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기

제목[기술/철학] 테두리 바깥의 독자2025-03-04 12: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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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에서의 기술에 관한 물음》 5주차 발제

테두리 바깥의 독자

에레혼

 

 

글을 쓸 때 최대한 피하려는 상황이 있다. ‘우리라는 단어를 주어로 쓰는 상황이다. 더 정확히는 우리로 시작해서 하자로 끝나는 문장들. 그리고 여러 사람을 한 집단에 묶어서 지칭하는 의미의 우리라는 표현도 사용하지 않으려 한다. 우리라는 표현을 어쩔 수 없이 써야 하는 상황이면 단어를 썼다 지웠다 반복하기 일쑤다. 그만큼 낯간지러운 표현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육후이의 《중국에서의 기술에 관한 물음》을 읽을 때 불편했던 점이 여기에 있다. 육후이는 우리를 참 좋아한다. 책에서 하도 우리를 부르짖길래 번역자들이 필요 없는 단어를 기입한 것이라고 여겼다. 하지만 영어 원문에도, 중국어 번역본에도 ‘We/이란 단어가 수차례 등장한다. *영어는 1,446, 중국어는 538

육후이가 반복적으로 사용하는우리는 단순한 습관적 표현이 아니다. 앞서 말했듯우리라는 단어의 사용에는 독자를 논의 속으로 포섭하려는 의도가 숨어있으므로. 독자들은 이 문제의 당사자가 되거나, 혹은 소외되는 입장을 취할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육후이가 말하는우리는 누구를 포함하고, 누구를 배제하는가? 그는 누구에게 이 책을 읽고근대적 무의식을 자각하라고 촉구하는가? 육후이가 자신의 논의로 끌어들이는 이들은 누구인가? 그는 누구에게 촉구하고 있는가?

그런데, 우리가 누구든, 육후이의 논의에서 빠지고 싶은 심정이었다. 책을 읽는 내내 소외되는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저자는 《중국에서의 기술에 관한 물음》이 서구 근대성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실마리가 되리라고 굳게 믿는 듯하다. 따라서 이러한 문제 의식에 공감해줄 누군가가 육후이가 부르짖는 우리가 될 수 있다. 그건 서구 근대성이 문제라고 여길 당사들, 즉 서구의 독자들일 수 있다. 혹은 이미 서구처럼 변해버린, 자본주의의 첨단을 달리는 중국 사회의 독자들일 수도 있다.

누군가는 그 우리라는 표현 속에 한국인 독자들도 포함될 수 있다고 말할 테다. 내가 그 우리에서 빠지고 싶다고 하는 건, 한국이 근대성 문제에서 자유롭다는 의미가 아니다. (오히려 반대로 한국인으로서의 정체성만 놓고 보면 근대성 담론에 더더욱 매달려서 자아 성찰을 해야 하지 않을까?) 하지만 저자가 원치 않는다면? 책을 읽으면 읽을수록 육후이가 아시아/동양이라는 표현을 의식적으로쓴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중국에서의 기술에 관한 물음》에서 동양의 코스모 테크닉스할 때의 동양이란, ‘19세기 말엽 아시아가 마주한 서구 문명할 때의 아시아란 명백하게 중국이라는 느낌을 받는다.

현란하게 펼쳐지는 서구 지성사의 계보 속에, 혹은 다소 헐겁게 이어지는 중국 철학사에 대한 논의 가운데 내가 독서 효용감을 느끼지 못하는 중이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육후이는 21근대()과 테크놀로지-의식을 지나며 논의를 확장한다. 기술적 무의식은 서구의 특수한 문제로 남아 있는 것이 아니라, 근대성이 확산된 모든 곳에서 작동하는 기제로 이해될 수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육후이는 《메논》의 예시를 소환한다.(본문 297) 《메논》에는 수학적 지식이 전무한 노예 소년에게 소크라테스가 정사각형의 넓이에 관한 문제풀이를 스스로 할 수 있도록 돕는 에피소드가 등장한다. 육후이는 기술이 어떻게 시간성을 지탱하는 방식으로 작동하는지를 설명하기 위해 《메논》에서의상기개념을 끌어온다. 노예 소년이 넓이 개념을 깨우치는 상기 과정에는 공간적 보완(공간적 대리보충물)’이 포함되어 있지만, 플라톤은 상기만을 강조한다. 육후이는 이러한 억누르기가 근대 그 자체라고 말하는 듯하다. 근대는 기술을 직접적인 주제로 삼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근대적 개념과 지각을 형성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해왔다.

