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기

제목[취투북] <달콤 살벌한 한중 관계사> #1 - 중국, 혐오와 이해 사이2021-02-09 19: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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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에서도 읽을 수 있습니다. https://brunch.co.kr/@zziraci/478


COVID-19가 처음 발병할 당시만 해도 우리는 '우한 폐렴'이라는 이름 아래 그 전염병의 성격을 발원지의 특성에 기대어 규정했다. 그러고는 그 지역 시장이 얼마나 비위생적인지 연신 보도해 가며 그들의 '비근대성'을 우리와 구별 짓고 혐오감을 여과 없이 드러냈다. 사실 중국에 대한 이런 혐오감은 갑자기 나타난 것이 아니다. '메이드 인 차이나'라는 저품질 대량 생산의 이미지를 갖고 있지만, 가성비가 좋은 중국 제품에 대해서는 "대륙의 실수"라고 말하지 않는가. 아이러니한 점은 여기에 있다. 우리는 그들을 혐오하고 비아냥거리면서도 동시에 그 '실수'에 열광해 저렴한 가격으로 제품을 구입한다. 

한국 관광 시장의 주요 소비자는 중국인이기 때문에 서울 명동의 상점에는 중국어를 하지 못하는 사람이 없고, 중국 회사의 워크숍을 위해 한강에서 삼계탕 파티를 열어 주기도 한다. 이렇게 우리는 중국을 혐오하고 조롱하면서도 적극적으로 소비하고 있다. 이 모순된 인식은 어디서부터 시작된 것일까. 중국을 통해 선진 문물을 받아들이던 옛날의 우리와 지금 우리의 모습 사이 간격을 메꿔 줄 수 있는 이야기는 어디에 있을까. 이 책은 그 간격을 메꿔 보고자 하는 작은 시도로 시작됐다. (4~5쪽)


착짱죽짱(착한 짱깨는 죽은 짱깨)에서 이제는 '중국 묻었다'는 표현까지 범람하고 있다. 아무래도 중국에 대한 혐오는 늘어나면 늘어났지 좀처럼 줄어들지 않을 것 같다. 대체 이 혐오의 근원은 무엇일까. 중국 탓으로만 돌려버리면 더 이상 할 수 있는 이야기는 없을 것이다. 무엇이 중국에 대한 이해를 가로막고 있을까.


이웃나라 사이에 있는 갈등을 우선 생각해볼 수 있겠다. 지리적으로 가까운 나라치고 친한 나라가 없다는 말이 있지 않나. 오랜 역사를 거치면서 치고받고 하다 보면 정이 들기보다는 악감정이 쌓이기 마련이다. 그러나 오늘날 중국에 대한 혐오는 이와 좀 달라 보인다. 한사군이니, 안시성 전투니, 병자호란이니 하는 것 따위를 떠올리지는 않기 때문이다. 


아무래도 이념 갈등이 커다란 이유 가운데 하나가 아닐까. 오래도록 중국은 중국보다 '중공中共'으로 불리었다. 중국 하면 떠올리는 이미 가운데 공산당, 인민군 따위가 있는 것을 생각하면 한국전쟁이 남긴 상흔이 생각보다 크지 않을까. 이 책의 뒷부분 논의가 기대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러나 보다 깊은 이유는 중국에 덧씌워진 '비근대성'이라는 딱지에서 찾아볼 수 있겠다. 근대국가 성립 이후 오래도록 양국의 관계는 좋을 수 없었다. 이념 대립, 냉전시대의 갈등으로 중국은 이웃나라가 아닌 적국이었다. 1992년 수교 이후 양국 관계는 나아졌지만 여전히 중국은 더럽고 지저분한 낡은 나라라는 이미지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아직도 남아 있는 '쭝국'이라는 호칭은 그 흔적이 아닐까.


헌데 2000년 대 이후 중국은 눈부신 경제 성장을 이루어냈다. 2008년 베이징 올림픽과 2010 상하이 엑스포는 중요한 변곡점이었다. 이때를 좌우하여 중국은 일본의 경제력을 앞지르기 시작했고 약 10년이 지나 지금은 G2로 손꼽히고 있다. 비근대적인 미개한 나라가 어떻게 세계 정상 국가 미국과 비벼본단 말인가. 인식과 현실의 부조화가 혐오를 낳는다.


물론 이른바 중국굴기中國崛起에서 빚어 나오는 여러 잡음도 문제이기는 하다. 그렇지 않아도 커다란 나라인데, 이 커다란 나라가 슬쩍 몸을 움직이니 여러 문제들이 마구 튀어나오는 것이다. 살을 맞대고 있는 바로 이웃한 우리 역시 피해를 입는 일이 종종 있다. 


문제는 이런 경향이 앞으로도 지속되리라는 점이다. 중국 경제 붕괴론이나 중국 분열론이 시중에 떠돌고는 있지만 진지하게 중국을 공부하거나 관찰하는 사람이라면 중국이 쉽게 고꾸라지지 않을 것이라고 전망할 것이다. 앞으로 정치, 경제, 문화 면에서 중국의 영향력이 커지면 커졌지 줄어드는 일은 없을 것이다. 이것이 사람 사이의 관계라면 조금은 나을지 모르겠다. 싫으면 연락을 끊으면 되니까. 바로 이웃이라면? 이사를 가면 된다. 그러나 수천 년 전부터 중국은 우리와 가장 가까운 나라였다.


긍정적이건 부정적이건 중국의 영향력은 앞으로 더 커질 것이다. 그러나 중국에 대한 관심, 이해, 상호 교류가 그만큼 증가할까? 이 격차는 오해와 혐오, 나아가 실제적인 갈등으로도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 물론 시대의 흐름이란 늘 한 방향으로 흐르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갑자기 양국이 우애를 돈독히 하는 특정 사건이 발생하지 않으리라는 법도 없기는 하다.




