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리학이 잃어버린 여성 5장과 6장에서는 갈릴레오 갈릴레이, 아이작 뉴턴, 임마누엘 칸트를 축으로 해당 시기 과학과 종교의 관계에 관해 이야기한다. 시기에 따라 과학과 종교는 갈등하거나 연대하며 관계가 계속 변화한다. 이는 나아가 여성과 과학의 관계, 권력구조에까지 영향을 끼친다. 5장과 6장의 내용을 따라가다 보면 자연스럽게 저자가 강조하며 따옴표 처리를 한 “자연적인”, “자연적으로”에 관해 생각해보게 된다. 우선, 과학과 종교의 관계에 관해 정리해 보자. 데카르트의 물질관은 과학과 종교가 별개의 분야로 나뉠 수 있으며, 각 분야에서 상호 독립적으로 추구될 수 있다고 믿었다. 이는 자연의 본질에 관해 잠재적 갈등을 일으켰다. 과학과 신학은 제각기 자연에 관해 주장하고 있었고, 더욱이 유기론의 대안으로 기계론자들의 세계상을 받아들이면서 자연 인식에 관해 상호간의 협의가 필요한 문제였다. 따라서 과학과 신학 각각은 대립의 각을 세울 수 밖에 없었다. 이런 사건 중 가장 악명높은 사건이 갈릴레오 갈릴레이의 재판이다. 갈릴레이는 광학경, 오늘날의 망원경으로 천체를 관찰하게 된다. 갈릴레이는 목성의 위성 네개와 금성의 위상이 변하는 것을 발견했다. 이를 증거로 코페르니쿠스의 이론을 지지하기 시작했고, 갈릴레이는 메디치가의 후원과 명성을 등에 업고 예수회의 과학자들, 성직자들과 대립했다. 여기서 문제는 이미 코페르니쿠스주의자들과 교회는 태양중심설을 가설로 논하고 있었고, 갈릴레오는 가설이 아닌 사실로 주창하며 자신의 업적으로 남기길 바랐다. 하지만 갈릴레오는 태양중심설의 결정적 증거를 가지고 있진 않았고, 당연하게도 교회는 증거, 증명없이 가설을 사실로 받아들일 수 없었다. 이것이 우리가 알고있던 갈릴레이 신화의 속내다. 이 재판 결과 이탈리아에서는 과학과 신학 사이에 불신의 분위기가 생겨난다. 그 때문에 17세기 후반 이탈리아에서는 물리학의 발전이 위축되었다. 사실, 교회와 새로운 물리학은 근본적으로 양립 불가능한 것이 아니었다. 아이작 뉴턴은 태양중심설의 타당성을 입증하고, 물리학과 그리스도교를 훌륭하게 화해시켰다. 진리의 문제라기보다 증명의 문제였던 것이다. 이는 역사상 가장 위대한 수학적 천재 뉴턴의 평생의 과업이 신의 탐구였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뉴턴은 전대의 풍부한 유산을 최대한 활용하여 그 기초 위에 자신의 이론을 구축했다. 뉴턴은 만유인력의 법칙을 통해 태양중심설을 받아들이게 하고 운동의 3대 법칙을 발견했다. 17세기 후반에는 빈 공간에 작용하는 보이지 않는 힘(중력으로 정의한)이라는 생각이 진지한 과학자로서는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뉴턴의 놀라운 점은 신에 기반한 “마술적” 개념, 연금술을 근간으로 물리학의 발전을 이끌었다는 점이다. 뉴턴의 자연철학은 신이 우주의 섭리적 설계자이면서 그 적극적이고 자비로운 감독자라는 믿음에 기초해 있었다. 밝혀지지 않은 풀리지 않는 문제들 곳곳에서 뉴턴은 신을 발견했다. 뉴턴이 그리스도교에 정통한 건 아니었지만, 과학으로 신앙에 기여하고자 한 바 뉴턴의 자연철학은 곧 과학과 그리스도교의 강력하고 새로운 연합의 기초가 되었다. 데카르트적 기계론의 무신론적 경향들을 물리치고, 자신의 우주론을 적극적으로 섭리하는 신성의 논거로 사용함으로써, 뉴턴은 과학만으로 설명할 수 있는 것에는 한계가 있음을 인정했다. 그에게는, 우리 주위의 세계를 완전하게 인식하려면 과학과 종교가 모두 필요했다. 이 불멸의 수학적 인간이야말로 교회의 가장 영향력 있는 협조자였으며, 물리학과 종교를 더없이 긴밀하게 결속시킨 인물이었다. 그의 물리학은 성서적 사건에 대한 문자적 확증을 제공하는 것이었다. 새로운 물리학은 종교를 무용지물로 만들기는커녕, 가장 문자적인 신앙을 활성화하는 역할을 했다. 나아가 뉴턴 과학과 나란히, 사회를 신이 제정한 “자연적” 질서로 여기는 사회적 뉴턴주의가 생겨났다. 뉴턴적 우주처럼 법치적이고 안정되고 불변인, 이른바 신이 내린 질서였다. 더욱이 주목해야할 지점은 사회적 뉴턴주의가 보존하는 “자연적인”(신이 내린) 질서는 젠더 질서였다. 여성은 “자연적으로” 남성 주위의 궤도에 머물러야하는 위성으로 여겨졌다. 18세기 사회적 뉴턴주의 아래에서 여성은 과학 그 자체에 공식적으로 참여할 수 없었다. 