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기

제목[자본] 분업과 매뉴팩처 - 자본의 진화와 노동의 퇴화2024-09-09 09: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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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클럽 자본 7 거인으로 일하고 난쟁이로 지불받다

1 착취의 진보

2 ‘함께의 착취

3 손이 된 인간 - 매뉴팩처의 노동자들

4 사회적 분업과 매뉴팩처 분업 그리고 자본주의

 

가치는 인간의 노동에서 생겨난다. 노동시간을 늘릴수록 잉여가치도 늘어난다. 그러나 노동시간에는 한계가 있다. 자본가는 노동의 양적 증가 말고 질적 증가도 꾀해야 한다. 필요노동시간이 고정되어 있다고 보고 노동시간 자체를 늘려서 양적으로 얻는 잉여가치를 절대적 잉여가치라고 한다. 필요노동시간을 줄이는 방식으로 노동생산성을 높여 노동가치를 하락하게 하면 자본은 상대적 잉여가치’를 얻을 수 있다.

 

상대적 잉여가치를 얻기 위해 자본가는 작업장에 협업을 도입하고 기계를 활용한다. 협업은 자본주의 이전에도 존재했으나, 자본주의적 생산에서 더욱 잘 활용된다. 자본주의 생산양식의 기본 형태는 협업이다. 협업을 통해 노동자는 여러 개의 손과 발, 눈을 가진 거인이 된다. 협업의 결과물은 각 인원이 만들어낼 수 있는 결과물의 합계를 넘어선다. 자본가는 여기서 나온 잉여가치가 감독노동(지휘/통제)의 결과물이라고 주장한다.

 

마르크스는 자본주의적 생산의 시발점을 16세기로 보는데, 이 때의 방식이 매뉴팩처이다. 매뉴팩처는 분업에 기초한 협업이다. 독립된 수공업자들이 모여 각각 공정에 참여한다면 이종적 매뉴팩처가 되고, 동일한 업종의 수공업자들이 모여 작업을 세분화한다면 유기적 매뉴팩처가 된다. 매뉴팩처에 종사하는 이들은 수공업자에서 점점 자본가에게 고용한 노동자가 되어가고, 거인노동자로 탄생하기 위해 존재론적 변형을 겪는다.

 

독립된 수공업자로서 전제 작업을 자신이 통제하며 생산하던 이들은 매뉴팩처 시대를 거치면서, ‘전체노동자가 아닌 각 공정의 한 부분만을 담당하는 부분노동자가 된다. 한 영역의 전문화는 다른 영역의 무능화로 나타난다. 특정 작업장을 떠난 노동자는 무능해지기에 더욱 자본에 종속되기 쉽다. 매뉴팩처 시대의 노동자는 존재론적 축소를 겪으면서, 기형화된다. 자본이 진화하는 과정은 노동이 퇴보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결국 매뉴팩처는 기관이 인간인 하나의 생산 메커니즘이다.(136) ‘메커니즘이라는 말도 매뉴팩처 시대에 탄생한 말이다.(136) 매뉴팩처는 메커니즘에 따라 노동자들을 배치하고, 배치에 따라 노동은 세분화된다. 고급노동과 복잡노동, 저급노동과 단순노동이 구분되며 노동의 등급도 고착화된다. 매뉴팩처에서 미숙련공은 일시적이 아니라 항구적으로 미숙련공이다. 자본가에는 이런 분할과 등급의 고착화가 큰 이득이 된다.

 

분업은 매뉴팩처에서만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애덤 스미스 같은 정치경제학자는 사회적 분업에도 관심을 가졌다. 마르크스는 애덤 스미스를 비판하면서, 사회적 분업이 과거의 생산방식을 발전시킨 것이 아니라 파괴하고 해체했다고 주장한다. 마르크스에게 분업은 곧 대립과 착취의 문제와도 연결된다. 마르크스는 도시와 농촌의 분리와 대립을 중요하게 보는데, 서양과 동양의 관계도 이와 유사한 면이 있다.

 

사회적 분업과 매뉴팩처의 분업은 긴밀하게 연관되며, 서로 전제하고 촉진하는 관계이다. 그렇다고 둘을 같이 볼 수는 없다. 사회적 분업이 상품이라는 사슬로 묶인다면, 매뉴팩처의 분업은 자본가의 고용으로 묶인다. 사회적 분업에 우연과 자의성이 개입하면서 균형을 찾아간다면, 매뉴팩처의 분업에서는 자본가의 계획이 중요하다. 자본가는 이 계획을 위해 사회의 규제에 반대하며 작업장에서 명확한 권력을 행사하려고 한다.

 

매뉴팩처의 분업을 통해 노동자는 부분노동자화혹은 불구화(장애화)’한다.(171) 노동자의 생명력은 질적으로 소진되며, 신체의 불구화와 정신의 우둔화가 동시에 나타난다. 정신적 능력은 자본가 혹은 관리자에게만 요구되며, 노동자의 생각은 오히려 작업에 방해가 되기 때문이다. 20세기의 프레더릭 테일러 같은 이들은 과학적 관리법이라는 시스템을 도입하며, 노동자들을 규제하고 장악하기 위해 더욱 노력했다.

 

매뉴팩처 시대로부터 내려오는 자본가들의 이런 방식은 과연 성공했을까? 그렇다고 할 수 있겠다. 대부분 부분노동자로 살아가는 우리 시대 노동자들이 흔하게 겪는 무력감과 우울, 자기효능감의 상실을 돌이켜볼 때 그렇다. 그러나 한편으로 그런 증상은 바로 우리가 부분노동자의 삶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다는 말이 아닌가. 우리는 자꾸만 생각을 버리지 못하고, 자신이 누구이며, 지금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를 묻는다.

 

저자는 책의 마지막에서 카프카의 소설 <학술원에 드리는 보고>에 나오는 원숭이 페터를 언급한다. 인간을 조롱하며 인간에게 당한 학대를 고발하는 원숭이 페터. 우리 노동자들에게서 페터와 같은 끈질김, 영악함, 겉으로는 어떨지 몰라도 마음 깊은 곳에서는 절대 복종하지 않으려는 태도를 찾는 일은 어렵지 않다. 자본가는 노동자를 원숭이나 기계로 취급하려 하지만, 우리는 원숭이나 기계마저 순순히 복종하지 않으리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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