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장은 1350년부터 1815년까지의 근대 초 세계에서 인간의 생각, 종교, 예술, 과학, 정치 이념이 어떻게 변화했는지를 다룬다. 근대 초 세계에서 일어난 변화가 단순히 경제적 변화나 정치적 변화만이 아니었다. 1350년 이후 세계는 해상교역, 은의 이동, 노예무역, 식물과 동물의 이동, 전염병의 확산을 통해 점점 더 가까워졌고, 이러한 연결은 사람들의 사고방식과 감각, 종교적 실천, 예술적 표현에도 큰 영향을 주었다. 이 장의 중요한 표현은 1350년에서 1815년의 근대 초의 문화 세계화이다. 문화 세계화는 모든 다른 형태-경제, 기술,과학,생태 세계화-를 가능하게 만들었다. 한 지역의 문화가 다른 지역을 일방적으로 지배했다는 뜻이 아니라, 여러 지역의 사람들이 서로 만나면서 언어, 관념, 종교, 예술, 생활양식, 소비 습관을 교환하고 변형했다는 뜻이다. 전통적 세계사에서는 15세기 르네상스, 16세기 종교개혁, 17세기 과학혁명, 18세기 계몽주의라는 식으로 유럽 발전의 모델로 삼고 있다. 서유럽 중심의 세계사는 세계사의 보편적 기준을 서양 중심으로 만드는 위험이 있다. 제9장은 르네상스와 종교개혁을 부정하지는 않지만, 세계 전체의 변화 속에 다시 배치한다. 유럽의 문화 변화는 유럽 혼자 만든 것이 아니라 이슬람 세계, 중국, 인도, 아메리카, 아프리카, 오스만 제국, 선교 네트워크, 상업 네트워크와 연결되어 있었다. 이 점에서 근대 정신이 유럽에서 완성되어 세계로 퍼졌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세계가 서로 얽히면서 새로운 정신세계가 만들어졌다는 이야기이다. 1. 기독교권 중세 유럽에서 라틴 기독교권은 사회질서의 중심이었다. 교회는 신앙만 담당한 것이 아니라 교육, 예술, 혼인, 죽음, 법, 구호, 시간 질서, 정치적 정당성까지 담당했다. 사람들은 자신을 왕의 신민이기 전에 그리스도교 세계의 구성원으로 이해했다. 그러나 14세기 이후 교회의 권위는 점점 흔들렸다. 교황청의 세속화, 성직자의 부패, 면벌부 판매, 교회 재산 문제, 지역 군주들의 권력 강화, 도시민과 지식인들의 비판이 쌓이면서 기존 질서에 대한 불만이 커졌다. 종교개혁은 이런 긴장이 폭발한 사건이었다. 루터의 1517년 95개조 반박문은 상징적 출발점이지만, 종교개혁은 한 사람의 선언으로 갑자기 시작된 사건이 아니라 중세 말부터 누적된 교회 개혁 요구의 결과였다. 종교개혁은 신앙의 문제이면서 동시에 정치의 문제였다. “인간은 어떻게 구원받는가”, “성서는 누가 해석할 권리를 가지는가”, “교황과 군주 중 누가 더 높은 권위를 가지는가”, “교회 재산은 누구의 것인가”라는 질문은 모두 신학적이면서 정치적인 질문이었다. 종교개혁은 교리 논쟁으로 끝나지 않고 전쟁, 국가 형성, 교육 제도, 인쇄 문화, 시민 규율, 가족 윤리의 변화로 이어졌다. 종교개혁은 단순히 “중세에서 근대로 넘어가는 진보적 사건”이 아니라 개인의 양심과 성서 읽기를 강조하면서 종교적 폭력성을 강조했던 교회에 대한 해방의 사건이자 통제의 사건이었다. 또한 신앙의 재발견이면서 국가 권력의 강화와도 연결된 사건이었다. 2. 전 세계적 개종: 종교의 세계화 기독교가 유럽 내부의 종교에 머물지 않고 전 세계로 확산 과정을 다룬다. 근대 초 기독교 선교는 유럽의 해양 팽창, 식민지 건설, 상업 네트워크, 제국 경쟁과 함께 움직였다.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대항에는 아메리카 정복, 아시아 진출, 아프리카 해안 교역은 모두 기독교 선교와 결합했다. 아메리카에서는 기독교 선교가 식민지 지배와 깊이 연결되었다. 