영국에서는 뉴턴주의와 영국 성공회 간의 유대로 “사제적인” 과학자상을 수립하였으며 여성 참여에 불리한 사상적 분위기를 수립했다. 물리학의 종교적 기조를 강조함으로써 수리과학을 성스러운 활동으로 여기는 사고방식, 수학적 여성에게 오랜 장벽이 되어온 사고방식이 강화된 것이다. 한편 이탈리아 지방 학회, 독일, 프랑스에서는 극소수의 여성이 학위를 받거나 강단에 설 수 있었다. 특히 프랑스 살롱 문화에서는 여성이 새로운 자연철학의 전파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살롱에서는 신과학의 합법화에 중심적 역할을 했는데, 이를 위해 살롱 여성의 협력을 요했다. 베르나르 드 퐁트넬, 프란체스코 알가로티 등은 귀족 여성을 새로운 동업자라 말하며 협력을 요했지만, 과학 지식이 실제로 생산되는 공식적인 장소에까지 여성을 초대할 의사는 전혀 없었다. 그 활동은 남성의 특권으로 남아야 했다. 이런 상황 아래에서 에밀리 뒤 샤틀레 후작부인은 뉴턴의 프린키피아를 프랑스어로 변역하고, 영국 물리학자를 프랑스에 알리는 등의 활동을 해왔지만 남성 지배적인 학문세계에서 끝내 이방인으로 남게된다. 이외에도 주세파 엘레오노레 바르바피콜라, 마리아 안젤라 아르딩겔리, 특히 라우라바시는 세계 최초의 여성교수로 볼로냐 대학에 재직했고 그의 업적에 반해 남성들은 그를 선전용, 특이한 장식 정도로 여겼다. 한편 1786년 라플라스가 태양계의 자족성에 대한 확증을 제시했다. 이후 자연의 자족성에 대한 믿음은 물리학자들이 물리학과 신학의 분리를 주장하는 논거가 되었다. 칸트는 “공백의 신”이라는 논증을 부정하며, 과학의 논리 속에 신이 개입할 자리는 없다고 보았다. 라플라스응 1796년에 태양계가 자연적 과정만으로도 형성될 수 있었으리라는 가설을 제출했다. 이는 수학적 분석 기술의 진보에서 비롯했다. 라플라스에 따르면 수학적 분석은 인간을 신에 가까운 전지로도 인도할 수 있었다. 여전히 신성에 가까운 태도로 지식을 탐구하며 이들은 뉴턴을 신격화했고, 물리학에 대한 유사 종교적 태도는 자연의 “법칙들”에 대한 탐색은 오로지 남자에게만 어울리는 “사제적” 행위라는 오랜 믿음을 증폭시켰다. 이를 바탕에 두고 점차 과학의 “남성적인 풍모”를 견지하려는 태도가 강화됐다. 살롱의 여성적인 문체를 시적이고 문학적이라 과학저술에 용인할 수 없다 비판하고, 과학에서 배제된 것들을 여성과 연관시켰다. “과학”과 “여성성”을 반대항으로 수립하며 과학은 이성, 객관성, 사실 등과 연관되는 반면, 여성은 감정, 주관성, 문학적 연상 등과 연관지어졌다. 이 계몽주의적 태도는 상호 보완 이론에 기초를 두고 있었다. 보완주의자들은 자연이 남성과 여성을 전혀 다른 목적으로 만들었고, 사회 전체가 제대로 기능하는 데에는 둘 다 필요하다고 믿었다. 따라서 이론적으로는 상호보완되기에 남녀가 평등하지만, 더 높이 평가되는 가치는 전부 남성의 것이었다. 특히, 과학을 연구하는 데 필요한 추론은 남성의 속성으로, 여성은 과학 연구에 부적합하다 여겨졌다. 여권주의자들은 과학의 권위 앞에 무력했고, 과학의 권위는 새로운 계몽주의 철학과 합세하여 과학 뿐 아니라 정치 일반에서도 여성을 배제하기 위한 강력한 기초를 구축했다. 이 영향은 프랑스 혁명 초창기 여성의 권리 박탈이 법으로 규정되는 결과를 낳았다. 루소, 칸트, 헤겔 등의 철학자는 자연 및 자연법에 호소하여 이런 사회 구분을 정당화했다. 사회질서에 관한 그들의 관점은 불변의 “자연적”질서라는 개념에 기초해 있으며, 공사를 구분하고 남녀이원론을 이룩하며 가장 공적인 법칙, 자연법칙은 곧 남성의 영역으로 생각했다. 이 새로운 “평등”의 분위기 속에서는 모든 여성이 평등하게 과학에서 배척당했다. 자연에 고정된 의미는 없다. 위계 속에서 누군가에게 권력을 쥐어주는 상징도 아니다. 인위적으로 자연을 정의하고 의도를 가져 주창할 지라도, 그 의미는 만들어진 언어일 뿐이다. 하지만 우리는 때론 그 의미를 고정된 것으로 생각하는 실수를 저지르기도 한다. 우리가 그런 실수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 책을 읽으면 “자연”안에 담긴 여러 계획된 의도를 역사적으로, 자연스럽게 알게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