뿐이다. 이런 까닭에 왕조의 몰락에 붓을 꺾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익숙하다. 따라서 이렇게 질문해볼 수 있다. 이십사사를 구슬로 꿰어 오늘날 신중국을 말하는 역사가는 과거 한 왕조의 사신史臣, 혹은 사관史官과 같을까? 과거 사람들도 하상주, 아니 더 멀리 황제黃帝로 부터 면면이 이어진 중화中華에 대한 이상이 있었을까?
계보학이 의미있는 이유는 그 뿌리의 계보를 추적해 보여준다는 것이다. 실상이란 그렇게 깊은 뿌리가 아니라는 것. 영원할 것처럼 이야기되는 것도 특정한 시대의 산물이라는 것. 그가 이야기하는 실체적 역사라는 것도 그와 같을 것이다. 과연 사통史通이란 면면이 이어져 내려온 것일까? 객관적 역사라는 것도 따지고 보면 얼마 되지 않을 것이다. 각 사가들은 만세萬歲를 꿈꾸는 왕조에 갇혀 영원이라 상상하는 천하의 일들을 기록했을 뿐이다.
거자오광의 글을 읽으며 중국철학의 혐의에 대해 생각한다. 중국철학이란 결국 중국에 대한 철학이 아니라 중국을 위한 철학이 아닐까 하는 의문. 부지불식간에 중국이라는 보편을 상상하게 만드는 것은 아닐까. 과거 지나학을 두고 '중국 없는 중국학'이라고 손가락질 하기도 했다. 피상적 관찰의 대상으로만 삼았다는 뜻이다. 그 비판에는 서양 혹은 일본의 제국주의적 관점에 난도질 당한 과거가 있다. 그러나 지금 다시 '중국 없는 중국철학'에 대해 묻는 것은 중국이 너무 비대해졌기 때문이다. 안타까운 것은 이것이 단순히 국력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국가가 비대해진다 하더라도 인민人民은 그 비대한 국가를 가슴에 품지 않을 수 있다. 허나 愛中國이라는 훈장이 자꾸 가슴에 어른거린다. 덕분에 '중국 없는 중국철학'을 한번 상상해볼 수 있다. 중화인민공화국을 지운 중국철학, 중화한족을 지운 중국철학, 도통론과 천하관을 지운 중국철학 거기에는 뭐가 남을까? 쉽지는 않겠다. 누군가는 한국이라는 거리감을 인식의 지렛대로 삼으면 될 것이라 할 것이다. 거기에는 또 다른 함정이 있다. 중국을 비판하는 한국은 안타깝게도 소중화로 쉽게 굴러떨어진다는 것. 아뿔싸. 그러다가는 '중국 없는 중국철학'은 커녕 '진짜 중국철학'의 덫에 걸리고 만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