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클럽 자본 11 노동자의 운명》 1 노동자계급의 운명 2 빈민의 노동은 부자의 보물광산 3 자본구성의 변화와 노동자의 축출 4 자본주의 시대의 인구법칙과 잉여노동자 자본의 비밀을 풀어가던 마르크스의 이야기는 이제 다시 노동자에게로 향한다. 노동자 개인이 아닌 노동자계급에 관한 이야기다. 저자의 말에 오래 귀를 기울였기에, 우리는 이제 마르크스가 왜 노동자 개인이 아닌 노동자계급에 관한 이야기를 시작하려 하는지를 이해할 수 있다. 저자의 말대로 《자본》은 노동자의 불운한 삶을, 개인의 차원이 아니라 계급의 차원에서 말하는 책이기 때문이다. 노동자는 노동자계급에 속한 개인이다. 또 마르크스가 노동자계급의 운명을 말하기 전에 자본의 비밀을 밝혀야 했던 이유는, 노동자계급의 운명이 자본의 운동에 종속되어 있기 때문이다. 개별 자본가와 고용계약을 맺지 않았을 때조차 노동자 개인의 운명은 자본의 운명에 종속된다. 그 운명으로 인해 노동자는 사악하고 탐욕스러운 개별 자본가의 행위로 인해 불운해지는 것이 아니라, 자본축적에서 일반적으로 쓰이는 방법들로, 전혀 불법이 아닌 합법적 행위들로 불운해진다. 이 불운은 자본의 축적이 고도화됨에 따라 짙어진다. 마르크스는 생산과정에서 자본을 두 가지로 분류하는데, 바로 불변자본과 가변자본이다. 불변자본이 생산수단이라면, 가변자본은 노동력이다. 불변자본과 가변자본의 비율을 자본의 구성이라고 하면, 자본축적은 자본의 구성을 변화시키며 진행되고 또 자본축적에 따라 자본의 구성이 변화한다. 특히 사회의 총자본 구성을 보여주는 자본의 구성을 ‘유기적 구성’이라고 부른다. 문제는 자본의 구성에서 자본축적에 따라 가변자본, 즉 노동력의 비율이 점점 줄어든다는 데 있다. 노동생산성의 상승은 그 자체로 노동수요를 감소시키고, 이를 통해 축적된 자본이 기계를 도입하여 불변자본의 비율을 늘리면 줄어든 노동수요는 더욱 감소한다. 개별자본가의 상황을 넘어 업계 전체에서 불변자본 비율이 상승하면서 노동수요 감소는 가속화된다. 수요만 감소하는 게 아니라 기존의 노동자도 언제든 고용에서 벗어날 수 있다. 우리는 마르크스가 여기서 복잡하게 설명하는 상황이 무슨 상황인지 안다. 어려운 개념이나 상황을 가정하여 상상하지 않고도 바로 나와 내 가족이 겪어온 일들이기에 마르크스가 무엇을 설명하는지를 안다. 자본은 축적과 집중을 통해 고도화되면 될수록 노동자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고용된 노동자는 피로에 시달리고, 고용되지 않은 노동자는 빈곤에 시달린다. 노동자계급은 각자의 고통 속에서 개별화된다. 자본은 자본을 축적하고 집중할 뿐 아니라 빈곤도 축적한다. 임금노동자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이들이 증가하고, 이들 중에서 현재 임금노동자로 살아가지 못하는 집단도 증가한다. 바로 마르크스가 산업예비군이라 부르는 이들이다. 이들은 생산에 참여하지 않지만, 자본을 통해 생산되며, 특히 자본의 재생산을 위해서는 꼭 필요한 존재들이다. 저자는 여기서 마르크스의 논의를 넘어 가사노동자 등을 포함하여 더 많은 존재들의 증식을 읽어낼 필요가 있다고 강조한다.(45쪽) 우리는 이 빈곤의 사슬에 익숙하다. 또한 이 빈곤이 우리 자신으로부터 비롯되었다고 자책하는 일에도 익숙하다. 노동자 수가 너무 많아서 고용되지 못한다는 생각, 개인의 능력이나 노동할 자질이 부족하여 고용되지 못한다는 생각은 언제나 우리를 사로잡고 있다. 마르크스는 그런 생각이 전적으로 오해임을 밝히고, 왜 노동자들이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는지 잘못된 사실을 퍼트린 이들을 고발하며 그들의 오류를 조목조목 반박한다. 맬서스는 노동자들이 품행과 무능력으로 빈곤을 재생산한다고 비난하며 훈계하려 든다. 그러나 인구를, 더 정확하게는 노동해야만 먹고 살 수 있는 인구를 늘린 이들은 누구인가. 게으른 빈민들이 아이를 너무 많이 낳아서가 아니다. 자본은 생산의 탄력성을 위해 잉여노동인구를 유지하면서 점점 더 적은 수의 노동자를 고용한다. 잉여노동인구는 노동자들이 낳은 아이들이 아니라 자본이 낳은 아이들이다. 맬서스의 편향된 이론, 노동자계급을 통제하고 압박하려던 말을 우리는 많은 정치인, 학자, 종교인에게서 지금도 듣는다. 이미 지친 우리에게 능력을 키우기 위해 더 노력하라고 권하며, 성실과 순종을 강요하는 이들 앞에서 많은 이들이 아직도 자책과 함께 위로와 용기를 구한다. 누군가는 21세기에 마르크스를 읽는 이들을 비웃으며 이유를 묻는다. 나 역시 위로와 용기를 얻기 위해 마르크스를 읽는다고 말하면 그들이 믿어 줄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