첫 번째 글, <나무조각에 아로새긴 '공자님 말씀'>은 <논어>가 어떻게 전파되었는지를 추적한다. 워낙 오래되었기 때문에 정확한 전파 경로를 알 수는 없지만 고대 사회에 이미 양국의 문화 교류는 활발했다. 한 무제의 한사군 설치 이후 <논어>가 한반도에 들어왔으며, 출토되는 죽간본, 목간본 <논어>는 이 교류가 상당히 활발했다는 점을 보여준다.


<논어> 죽간이 출토된 평양시 정백동 낙랑구역 일대는 고대 낙랑군의 중심 지역이었다. 더구나 평양은 죽간의 소재가 되는 대나무가 생장할 수 없는 환경이며, 죽간은 중국에서는 흔하게 볼 수 있지만, 한반도에서는 거의 볼 수 없는 서사 재료다. 그리고 죽간이 출토된 정백동 364호분에서는 낙랑군 현지에서 제작된 물건 이외에도 중국 본토에서 제작된 유물이 다수 출토됐다. 이러한 점으로 미루어보아 정백동 3645호분에서 발견된 이 <논어> 죽간은 낙랑군에서 제작된 것이 아니라 중국 본토에서 제작돼 평양 지역(낙랑군)으로 유입된 것이 확실하다고 할 수 있다. (34~35쪽)


지금까지 한•중•일 삼국에서 발견된 수십만 건의 고대 목간 자료 중에 <논어> 만이 유일하게 삼국 공통으로 발견되는 전적 자료라는 점에서, 이는 '동아시아 유교 문화권'의 실체를 상징하는 자료로 평가된다. 중국 문화를 수용해 우리 문화로 정착시키고 다시 일본으로 전파하는 고대 동아시아 한자 문화권의 교류 네트워크가 <논어> 목간을 통해서도 확인되는 것이다. (43쪽)


두 번째 글, <도당 유학생, 한중 우호의 상징>은 당시 세계의 중심, 당나라 장안으로 유학한 신라와 발해인들에 대한 이야기를 담았다. 오늘날도 그렇지만 유학이란 선진문물을 받아들이기 위한 방편인 동시에, 제국이 주변국과 우호를 맺는 수단이기도 하다. 


개방적인 문화 대국을 표방하면서 주변국의 고위층 자제를 숙위학생으로 받아들여 동아시아 질서의 안정화를 꾀했던 당, 강대국 당과의 외교 관계에서 별다른 선택지가 없었던 주변국, 당과 본국의 지원을 받으며 수학할 수 있었던 유학생. 각자 다른 곳을 지향하던 국제 정세 속에서 많은 유학생이 국자감이 있는 당 장안으로 모여들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54쪽)


이러한 골품제의 모순은 두품 출신의 관직 진출에 큰 제약 요건이었다. 그들은 그 제약에서 벗어나는 방도의 하나로 도당 유학을 선택했다. 당에서 선진 학문을 수학하고 이를 바탕으로 당 관직에 진출하고자 했다. 그것이 실현되지 않더라도 당에서 수학한 경력은 본국으로 돌아온 후 관직 진출에 도움이 되기도 했다. (57쪽)


2000년 내가 처음 중국 땅을 밟았을 때만 하더라도 중국은 무엇을 배우러 가는 나라가 아니었다. 그해 6월 김대중 대통령이 평양 땅을 밟았으니, 아직 이념 대결의 이미지가 채 씻겨나가기도 전이었다. 그런데 무엇을 배울까. 중국은 호기심 조차 줄 나라가 아니었다. 30~40년 전 우리나라의 모습을 보고 왔다는 증언이 이어지곤 했다. 


20년이 지나면서 중국 유학생 수는 급격하게 늘었다. 그러나 아직 도당유학생과 같은 흐름은 나타나지 않고 있다. 도리어 그 반대라고 할 수 있다. 우리나라에 유입된 중국 유학생 수가 훨씬 많았다. 한국에서 중국으로 떠난 유학생보다, 중국에서 한국으로 떠난 유학생이 더 큰 꿈을 품지 않았을까. 앞으로  이 유학생들이 양국의 관계에 어떤 영향을 끼칠까 지켜볼 일이다.


다만 책을 읽으며 한국이 중국에 대한 이해보다 중국이 한국에 대한 이해가 더 높다는 사실을 다시 확인하기도 했다. 예를 들어 한중 우호의 상징으로 난징에 최치원 동상이 들어섰다는 것이라던가, 시진핑이 최치원을 언급했다는 점 등. 


그중에서도 백미는 중국의 국가주석 시진핑이 최치원을 수차례 언급하며 한중 교류의 역사성을 강조한 것이다. 2013년 열린 한중 정상회담에서 시진핑은 최치원의 한시 <범해泛海>를 인용하며 한국과 중국 간의 역사성을 강조했고, 또 2014년 서울대학교 특강에서는 최치원을 한중 사이의 상징 인물로 언급했다. 또한 2015년 서울에서 열린 '중국 방문의 해' 개박식 축하 메시지에서는 한중 문화교류는 유구한 역사를 가진다며 최치원의 한시로 알려진 <호중별천壺中別天>을 소개했다. (71쪽)


양국의 관계는 멀어졌다 가까워지는 변화가 있었지만 두 나라의 지리적인 거리는 조금도 멀어지지도 가까워지지도 않았다. 호불호를 떠나 양국 간의 관계에 대해 이해가 필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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