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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디 소장학자少壯學者란 주류 담론에 저항하는 이를 가리키는 말이지만, 이것저것 닥치는 대로 긁어모은다는 뜻으로 소장所藏학자라 부르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것도 한때의 유물이 되어 좀처럼 찾아볼 수 없는 것 같다. 책이 흔하기 때문이거니와 어느어느 도서관 혹은 누구누구의 서가에만 있는 책이란 것도 크게 귀히 여긴 바 되지 못하는 탓이다. 이에 그들을 추억하며 몇 글자 남긴다.
1-1 :
양계초의 <청대학술개론>, 즉 <중국 근대의 지식인>으로 번역된 이 책에서 시대의 곤혹스러움과 아울러 근대 지식인의 호기를 읽을 수 있다. 민국 9년, 1920년에 쓰인 이 책은 한편으로는 일종의 반동이기도 하다. '구문화타파舊文化打破 신문화건설新文化建設'이라는 5·4신문화운동의 구호와 궤를 달리하기 때문이다. 양계초는 청대 학술을 문예부흥-르네상스와 등치시키면서 구문화, 즉 청대 학술로 가는 다리를 놓았다. 아울러 청대 학술, 고증학을 발판으로 삼아 송명宋明과 한당漢唐 이전의 순수한 철학으로 돌아갈 수 있는 여지를 남겨 놓았다. 그는 과학적 학문 방법을 이야기하나, 내용과 무관한 방법이 있을 수 있을까. 송명의 도가와 불가를 걷어내고, 한대의 위서를 걷어내고나면 순수한 고경古經이 남는다. 그 순수한 고경을 통해 중화철학의 부흥을 꿈꾸는 후예들이 오늘날에도 튀어나오는 것을 보면, 그가 주창하는 것이 근대적 방법론 - 과학적 순수 학문에 그치는 것일까 의심을 거두기 힘들다.
지금이야 양계초의 서술을 사상사, 한층 더 너그럽게는 철학사의 범주에 넣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컬럼비아 대학 존 듀이 아래에서 수학한 호적이 보았을 때 이 저술을 어떻게 평가할지 궁금하다. 참고로 호적은 1919년 <중국철학사대강中國哲學史大綱>을 내놓았다. 그가 청대 학술의 장점으로 드는 학문적 관점에서 그의 저술을 평가하면 어떨까 질문을 던져보는 것이다. 양계초라는 이름을 걷어내고 하나의 사상사 혹은 철학사, 아니 더 폭넓게 학술사 서술로 보면 객관적이고 타당한 서술로 평가받을 것인가. 독창적이고 흥미로운 서술이기는 하되 엄밀하고 꼼꼼한 서술로 보기는 힘들 것이다. 고증학자들이 비판했던, 그리고 그도 비판하는, 주장이 학술에 앞선다는 지적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그러나 이런 자기 모순이야 말로 20세기 초반 근대 지식인이 갖는 빼어난 장점이다.
1-2:
결국 21세기 독자는 당대의 관점에서 양계초의 서술을 다시 읽을 수밖에 없다. 그는 청대 학술을 토대로 삼아 거기서 근대 학술의 가능성을 읽고자 했다. 이른바 '자생적 근대론'이라 불러도 좋겠다. 서구의 근대와는 다른, 혹은 유사한 근대를 발견하고자 하는 노력이다. 그러나 20세기 내내 그런 시도는 노력으로만 평가받았다. 근대란 서구의 전유물이며, 탈근대-포스트모던을 위해서는 모던이 필요한 법이다. 전통을 그대로 탈근대에 이어 붙이려는 시도는 비과학적 접근으로 치부되곤 했다. 요컨대 양계초가 청대 학술에서 문예부흥을 읽으려 했지만 청대 학술은 봉건 잔재에 불과했다는 뜻이다.
그러나 중국 굴기의 현장은 모든 것을 뒤집어 놓았다. "큰 도를 실행하여 천하를 공정하게 한다.(大道之行,天下爲公)"는 주장은 강유위가 주창한 대동사회, 나아가 전통 철학의 부활을 상징하는 언술이기도 하다. 청대의 유산 - 영토, 체제, 제도 위에 중화인민공화국이 건립된 이상 청대는 타파의 대상이 아니라 새로운 굴기의 배경이 된다. 이런 맥락에서 양계초의 저술이 갖는 위치가 흥미롭다.
