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근대의 지식인
세번째 시간 제 19장에서 제 26장 문예사조의 탈피기
2025.09.23 손미경
그때는 맞고 지금은 틀리다. 또는 그때도 틀리고 지금도 틀리다.
우리가 역사를 들여다 보는 것은 과거를 반추하여 현재를 통찰하고자 하는 욕망이 있기 때문이다. 현실에 도전받고 있는 우리는 역사를 통해 올바른 길을 찾고자 한다.
그러나 역사는 역사일 뿐, 과거의 경험으로 우리가 알수있는 것은 결국 자신의 기준에서 판단 할수 밖에 없다. 그 때는 맞고 지금은 틀렸다 이거나 그 때도 틀렸고 지금도 틀렸다는 것일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우리는 역사를 살펴 볼수 밖에 없다.
청학 전성기와 쇠퇴기 사이의 중요한 인물 중 한 사람 회계 출신 장학성은 "육경은 모두 역사다"라 하였는데 그가 지은 《문사통의》는 실로 건륭,가경 연간(1796~1820) 이후 사상해방의 원천이었다. 그가 말한 "고대에 중요하지 않았던 것도 오늘 날에는 귀중한 것이 될수 있다있다" "후대 사람의 학문은 옛 사람보다 뛰어나다. 이에 후에 일어나는 지혜와 생각이 응당 뛰어 나다" 이 말을 믿고 우리는 옛것에 얽매이기보다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청초의 '경세 치용'의 학파는 틀린것으로 간주하며 시대를 풍미한 정통파는 고증을 위한 고증, 경학을 위한 경학이었다. 정통파의 학문 연구의 근본적인 방법은 ' 實事求是' '無徵不信'.
고증학에서 이런 연구 방법은 비록 매우 정밀 했으나 그 연구 범위가 너무 제한되어 훌륭한 성과를 올린것은 훈고 분야 하나뿐이었다. 게다가 '實'을 제창하여 번성 했으나 '實'을 관철시키지 못하였으니 학문의 실효성이 없었다.
무징불신의 경우 淸學파는 사람들에게 옛것을 존중하도록 했고 의심을 많이 하도록 하였다. 이미 옛것을 존중 했는데 이보다 더 옛것이 있으면 당연히 존중해야 했고 옛것에 의문을 갖는 이상 당시 사람들이 모두 믿고 있는 것에 대해서도 의심 할수 밖에 없을터였다. 즉 그 때는 맞았으나 지금은 틀리게 되었다.
점차 청학은 분열하게 되고 사회적으로도 청학의 발생지였던 강소성, 절강성지역을 중심으로 태평천국운동이 일어나 가장 큰 피해를 입어 대개의 문건이 소실되어 회복 불능 상태가 되었다. 또한 '아편전쟁' 이후 경세치용의 관념을 부활시켜 그 기세가 대단하여 억누눌 수가 없었다. 해금까지 풀리니 서학까지 점차 수입되어 청학이 분열되면서 탈피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탈피기에 활동한 대표적 인물은 康有爲(1858~1927)와 梁啓超(1873~1926)
강유위는 《公羊傳》을 근본으로 삼아 '公子改制'설을 세우고 육경은 모두 공자가 쓴것이며, 요순은 모두 공자가 가탁한 것이라는 대담한 주장으로서 수천 년 동안 내려온 경전에 대하여 비약적인 해방을 도모 하였다. 특히 강유위는 금문학 운동의 중심에 선 사람으로 금문학을 집대성 하였다. 당시 금문과 고문의 다툼이 있었는데 이는 청학 분열의 도화선이 되었다.
청대 금문이라 함은 經의 원전이 秦,漢 시대 통용되던 篆書로 쓰여진 것은 今文이라 하였다. 古文은 전한 말기에 나타났는데 科斗문자 (올챙이 형태의 옛 중국 문자)로 쓰여진 경전을 말한다. 양한대의 경학자들은 대부분 고문을 믿지 않았다.
강유위가 최초로 저술한 《新學僞經考》의 요점의 몇가지를 살펴 보면
전한의 경학은 결코 고문이라 할 수없다. 모두 유흠의 위작이다.
秦의 분서는 육경에는 피해를 끼치지 않았다. 한의 14박사가 전한 것은 모두 공자 가문의 완전한 경전이며 결코 훼손되거나 잔결 된것이 아니다.
유흠은 위작의 흔적을 감추기 위하여 교중비서로 있을때 모든 옛 문헌들을 마구 뒤섞어 놓았다.
위경이 위경을 만든것은 왕망을 도와 한을 찬탈하기 위해서 였는데 공자의 微言大義를 흔적도 없이 모조리 없애려고 하였다.