이러한 기술적 무의식이 과연 단순히 서구의 문제일까? 육후이는 이 물음을 넌지시 독자들에게 되돌려준다. 그는 기술적 무의식이 근대화가 일어난 모든 곳에서 동일한 방식으로 작동하며, 이를 자각하는 것이야말로 근대성을 넘어설 수 있는 중요한 과제라고 주장한다. , 이 논의는 서구의 특정한 역사적 과정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직면한 문제라는 것이다. ‘우리라는 마법의 단어는 지구의 크기만큼이나 그 영역을 확장할 수 있게 되었다.

이처럼 새로운 조건은 이 문제에 대한 어떤 선택도 없이 지구 전체에 의해 공유되고 있다. 마치 중국인들이 근대화동안 전통적 가치들을 지키려고 시도했듯이 심지어 아마존 밀림에서도 자신들의 문화를 고수해야 하는 운동―예를 들어 비인간들에게도 권리를 부여하고, 전통적인 문화 실천을 보존하는 운동―이 존재할 정도이다.(본문 299)

아마존 밀림이라는 공간까지 동원한다면, 이 책을 읽는 누구라도 우리에 포함되는 처지에 놓일 수 있다. 그는기술적 무의식이라는 개념을 통해 동양(특히 중국) 역시 서구 근대성의 문제에서 자유로울 수 없음을 논한다. 그리고 근대성의 그림자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반드시 이 무의식을 자각해야 한다. 그동안의 논의에서 팔짱을 끼고 있던 나의 태도 역시 (육후이의 논리를 확대 적용하면) 근대적 무의식의 작용인 셈이다. 2부를 지나며 육후이는 선각자로 거듭나는 듯하다. 독자들에게 무의식을 자각하라고 끊임없이 촉구하는 선각자(프로메테우스).

이제 《중국에서의 기술에 관한 물음》의 논의는 서구권의 독자들이나 중국인들에게만 향하지 않는다. 책 읽는 과정에서이런 서구 개념이 중국에 없는 게 뭐가 문제야?”라고 내뱉던 볼멘소리조차도 한낱 무의식적 반응에 지나지 않게 되어버렸다. 책을 읽는 줄곧 육후이가 스스로의 위치를 서구 철학을 동양에 전파하는 포스트 모종삼으로 설정한다고 여겨왔다. 이러한 예측은 2부의 선언들을 지나며 무너진다. 육후이는 서구 독자들에게 동양 철학 가이드로서, 동양권 독자들에게는 경고의 역할을 한다.

그럼에도 여전히 의문이 남는다. 육후이가 말하는우리에 아시아 전체가 포함될까, 하는. 우선 '우리'에 대한 범주 설정을 중국으로 한정하고서 이야기해보자. 기술적 무의식에 대한 자각은, 충분히 근대화되지 않은 지역의 사람들에게도 반드시 필요한가? 그렇다고 대답한다면 육후이의 우리가 그리는 중국은 지금 실제하는 중국보다 더 균일한 형태의 중국이 되리라. 신장이든 윈난이든 광동이든 할 것 없이 모든 지역이 한족-중원 지역-1선 도시처럼 변화해야만 근대화를 통한 무의식의 축적이라도 달성할 수 있을테니 말이다.

혹은 이 우리에 대해서, 문제의식을 공유해야 하는 대상의 범위에 대해서, 더 확장된 영역을 상상해볼 수도 있다. 중국 대륙보다 더욱 폭력적인 방식으로, 흔히 식민지 근대성이라 불리는 방식으로 근대화를 경험/자각한 사람들 역시 예외 없이 이런 무의식을 마주해야 하는 것일까? 독자들은 육후이의 논의를 따라가다 보면 중국 중심의 근현대사를 경유해야만 한다. 서구 독자들에게는 새로운 지식을 얻는 흥미로운 과정일 수도 있을 터. 그러나 육후이의 간략한 서술에서 아시아 내부의 이질성은 자연스레 배제된다.

쭉 적다 보니, 아무래도 육후이가 이야기하는 우리에서 한국인은, 적어도 나는 빠져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서비교의 논의에서 양쪽 지역을 각각 한 데 묶어서 논의를 진행하는 방식은 우리의 부피 팽창을 초래한다. 마이너가 메이저로 편입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대안을 위한 논의에서도 여전히 마이너 취급을 받는 처지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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