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청문학강의_이탁오, 진계유] 산꼭대기에서, 저잣거리에서 에레혼 인간은 다 모순덩어리라는 말을 좋아한다.
저 문구에서 풍기는 염세적 뉘앙스 때문은 아니다. 상충되는 요소의 공존이 사람다움의 방증이라는
생각 때문이다. ‘무단횡단 하며 쓰레기 줍는다’는 농담이
괜히 존재하는 건 아니다. 이런 취향(?) 때문일까. 누군가의 모순적인 면모를 발견할 때 가식적이라며 비난을 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사실은 언제나 놀랍다. 관건은 모순에 있지 않다. ‘내가
그 사람의 모순마저 품을 수 있는가’ 하는 질문에 대한 반응이 중요하다. 그것이 의외의 면모로 보이고, 매력적으로 느껴진다면 사랑이다. 도저히 내가 품어줄 수 없는 모난 구석이라면 이제라도 알게 되어 다행이라 말하며 돌아서면 그만. 밑지는 장사는 아닌 셈이다. 이탁오와 진계유에 대해 이야기하려고 긴 서두를 읊었다. 《명청산문강의》의 처음 두 챕터를 읽고 든 감상은 ‘거슬리지 않는
모순’으로 축약 가능하다. 누군가는 이탁오가 충분히 이단적이지
않아 아쉽다고 할 테고, 또 다른 누군가는 진계유가 거짓된 은자隱者라며 실망할 테다. 하지만 나는 그런 모순되는, 혹은 이중적인 면모가 명나라 문인들의 특성이라고 본다. 명대의 문인들이
다양한 정체성을 가지는 것은 비단 이탁오와 진계유의 사례만은 아니다. 관료, 소설가, 시인, 화가, 상인, 도서 편집자, 평론가(평점가), 서당 선생 등등. 저런
직업군 가운데 두 세 가지 이상 항목에 걸치지 않은 명나라 사람을 찾는 일이 더 드물다. 중국 고대 사회에서 정체성의 혼재는 익숙한 모습이다. 거칠게 예시를 들어보자면, 삼국지로 익숙한 조조 역시 작가로서 이름을
날린 인물이고 소동파는 조정 대신이면서 동시에 시인이자 산문 작가였다. 하지만 명대 이전 인물들의 혼재된
양상은 ‘충분히 혼재 되어있지 않다.’ 사마천, 조조, 두보, 소동파
등의 인물은 관료 정체성을 한 축으로, 작가 정체성을 다른 축으로 한 사분면 안에 배치시킬 수 있다는
말이다. 명나라 이후부터는 이야기가 달라진다. 명대의 글
쓰는 사람을 규정하기 위해서는 더 많은 축이 필요하다. 심지어 ‘관료인가’ 하는 판단 기준은, 명나라가 들어서고 나서 인물 정체성의 중요 잣대가
아니게 되었다. 과거 제도의 체계화는 낙방자들을 양산했다. 시험에
통과한들, 관직을 얻고 승진하는 일은 별개의 문제였다. 이런
상황에서 녹봉 받는 직업만을 목표로 삼는 것은 바람직한 미래 설계와는 거리가 멀다. 유연한 자기 브랜딩은
명대 문인들의 생존전략이었다. 그러니 산인山人이니 상인商人이니 하는 구분에도 너무 깐깐한 잣대를 들이댈 필요가 없다. 저
분류 또한 당시 문인들의 브랜딩 일환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탁오와 진계유는 이 분류법으로 보면 극명한
차이를 보인다는 점에서, 산인과 상인의 변증법은 명대 문인을 이해하는 도구가 될 수 있다. 명나라 말기 소품을 이야기하다 보면 늘 이지와 진계유를 함께 거론하게 됩니다. 만약 꼭 두 사람의 차이를 말하라고 한다면 나는 한 사람은 선정禪定에 들어서 느끼는 기쁨을 이야기하는 투사━도학을 반대하는 이지의 주장의 배경에는 왕학王學 좌파의 영향도 있고 불학佛學에서 발전하여 나온 표현방식도 있습니다━, 다른 한 사람은
고요함과 한적함을 이야기하는 산인이라고 말할 것입니다._본문 75쪽 천핑위안은 진계유를 산인으로 분류할 뿐,
이탁오에게 따로 상인이라는 타이틀을 붙이지 않는다. 하지만 나는 이탁오가 느슨한 기준으로
볼 때 상인 카테고리에 포함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탁오는 중국 남부의 도시 췐저우泉州
출신이다. 이곳은 11세기부터 중국 해상 무역의 거점이 되었던 도시이다. 이탁오의 조부 역시 무역에 종사한 인물이라고 한다. 이러한 배경
지식을 알고 보면 이탁오를 ‘상인의 집안에서 태어나 산인의 삶을 산 작가’라고 지칭하는 것도 무리는 아닌 듯하다. 반면 진계유는 ‘산인의 이야기를 쓰지만 누구보다 상인의 삶을 산 작가’쯤 되지 않을지. 《명청산문강의》의 저자 천핑위안은 두 사람이 같지만 다른 삶을 살았다는
