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모 사케르: 주권 권력과 벌거벗은 생명》 3장 근대 생명정치의 패러다임으로서의 수용소 (VP(인간 모르모트), 죽음을 정치화하기, 수용소, 근대성의 ‘노모스’, 경계영역) 책의 결말인 3장 후반부에서 아감벤은 수용소 이야기에 집중한다. 아감벤에게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 수용소는 전무후무한 전쟁범죄가 이루어진 공간을 넘어 근대의 정치적 패러다임을 보여주는 공간이다. 아감벤은 수용소에서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묻는 대신 수용소가 무엇인지 물으려 한다. 어떤 법적·정치적 구조가 수용소에서 그런 일이 일어나도록 가능하게 했을까? 이 물음은 우리가 살아가는 정치적 공간에 관한 물음으로 확장된다.(315쪽) 수용소란 하나의 예외 상태이다. 나치 수용소에서 이루어진 인체 실험의 잔혹성이 이를 입증한다. 한편으로 이 실험을 마냥 사디즘적/범죄적 행위로 보기는 어렵다. 의사들은 이 실험의 성과를 인정했고, 인체 실험은 수용소가 아닌 20세기 미국 사회 등에서도 시행되었다. 사형수와 수용소 수감자들은 벌거벗은 생명으로서 이미 정치 공동체로부터 배제된 이들이었다. 생명정치에서 의사와 과학자의 권한은 과거 주권자의 권한(생살여탈)과 유사해진다. 이제 우리는 삶과 죽음이 정치적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한다. 후에 ‘뇌사(1968)’로 분류될 ‘심층 코마(1959)’가 정식화되는 과정은 ‘삶’과 ‘죽음’이 의학을 넘어 법의 영역으로 들어가는 과정을 잘 보여준다. 새로운 소생 기술과 장기 이식 기술을 통해 ‘죽음’의 개념은 점점 불확실해진다. 의학과 법의 동요 안에서 삶과 죽음이 구분되지 않는 비식별역/중간지대가 나타났고, 이곳이 카렌 퀸란(1954~1985) 같은 벌거벗은 생명이 거주하는 공간이 되었다.(311쪽) 수용소 밖 나치 이후에도 존재하는 이 공간들이 바로 아감벤이 말하는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정치적 공간의 숨겨진 모형이자 노모스이다. 인류 역사에서 수용소가 언제 생겨났는지는 의견이 분분하다. 오히려 주목할 점은 수용소를 통한 예외 상태의 확장이다. 제헌적 힘을 발휘하는 예외 상태는 점차 규칙과 뒤섞이며, 상시적 현실이 된다. 수용소는 예외라는 특수한 공간에 위치하는 동시에, 예외 상태가 규칙이 되기 시작할 때 열린다.(319~320쪽) 수용소에서 예외 상태는 규범적으로 실행된다. 법과 사실이 혼합된 장소인 수용소에서 법과 사실은 구별되지 않는다. 수용소는 ‘안정적인 예외의 창조’를 과제로 삼는다. 절대적인 생명정치적 공간인 수용소에서 마침내 권력은 ‘순수한 생명’과 마주친다. 이제 정치는 생명정치와, 시민은 호모 사케르와 구분되지 않는다. 정치적 패러다임 그 자체가 된 수용소를 통해 아감벤은, 위선적 경악 대신 법적 절차와 권력 장치들을 탐구하기를 촉구한다.(323쪽) 수용소의 본질이 예외 상태의 물질화와 벌거벗은 생명이 거주하는 경계 공간의 창출에 있다면, 아감벤에게 수용소는 잠재적으로 어디에든 현존한다. 난민과 외국인 수용소, 공항 내 억류 공간들은 이미 수용소에 해당한다. 수용소는 유럽 전역에서 시민권 및 시민들의 국적 박탈에 관한 법률과 동시에 출현했다. 국가는 영토와 법질서 속에 (이전에 기입되지 않았던) ‘벌거벗은 생명(출생)’을 (수용소를 통해) 기입하며, 과거의 노모스와 단절된다.(329~330쪽) 아감벤은 수용소를 근대의 노모스로 규정하는 장을 마무리하며, ‘인민’이라는 용어를 언급한다. 인민은 구성적/제헌적(혁명적) 주체인 동시에 법률/정치에서 배제된 자들을 의미한다. 아감벤에게 인민은 포함과 배제 속에서 생명정치적 분열을 필연적으로 포함하는 존재이다. 생명정치적 분열을 극복하기 위해 인민들은 내부에서 벌거벗은 생명을 생산하려 한다. 오늘날 민주주의-자본주의 프로젝트 역시 발전을 통해 배제된 인민을 재생산할 뿐이다.(338쪽) 아감벤에게 수용소는 근대의 정치적 패러다임이다. 과거의 정치적 패러다임으로 돌아가는 일은 불가능하다. 생물학적 신체와 정치적 신체를 구분하는 일은 불가능해졌다. 푸코의 표현을 빌려 아감벤은 우리가 ‘정치에서 생명이 문제시되는 동물’이며, ‘정치 그 자체가 자연적 신체 속에서 문제시되는 시민’이라고 말한다. 어쩌면 벌거벗은 생명은 정치와 철학, 의학적·생물학적 과학과 법학의 경계 안에서만 사유 가능한 새로운 시민 혹은 인민의 형상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