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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우울/정신병] 고통이라는 가능성 (<정신병을 팝니다> 후기)2025-11-24 0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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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병을 팝니다후기

 

우리는 우울증을 포함한 정신병을 개인적인 문제로 보는 관점에 익숙하다. 질병의 원인을 명확하게 파악할 수 없다거나 유전적 기질에서 질병이 비롯된다고 여기는 통념에 익숙하기 때문이다. 이 책의 저자는 이런 통념과 관점에 반론을 제기한다. 바로 현대의 정신병이 경제 변화에 맞추어 진행된다는 반론이다. 저자는 경제가 우리의 정신을 아프게 만들거나, 그렇지 않더라도 약물 복용 등 의료적 조치가 필요한 상태로 만든다고 주장한다. 또 우리에게 일어난 변화의 원인이 경제에 있음을 보지 못하도록 만든다고 말한다.

 

저자는 대처 시대 영국에서 일어난 변화에 주목한다. 대처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세계 경제가 국가의 역할을 강조하며 발전해 왔던 점에 불만을 가진 인물이었다. 1970년대까지 세계 곳곳에서 국가는 사회보장을 확대하고 실업률을 낮추기 위해 노력했다. 대처에게 이런 정책은 무능하고 게으른 국민을 양산하는 체제로 보였다. 대처가 불신했던 경제 체제가 규제자본주의라면, 대처가 옹호하는 새로운 체제는 신자유주의였다. 기업 규제를 완화하고, 국유산업을 민영화하고 노동보호와 복지가 축소되는 체제가 신자유주의이다.

 

저자가 보기에 신자유주의는 단지 경제 체제가 아니다. 경제는 산업과 노동, 복지에 영향을 미치고, 노동과 복지는 그대로 노동자의 삶 전반에 관여한다. 저자는 이 부분에서 노동자의 고통을 곧 혁명의 원동력으로 보았던 마르크스를 떠올린다. 마르크스는 노동자들의 고통이 혁명으로 연결되지 못하게 막는 역할을 하는 사회 제도로 종교를 설명한다. 종교는 고통을 이해하고 관리하면서 경제 체제를 보호한다. 사회 제도는 노동자의 고통으로 인한 정치적 위험을 줄이기 위해 고통을 관리하고 완화하는 역할을 계속한다.

 

종교의 영향력이 줄어든 현대에는 종교를 대신할 새로운 완화제로 정신건강분야가 등장했다. 신체의 고통을 완화하는 약물이나 경제적 고통을 경감시키는 부채도 고통을 완화하는 요소로 꼽힌다. 노동자의 삶은 정치 및 경제 상황과 밀접하지만, 노동자의 고통은 개별적인 문제가 된다. 실업이나 파산, 과도한 부채는 개인의 불운이나 실패로 평가된다. 과로나 산재로 인한 신체적 고통은 물론 정신적 고통 역시 원인을 개인의 나약함에서 찾는다. 정신건강은 나약한이들에게 약물을 처방하고, 노동에 복귀하기를 종용한다.

 

이제 건강은 소비화된 의료를 통해 구매해야 할 재화가 되었다. 노동을 수행하지 못하고 사회에서 높은 가치로 평가되지 않는 몸과 마음을 가진 이들은 사회를 탓하기보다 자기 자신을 탓한다. 그들의 고통은 사회를 변화시키는 데 쓰이지 못한다. 우리가 정말 안타까워해야 할 지점은 여기에 있을지 모른다. 우리가 고통스럽다는 사실 자체가 아니라 우리의 고통이 어디에도 쓰이지 못한다는 사실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저자는 고통을 줄이는 방법이 아니라 고통을 무엇에 써야 하는지를 묻는다.

 

저자가 이 책을 쓴 시점은 팬데믹 시기였다. 인류가 느낀 큰 위협과 고통 앞에서 저자는 새로운 가능성을 이야기한다. 팬데믹 위기가 기존 질서를 뒤흔들면서, 신자유주의 체제를 고수하던 영국 정부 역시 정부의 역할을 고민하며 복지를 강화하고 체제 변화를 모색할 수밖에 없었던 상황을 눈여겨본다. 팬데믹 위기는 개인들에게도 고통을 성찰하는 계기로 작용했다. 무엇이 자신을 고통스럽게 했고, 그 고통을 계속 감내해야 하는지 각자 고민할 기회를 주었다. 고민 끝에 우리는 꼭 과거의 방식을 고수하며 살 필요가 없음을 알게 된다.

 

거대한 사건은 우리를 성찰하고 변화하게 만든다. 몸과 마음이 무언가에 부딪혀 으깨지는 듯한 그 느낌이 없다면 성찰이나 변화가 가능하기나 할지 모르겠다. 세 권의 책을 다 읽고 나서 나는 처음 이 세미나를 열기로 마음먹었던 올해 봄을 떠올린다. 계엄을 선포한 대통령을 탄핵하고 파면했던 광장의 에너지는 기쁨과 긍정의 에너지만은 아니었다. 나는 아무리 감추려 해도 자꾸만 흘러넘치던 우리의 우울과 슬픔을 되새긴다. 가장 우울하고 슬프고 약한 이들이 목소리를 높일 수밖에 없었던 그때를 다르게 받아들인다.

 

갑작스러운 계엄은 막다른 골목이었다. 그 골목까지 몰리기 전에 우리는 이 책에서 언급된 완화제들로 고통을 누그러뜨리며 버티고 있었다. 그런 노력이 무색해지는 순간 우울과 슬픔은 폭발하여 새로운 힘이 된다. 이제 그 힘의 정체를 바로 볼 수 있게 되었다. 타인의 우울과 슬픔을 살필 수 없다는 말은 자신의 우울과 슬픔도 살필 수 없다는 말과 같다. 우울과 슬픔을 살필 수 없다는 말은 우리 세계를 바꿀 가능성, 각자가 지닌 고통의 가능성을 보지 않겠다는 말과도 같다. 그러니 이제 우리 고통을 말하는 일을 더 이상 주저하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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