이런 주장의 중요한 점은 청학 정통파의 발판이 근본부터 흔들렸다는 사실과 모든 옛 문헌을 전부 다시 점검하고 평가해야하는 상황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의 두번째 저술 《公子改制考》와 세번째 《大同書》는 첫번째 책보다 더 대담한 주장을 펼쳤다. 《공자개제고》에서 그는 공자가 위대한 것은 새로운 학파를 세우고 인간의 창작 정신을 고무했다는 점과 참된 경전은 모두 공자가 옛것에 가탁하여 만든 것이라 하였다. 이는 결국 수천 년 이래 변함없이 신성불가침으로 여겨지던 경전에 대해 근본적인 의심을 불러 일으켰으며, 학자들에게 회의적이고 비평적인 태도를 갖게 하였다. 자신이 창작한 대동서에더 놀랄만한 주장을 펼쳤다. 책 전체 분량은 수십만 자로 되어 있고 인생고락의 근원,선악의 표준에 대해 상세하게 언급한 후에 입법의 이유를 설명하였다. 여기에서 가장 중요한 관건은 가족제도의 해체이다. 국가 역시 가족과 함께 소멸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강유위는 이 목표를 내걸어 인류 진화의 정점으로 삼았다. 당연 이책은 널리 퍼질 수 없었고 그 또한 사람들에게 보이지 않고 비밀로 하였으며 학자에게 가르치지 않도록 하였다.
그의 제자 중 가장 유명한 사람은 陳千秋와 梁啓超. 진천추는 22세의 나이로 요절하였으나 양계초는 교육과 저술을 통하여 그 학문을 크게 넓혔다. 그러나 양계초는 정통파와의 인연이 비교적 깊은 편이었고 때때로 스승의 독단을 싫어하였기 때문에 마지막에는 많은 부분 달라졌다. 강유위와 양계초는 모두 계몽기의 '치용' 관념을 견지하고 경학을 빌어 그의 정론을 말하였기 때문에 '경학을 위하여 경학을 공부한다'는 정신은 매우 결여되어 있었다. 그리하여 그들의 학술적 업적은 빛을 발할 수 없었고 오히려 서구 사상의 유입을 인도하는 역할을 하게 되었다고 본다.
양계초를 좀더 살펴 보면 그는 금문학파로서 맹렬하게 선전운동을 펼쳤다. 만목 초당에서 진천추와 함께 강유위의 제자가 되었고 스승의 신학위경고를 연구하면서 여러번 스승의 독단에 대해 불만을 토로 했으나 나중에는 묻어두고 다시는 말하지 않았다.
양계초는 순자의 학문을 물리치고 맹자의 학문을 통해 대동의 사상을 펼치며 여러차례 북경에 내왕하면서 당대 사대부들과 교류하며 하증우와 담사당과 의기투합하였다. 이들의 운동은 한층더 정치적 색채를 띠게 되었다. 스스로 《변법통의》를 저술하여 악정을 비판하면서 구체책의 방안으로 과거제를 폐지하고 학교를 세울 것을 주장하였다. 한편으로는 소극적인 민권론을 주장하였다. 장사에 세운 시무학당에 그는 교수로 초빙되었고 무술정변(1898)전 그들의 정치적 활동이 탄핵되어 대옥사가 발생하였다. 이로 담사동이 죽임을 당했으며 양계초는 망명했으며 당재상등은 쫓겨났고 학당은 해산 되었다.
중국 근대의 지식인의 대표라고 할 수 있는 강유위와 양계초는 스승과 제자로 또는 운동의 동지로서 함께하기도 하고 서로 이견을 갖기도 하는 도반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현실 정치에 뛰어들면서 그들은 서로 엇갈렸다.
양계초가 혁명, 排滿, 공화론을 제창하자 이를 탐탁치 않게 여긴 스승 강유위는 그를 여러번 나무랐고, 2년 동안 계속해서 완곡히 권고하는 장문의 편지도 보냈다. 양계초 역시 당시 혁명가들의 활동을 불만스러워 했다. 그러나 그의 속내에도 보수성과 진보성이 항상 서로 갈등을 일으켰고, 그의 주장도 종종 감정의 기복에 따라 모순을 일으키기도 했다. 양계초는 삼십세 이후에는 입을 다물어 위경에 대해 거론 하지 않았으며 改制에 대해서도 거의 언급하지 않았다. 그의 스승인 강유위는 孔敎會를 설립하고 공교를 국교로 정하고 하늘에 제사지내고 공자를 배양하는 등 여러 논의를 강력하게 주장했다. 양계초는 이와같은 것을 옳지 않다고 여겨 반박하였다. 그가 사상계에서 지닌 파괴력은 적지 않으나, 창조적인 면에서는 아직 명성이 없었다.
청말 사상계의 조잡스러움과 천박함에는 그의 책임도 있다. 하지만 고인물인 사상계에 이처럼 경솔하고 조잡한 방법이라도 쓰지 않았다면 과거의 혼란스런 상태를 쇄신하여 새로운 국면을 개척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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