스페인과 포르투갈은 원주민을 지배하고 노동력을 동원하는 과정에서 가톨릭 선교를 정당화 논리로 삼았다. 원주민은 기독교 신자로 개종해야 할 대상으로 여겨졌고, 세례와 교리교육은 식민지 질서 안으로 사람들을 편입하는 장치가 되었다. 그러나 원주민들은 단순히 수동적으로 받아들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기존 신앙과 의례를 기독교와 결합하며 새로운 혼합문화를 만들었다. 아시아에서의 기독교 선교는 지역마다 다르게 전개되었다. 인도, 중국, 일본에서는 예수회 선교사들이 현지 언어를 배우고, 현지 엘리트와 대화하며, 기독교를 지식과 학문, 천문학, 수학, 지도 제작과 함께 소개했다. 특히 중국에서는 마테오 리치 같은 선교사들이 유교 지식인과 대화하기 위해 중국 고전과 예절을 존중하는 전략을 사용했다. 이는 강압적 선교만으로는 아시아의 오래된 문명권에 접근하기 어렵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전 세계적 개종은 종교의 확산이면서 동시에 번역의 과정이었다. 기독교 교리는 라틴어와 유럽어를 넘어 중국어, 일본어, 인도어, 아메리카 원주민 언어로 옮겨져야 했다. 하지만 번역은 단순히 단어를 바꾸는 일이 아니었다. “하느님”, “영혼”, “구원”, “죄”, “은총”, “성례” 같은 개념은 각 사회의 기존 세계관 속에서 다시 해석되었다. 기독교는 세계로 퍼지면서, 각 지역에서 다른 얼굴을 갖게 되었다. 아메리카의 가톨릭, 중국의 천주교, 일본의 숨은 기독교, 필리핀의 가톨릭, 아프리카의 기독교는 모두 같은 기독교 전통에 속하면서도 서로 다른 역사적 경험을 담고 있다. 3. 불교와 이슬람의 선교: 기독교만이 세계종교가 아니었다 근대 초 세계의 종교 확산을 기독교 중심으로만 보지 않는다. 이 시기에도 불교와 이슬람교는 여러 지역에서 계속 확산되고 재조직되었다. “전 세계적 개종”, “불교와 이슬람의 선교”, “종교 혼합주의와 각양각색 결과”가 함께 놓여 있다고 설명된다. 이슬람은 군사정복만으로 확산된 종교가 아니었다. 이슬람은 상인, 수피, 학자, 법학자, 도시 네트워크를 통해 넓은 지역으로 퍼졌다. 동남아시아와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에서 이슬람은 대규모 정복보다 교역, 혼인, 통치 엘리트의 개종, 수피 교단의 활동을 통해 확산되았다. 무슬림이 된다는 것은 단순히 신앙을 바꾸는 것만이 아니라, 넓은 상업·법률·문자 네트워크에 들어가는 일이기도 했다. 불교도 여러 지역에서 서로 다른 방식으로 살아남고 확대되었다. 인도에서 불교의 중심성은 약화되었지만, 티베트, 중국, 조선, 일본, 동남아시아에서는 불교가 각기 다른 사회적 형태를 띠었다. 티베트 불교는 정치권력과 강하게 결합했고, 중국과 조선의 불교는 유교와 결합하고 민간신앙과도 결합했다. 일본에서는 불교가 신토, 무사 문화, 정토신앙, 선종과 결합해 독자적인 형태로 만들었다. 기독교, 이슬람교, 불교는 모두 세계종교였지만, 그 확산 방식은 달랐다. 기독교는 유럽 해양제국과 선교회 조직을 통해 확산되었고, 이슬람은 상업과 법, 수피 네트워크를 통해 확산되었으며, 불교는 번역과 수행 전통, 사원 제도, 지역 정치질서와의 결합을 통해 유지되고 확산되었다. 4. 종교 혼합주의와 각양각색 결과 종교 혼합주의란 한 종교가 다른 사회에 들어갔을 때 기존 신앙과 의례, 언어, 정치질서, 가족 관습과 결합하여 새로운 형태를 띠는 현상을 말한다. 종교 혼합주의는 “세계종교의 고유한 특징이라고 여기는 것들이 사실은 각 지역의 고유한 특성과 결합해 만들어진 결과”라는 점을 강조한다. 종교는 순수한 원형을 그대로 보존하면서 퍼지지 않는다. 