점에도 주목한다. …이지가 ‘이인’을 표방한 것은 전통적인 ‘중도中道’와 대응시켜 말한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그는 ‘이인’을 사회의 일상적 규범을 아랑곳하지 않는 영웅, 호걸, 오만한 사람狂者, 요사스러운 사람妖人 등으로 해석했습니다. 그래서 사상사나 문학사를 연구하는 학자들은 일반적으로
‘이단’이라는 측면에서 이지를 논합니다. 이지가 봤을 때 가장 최악은 우유부단하거나 위선적인 태도였습니다. (중략) 하지만 진계유가 ‘새로운 것을 표방하는 것은 또 다른 길입니다. 그 역시 ‘다름異’을 말하기는 하였지만, 그가 말한 ‘다름’은 그저 일반사람과 다르다는 것입니다._본문 76-77쪽. 이탁오의 글은 온건함과 정반대에 있다. 문제적
인물이라는 키워드로 유명해서인지, 이탁오가 우유부단함과 위선적인 태도를 싫어한다는 설명은 그리 어색해
보이지 않는다. 다만 그의 글을 모아놓은 《분서》나 《장서》를 보면 당시 고위층이 이탁오를 눈엣가시로
여긴 연유를 알 수 있다. 그의 ‘미친 소리’는 범부凡夫의 논리로는 이해할 길이 없다. 상대방을 제대로 자극하려면
완전히 뒤틀린 소리를 할 줄 아는 과단성이 필요하다. 동시대 지식인들이 팔고문(과거 시험의 답안지가 지켜야 할 문체)의 후진성을 비판하기 위해 진한시기와
당송시기 문체 중 어떤 것을 본받아야 하는가 논의하고 있을 때, 이탁오는 과거의 문풍을 베끼느니 차라리
팔고문이 낫다는 주장을 설파하는 모습을 보라.(본문 69쪽) 그는 항상 자신을 추종하는 사람들 틈에 있었지만 동시에 자신을 이해해주는 이 없어 산인처럼 외로울 수밖에 없었다. 그에 반해 진계유는 온건함을 무기로 글을 써 내려간 인물이다. 진계유의 글은 어디서 본 듯한 문장과 익숙한 주제 의식으로 점철되어 있다. 이탁오가
진계유에 대해 평가한 바는 전해지지 않지만, 아마 진계유의 글은 이탁오 같은 인물들이 가장 경시하는
문장이었으리라. 명대 말기에 유행하는 문장은 작가의 소소한 삶을 전시하는 내용이었다. 중국 문학사에서 이런 사적인 글은 글로 취급조차 받지 못했기에, ‘소품문’이라 불리는 장르가 처음 등장했을 때는 분명 파급효과가 컸다. 그러나
이런 문체의 유행이 지나치면, 결국 작가의 소소한 삶이란 흔해 빠진 소재가 된다. 진계유는 이런 뻔한 글로 밥벌이를 하며 관직에도 진출하지 않은 인물이다. 후대
독자들이 진계유 글에서는 풍기는 유유자적은 철저하게 계산된 감성이다. 두 사람을 비교하며 발견할 수 있는 또 다른 재미있는 사실은, 진계유와 이탁오 모두 자신의 글쓰기 방식이 지닌 특성을 명확하게 파악했다는 점이다. 진계유의 글은 후대 사람들에게 시덥지 않은 글로 취급되었지만, 그는
누구보다 자신의 저술이 동시대인들에게 각광을 받으리라는 믿음을 지녔던 듯하다. 차에 대한 취향, 고급 물건에 대한 애호, 수집벽 등은 명대 말기 문인들의 주된 글감이었다. 이는 당시 독자들이 상류층 문화에 동경과 호기심을 품고 있었다는 사실을 대변한다. 진계유 역시 이런 소재로 산문 창작을 했는데, 만일 수용자층의 기호를
맞출 생각이 없었다면, 그가 전업 작가의 삶을 영위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이탁오 역시 다른 방향으로 자신의 글이 가진 파급력을 인지하는 인물이었다. 자신에 대한 객관적 성찰이 되지 않는 인물이라면 “태워야 하는 책(《분서》)”, “묻어야 하는 책(《분서》)”으로 자신의 저서를 명명할 수 없다. 역설적이게도 이탁오의 책은
청나라 때 금서로 지정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이들에게 회자되었다. 살아 생전 사랑받는 작가가 될 것인가, 사후에 명작가로 인정받을 것인가 하는 선택지에서 후자를 쉽사리 선택할 인물은 없다. 하지만 이탁오는 구차하게 누군가의 취향에 맞추는 글을 쓸 성정이 되지 못했고,
이후에는 그 줏대조차 개성의 발로로 인정받을 수 있었다. 명대 문인들의 글이 하나같이 괴팍하고 튀기 위해 애쓰는 문장이라는 평가는
얼마나 대상을 납작하게 만드는가. 천방지축이라고 다 같은 천방지축이 아니다. 청대 문인에 대한 박한 평가도 마찬가지이다. 엄숙하고 고고한 학자의
글이라 해서 다 같은 ‘궁서체’가 아니라는 말이다. 《명청문학강의》를 통해서 내가 품을 수 있는, 혹은 품고 싶은 모순을
지닌 작가 한 명을 고르는 것도 재미있는 독서 경험이 되리라는 생각이 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