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기

제목[난민] 개방하게 하는 고통과 개방을 철회하게 하는 고통2024-09-06 1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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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민, 난민화되는 삶여는 글-마주침의 한계-접점에서, 1부 전염과 매듭 증언을 듣는 자에 대한 증언

 

2018년 제주도에 온 예멘 난민의 이야기가 알려지기 전까지, 아니 그 이후에도 난민은 나에게 좀 먼 존재였다. 적어도 이주노동자나 장애인, 성소수자처럼 나와 가까이 있는 존재는 아니었다는 말이다. ‘보트피플이라는 단어와 함께 유럽 각국이 난민 문제로 골머리를 앓고 있다는 뉴스를 접할 때나 난민 이야기를 들었을 뿐이다. 제주도의 예멘 난민이 한참 이슈였을 때도 외국인 혐오 문제에 눈길이 가서 난민에 관심을 가지지는 못했다.

 

그러면서도 나는 이 책 난민, 난민화되는 삶을 거의 출간되자마자 구입했다. 팬데믹 초기로 기억한다. 무기력하고 답답하고 어딘가에 갇힌 듯한 기분이 들던 시절이었다. 사놓은 다른 책들처럼 얼른 읽지도 못했다. 나는 이 책에 실린 글 일부를 글쓰기 워크숍의 읽기 자료로 활용하거나, 다른 글에서 인용한 적이 있다. 답답할 때 책을 펼치면 강하고 힘이 실린 문장들이 쏟아졌다. 도저히 맛보기로만 끝날 수는 없는 책이다.

 

궁금하지만 함부로 펼칠 수 없는, 용기를 내야 읽기 시작할 수 있는 책이 있고, 이 책이 그런 책이라고 해 두자. 세미나는 그런 책을 위해 존재한다. 이 책은 애초에 연구재단의 프로젝트로 시작된 책이지만, 연구자들의 글과 활동가들의 말을 적절히 잘 활용했다. 특히 1부는 연구자들이 목격한 활동가들의 고통을 섬세하게 표현한다. 고통은 개방과 확장, 그리고 개방의 철회라는 과정으로 난민과 활동가, 연구자들 사이를 순환한다.

 

우리는 이 책에서 난민과 관련된 직접적이고 자극적인 이야기보다, 난민을 만난 경험을 내부에서 거르며 변형된 활동가를 먼저 만난다. 세심한 전략이다. 난민과 다른 입장을 지닌 이들이 섣불리 난민에 시혜적 태도를 보이거나, 동등한 입장에서 친구가 될 수 있다고 믿는 일은 위험하다. 활동가들의 실패와 시행착오가 그 점을 명확히 보여준다. 이 책을 쓰고 만든 이들은 그만큼 난민 문제에 조심스럽게 다가갈 필요가 있음을 강조한다.

 

우리는 달팽이를 관찰하고 그의 말을 듣는다. 달팽이는 난민을 만났던 활동가이다. 왜 난민 활동을 하느냐는 질문에 답하지 못했던 활동가. 자신이 보았던 이들의 고통에 자신이 관련되었다고 느낀 달팽이는 고통에 전염되었다. 자신이 가해의 입장에 섰다고 느낌으로써 고통을 통해 그들과 연결된 달팽이는 사실 어릴 때부터 어떤 장소를 찾는 이였다. “어떻게든 담길 수 있는 공간이나 마음을 놓을 수 있는 단 한 사람과의 관계가 존재의 장소라고 믿는.(41)

 

고통의 전염으로, 고통스러운 존재에게 연결되는 기쁨으로 자신을 개방했던 달팽이는 어느 순간 개방된 자신을 닫아버리려 한다. 개방의 이유가 고통이었듯, 개방을 철회하려는 이유도 고통이다. 축적된 실패의 경험은 교훈을 남긴다. 난민과 자신 사이에도 공간을 두는 것. 난민 스스로 말하고 결정하게 만드는 사이-공간이 필요하다. 활동가는 전지전능하지 않다. 난민을 단일한 집단으로 보거나 정형화된 이미지에 가두지 않으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난민들이 겪는 폭력은 우리 사회의 과중한 폭력을 그대로, 혹은 중첩하여 보여준다. 성소수자, 장애인, 이방인에 대한 혐오와 차별은 우리 사회의 구성원들이 서로를 어떻게 대하는지를 보여주는 척도이다. 노동의 쓸모를 인정받아야만 하는 존재, 사회의 도덕 기준에서 조금이라도 어긋나면 용납될 수 없는 존재, 가부장적 혈연관계를 중심으로 철저히 구분되는 내부와 외부의 존재들. 우리는 서로를 그렇게 바라본다.

 

한편으로 달팽이가 자신을 가해자의 입장으로 인식하면서 그들의 고통에 개방되었다는 사실에 주목하게 된다. 일본 학자 중에 제국주의 가해자 입장에서 역사를 재해석하는 이들이 있다. 조선이 일본의 식민지가 된 후 고향을 떠나 국적 없이 세계를 떠돌았던 이들, 전쟁이 끝난 후에도 고향에 돌아가기를 꺼렸던 위안부들 역시 그들에게는 난민으로 보인다. 우리는 난민과 거리가 먼 존재가 아니며, 언제든 난민이 될 수 있는 이들이다.

 

이 책의 내용들을 야금야금 접하면서 나는 뉴스를 비롯한 여러 텍스트에 등장하는 난민의 이야기를 더 자주 목격하게 되었다. 마블 영화와 드라마에 등장하는 우주 난민 스크럴, 전쟁에 징집되지 않기 위해 국경을 넘어 탈출하는 러시아의 소수민족 청년들, 그 밖에도 유색인종과 제국주의 피해자들의 서사에는 언제나 난민의 역사가 겹쳐있음을 이해하게 되었다. 더 자주 목격하게 되었다는 말은 적절하지 않다. 나는 이제 그 문제를 알아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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