2-1:
고증학도 중국철학 혹은 동양철학의 범주에 넣을 수 있는가? 쉬이 답하기는 어려울 테다. 철학이란 주의主義를 갖는 것이지 어떤 방법이나 태도를 말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예컨대 대진을 철학자로 주목한다면 법法과 리理를 비판했으며 욕망(情慾)을 긍정했다는 데에 주목할 것이다. "가혹한 관리는 법으로써 사람을 죽이지만, 후세 학자들은 이로써 사람을 죽인다. 재빨리 법을 버리더라도 이를 논하면 죽게 되니 다시 구할 도리가 없다."(96) "무릇 욕을 막아 생기는 폐해는 강물을 막아 생기는 폐해보다 크다. 정을 끊고 지를 제거하면 인의를 막아버리게 된다."(99) 어떤 사람은 이것을 루쉰의 식인과 연결시킬 것이다.
그러나 흥미롭게도 동양철학은 주의를 갖는 해석보다는 경전의 주석에 달통한 것을 으뜸으로 치곤 했다. 하여 경전을 외는 것을 하나의 중요한 덕목으로 보았다. 물론 <사서> 본문에 그쳐서는 안 되고 주주朱註까지 외야 했다. 나아가 현토까지 외는 것도 빼놓을 수 없다. 경전을 숭상하는 태도일까 아니면 전통적인 학술 방식일까. 무튼 정확하게 외고 나서야 어떤 해석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이 그 바닥의 통념이었다. 비슷한 궤에서 김시천은 고루한 논문 쓰기를 꼬집은 적이 있었다. 논문에 인용되는 고문古文은 원문을 그대로 실어야 하며, 설령 주석으로 원문을 처리할 경우에도 논문 저자가 원문까지 번역해야 한다는 것이다. 누구의 번역을 가져와 인용하면 안 된다는 뜻이다.
이러한 태도의 연장선일까. 텍스트를 소유한다는 것은 곧 지식의 양으로 연결되곤 했다. 하나의 예로 대학원 새내기 시절 보물을 건네주듯 받은 CD가 있었다. 거기에는 <사고전서>와 <한한대자전>가 들어 있었다. 한편 <중화서국> 혹은 <상무인서관>에서 나온 저본을 구하면 여러 권 제본하여 소장하곤 했다. 그만큼 구하기도 어려웠고, 그런 자료를 가지고 있어야 뭐라도 쓸 수 있었기 때문이다. 선대 학자들은 외워서 쓰다보니 종종 자구가 틀리는 경우도 있었다. 그럴 수는 없으니 자료가 곧 재산이었다.
2-2 :
21세기 초반을 훗날 서술하면 인터넷의 도입, 대공유와 소장의 시대를 거쳤다고 해야 할 것이다. 컴퓨터와 인터넷의 보급은 모든 것을 바꿔놓았다. 대공유의 시대를 거치면서 자료를 저장하고 소장하는 것에 수많은 사람들이 달려들었다. 내 PC에 저장해 두어야 내 것이 되는 것이고, 그래야만 이것을 언제든 활용할 수 있을 테니. 그러나 클라우드와 4k 시대는 이제 저장-소장조차 무의미하게 만들었다. 고경古經의 원문과 주석, 고적古籍의 스캔본을 판본마다 볼 수 있는 시대다. 축구를 좋아하는 내가 직관하며 깨우친 것이 있다. 함성과 현장감을 제외하면 모니터 앞이 더 생생하게 경기를 관람할 수 있는 자리라는 점.
소장학자의 시대는 이제 과거가 되었다. 많은 것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더 이상 미덕이 아니다. 많이 외고, 많이 보았다는 것을 내세울 시절이 지나갔다는 말씀. 청대 고증학의 흥행은 출판문화의 성장과 떼어놓고 이야기할 수 없을 것이다. 그만큼 책이 흔했고 넘쳐나는 시절이었으니 무엇이 맞고 틀리는지를 따져보는 일이 중요했다. 아울러 얼마나 많은 책을 두루 읽느냐 하는 것도 중요했다. 소장해야 읽을 수 있으니 장서의 숫자도 학자의 중요한 덕목 가운데 하나였을 것. 양계초가 거론하는 수많은 서지 목록이 이를 반증한다. 이 만큼 많은 책을 가지고 있다는 증거.
소장의 시대는 가고 해석의 시대가 도래하리라. 양계초의 예를 보건대 해석의 힘은 창의적인 데 있지 않다. 도리어 덧씌우기에 있다. 기존의 서술을 지우고 새로 쓰는 것이 아니라 그 위에 다시 덮어쓰는 것. 묘하게 번져 보이는 낡은 것과 새것의 포개어짐이야말로 해석의 묘미가 아닐까. 순수함을 따지는 진지한 학자들은 이것을 두고 거짓이라 품평할지도 모른다. 아니, 어쩌면 품평의 대상조차 되지 못할지도. 그러나 자기 모순의 호기로운 해석이야말로 학문의 빈 공간에 싹트는 가능성일 테다. 그러니 모순과 호기를 기억할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