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기

제목[푸코+] 새로운 자유주의가 온다 (<생명관리정치의 탄생> 5, 6강)2026-03-27 13: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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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관리정치의 탄생5, 6

 

푸코의 분석에서, 18세기까지 유럽에서 통용된 자유주의는 더 적은 통치를 통해 더 큰 국가로 향하는 길이었다. 2차 세계대전 이후 독일에서 제기된 문제는 조금 다르다. 정당하지 않은, 수용될 수 없는 국가를 경제적 자유를 통해 정당화하고 수용하게 만들 수 있을까? 나치즘과 함께, 또 나치즘을 극복하기 위해 활동한 독일 질서자유주의자들의 고민 지점은 여기다. 푸코는 이들의 작업에서 경제이론이 아닌 통치술로서의 자유주의를 발견한다.

 

독일의 질서자유주의자들은 20세기 초부터 관료로 활동하기도 했으나, 나치 혹은 인종주의에 반대하여 나치로부터 축출되었다. 오이켄을 중심으로 프라이부르크학파라고도 불렸으며, 이들이 전후의 독일 재건에 참여했다. 푸코는, 기존의 자유주의와 개입주의를 모두 반대한 이 독일 질서자유주의자들을 신자유주의자들이라 부른다. 이들의 이론은 현대 미국의 자유주의, 푸코가 무정부적 자유주의라 부르는 통치술에도 영향을 미친다.

 

프라이부르크학파와 프랑크푸르트학파는 나치즘이라는 동일한 정치적 경험과 출발점에서 시작한다. 여기에 베버주의라는 공통점이 추가된다. 마르크스가 자본의 모순적 논리를 분석하려 했다면, 베버는 자본주의의 비합리적 합리성에 주목했다. 자본에서 자본주의로, 모순에서 합리성으로, 독일 사회학의 문제가 이동했다고 할 수 있다. 프라이부르크학파와 프랑크푸르트학파 모두 합리성 문제를 고민하지만, 결과는 상반되게 나타난다.

 

20세기 이전에도 독일에는 자유주의가 존재했지만, 그에 대한 비판과 저항도 강하게 존재했다. 정치제제가 무엇이든 독일 사회는 중앙집권적 계획경제로 움직였고, 결말에는 나치즘이 있었다. 이제 신자유주의자로 불리게 된 독일 질서자유주의자들은 독일의 체제와 나치즘에 관하여 숙고해야만 했고, 그 결과 나치즘에 관한 전혀 다른 결론을 끌어냈다. 모든 경제적 개입주의는 국가권력의 무제한적 증대, 즉 나치즘으로 귀결된다는 결론이다.(172)

 

물론 현실에서 나치즘은 국가의 소멸로 이끄는 시도가 되었다. 독일 질서자유주의자들은 이 현상에서 다시 하나의 교훈을 얻는다. 경제적 조직과 국가의 확장 사이의 필연적인 연결고리가 그 교훈이다. 그들이 보기에 나치즘이 국가의 소멸로 향한 까닭은 경제정책과 국가형태가 맞지 않았기 때문이다. 경제적 조직화는 국가권력의 확장을 요구한다. 그들에게 문제는 자본주의나 시장경제가 아니라 국가주의와 반자유주의였다.

 

이제 과거에 시장의 탓이었던 문제들은 국가의 문제가 되었다. 질서자유주의자들의 대담한 분석을 통해 그런 사유가 현대의 우리 안에 자리 잡았다. 문제의 초점은 시장경제의 결함에서 국가의 역할로 옮겨간다. 시장을 위한 국가가 필요한 게 아니라, 국가의 역할을 조정하기 위해 시장의 원리가 필요하다. 이제 국가는 시장에 개입할 시기나 지점을 찾을 필요가 없다. 국가는 애초부터 시장의 자유를 생산하고 보장하기 위해 존재해야 한다.

 

질서자유주의자들이 도입한 새로운 자유주의는 과거의 자유주의와 다르다. 그들은 전통적 자유주의를 몇몇 지점에서 변환 혹은 반전시켰다. 시장의 원리는 교환에서 경쟁으로 이동했고, 시장의 본질은 등가가 아닌 불평등으로 이해된다. 국가는 경쟁을 보장하기 위해 독점을 방지하는 방식으로 개입해야 한다. 통치술의 목적이 된 경쟁은 그냥 주어지지 않으며, 오랜 노력의 성과로 나타난다. 즉 국가의 통치가 시장을 생산해야 한다.

 

흔히들 신자유주의를 비판할 때 자유방임(스미스), 상업 및 스펙터클 사회(마르크스), 집단수용소 세계와 굴락(솔제니친)을 이야기한다. 푸코는 독일의 질서자유주의자들의 손에서 굴절된 새로운 자유주의가 무언가 다른 것이라고 주장한다. 루지에가 적극적 자유주의라고 명명하기도 했던 신자유주의는 개입하는 자유주의이다. 뢰프케는 시장의 자유에는 능동적이고 극도로 용의주도한 정책이 필요하다고도 말했다.(197)

 

국가의 확장을 경계하고 국가에 책임을 부과하는 이 신자유주의는 아이러니하게도 이전보다 섬세하고 능동적인 역할을 국가에 부여한다. 국가는 조심스럽게 개입해야 하며, 적절한 개입은 가격이 아니라 틀(인구)에 가해진다. 시장경제가 개입할 수 있도록 틀을 변화시키는 일도 중요하다. 통치의 개입은 대규모로, 동시에 적극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복지의 목적도 평등이 아닌 불평등을 작동시키는 데 있으며, 근본적인 사회정책은 경제성장뿐이다.

 

결국 신자유주의자들이 목적은 경제적 통치가 아닌 사회의 통치이자 사회정책이다.(219) 이 사회는 상품에 종속된 사회가 아니라 경쟁의 역학에 종속된 사회이며, 기업사회이다. 기업이 기초가 되는 사회는 사회 내부에 기업의 형식을 파급시키고, 시장과 경쟁, 기업을 사회에 형식을 부여하는 힘으로 만든다. 이런 사회에서는 상품사회에 대한 비판(한다는 착각)과 통치 목표들 사이에 수렴현상이 일어나며, 양자가 유사해진다.(226)

 

푸코는 이 강의가 있었던 79년에 이미 공산주의가 자본주의의 대안으로 기능할 수 없음을 확신했던 듯 보인다. 난국을 돌파하기 위해서는 오히려 자본주의에 대한 새로운 접근이 필요했다. 자본을 통제하는 국가의 역할을 모색하기보다 국가를 통해 강화되는 시장의 원리를 분석하려 했다. 시민사회의 역할과 잘 분리되지 않는 국가의 공공서비스를 떠올리며, 안일한 비판보다는 새로운 각도의 접근이 필요함을 매번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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