어떤 종교가 새로운 지역에 들어가면 반드시 그 지역의 언어로 말해야 하고, 그 지역의 몸짓과 의례 속에서 표현되어야 하며, 그 지역 사람들이 이미 가지고 있던 신성 관념과 만나야 한다. 따라서 종교의 세계화는 동시에 종교의 지역화이다. 예를 들어 라틴아메리카의 가톨릭은 유럽 가톨릭과 같으면서도 다르다. 성모 마리아 신앙, 성인 숭배, 축제, 행렬, 원주민 의례, 아프리카계 종교 요소가 결합하면서 독특한 라틴아메리카 가톨릭이 형성되었다. 이는 기독교가 원주민 문화를 완전히 지운 것이 아니라, 폭력적인 식민지배 속에서도 여러 전통이 뒤섞이며 새로운 종교문화를 만들었다는 뜻이다. 5. 서양의 과학과 계몽사상 근대 과학은 유럽 내부의 산물인 동시에 세계 교류의 산물이었다. 유럽인은 항해와 제국 팽창을 통해 새로운 하늘, 새로운 바다, 새로운 동식물, 새로운 질병, 새로운 인간 사회를 만났다. 아메리카의 식물과 동물, 아시아의 기술과 상품, 이슬람 세계를 거쳐 전달된 수학과 의학, 인도와 중국에 대한 선교사들의 보고는 유럽 지식인들에게 엄청난 자료를 제공했다. 과학은 세계를 이해하는 도구이면서 동시에 세계를 지배하는 도구가 되었다. 지도 제작은 항해와 정복을 가능하게 했고, 천문학은 항해술과 결합했으며, 식물학과 분류학은 식민지의 자원을 파악하는 데 활용되었다. 즉 근대 과학은 순수한 지식의 역사만이 아니라 제국, 무역, 군사, 행정과 연결된 역사였다. 계몽주의는 이성과 비판을 통해 사회를 개선할 수 있다는 믿음을 강화했다. 계몽주의자들은 교회와 왕권, 미신과 특권, 고문과 불합리한 법을 비판했다. 그들은 인간이 교육을 통해 더 합리적이고 자유로운 존재가 될 수 있다고 보았다. 그러나 계몽주의 역시 양면적이었다. 이성은 해방의 언어였지만, 동시에 인간과 자연과 식민지를 분류하고 관리하고 통제하는 언어가 될 수도 있었다. 6. 동양의 계몽사상 계몽주의가 유럽 내부의 사상만이 아니었고, 유럽의 계몽주의자들이 동양을 중요한 비교 대상으로 삼았다는 점을 보여준다. 18세기 유럽 지식인들은 중국을 단순히 미개한 타자로만 보지 않았다. 오히려 중국은 유럽인들에게 유교적 도덕정치, 관료제, 과거제, 세속적 윤리, 농업 중심 국가질서의 모델로 비쳤다. 볼테르는 유교를 기성 종교의 대안처럼 보았고, 일부 계몽주의자들은 중국의 관료제를 합리적 통치의 한 사례로 이해했다. 그러나 유럽인이 본 중국은 실제 중국 그 자체가 아니었다. 그것은 선교사의 보고서, 여행기, 번역문, 도자기와 차, 궁정 취미, 상상과 욕망을 통해 재구성된 중국이었다. 즉 동양은 유럽 계몽주의자들에게 현실의 사회인 동시에 상상된 거울이었다. 유럽은 동양을 통해 자신을 비판했다. 교회 권위가 강한 유럽에서 유교는 계시종교 없이도 도덕과 정치가 가능하다는 상상력을 제공했다. 세습이 강한 유럽에서 중국의 과거제는 능력에 따른 관료 선발이라는 이상을 떠올리게 했다. 종교전쟁의 기억이 강한 유럽에서 중국은 비교적 세속적인 윤리 질서의 모델로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이 동양 인식에는 한계도 있었다. 유럽인들은 자신들이 필요한 방식으로 동양을 선택적으로 이해했다. 어떤 이들은 중국을 이상화했고, 어떤 이들은 전제적인 사회로 폄하했다. 결국 동양은 실제 동양이라기보다 유럽이 자기 문제를 사유하기 위한 비교의 장이었다.
7. 괴물로 들어가기: 혁명의 이념과 나폴레옹의 이념 프랑스혁명과 나폴레옹을 통해 계몽주의의 이념이 어떻게 근대국가의 강력한 기계장치로 바뀌었는지를 보여준다. 프랑스혁명의 이념을 나폴레옹이 정교화하고 극단화했으며, 나폴레옹 민법전 이후 유럽에는 본격적인 의미의 근대국가가 등장했다. 프랑스혁명은 자유, 평등, 국민주권, 인권, 시민, 공화국, 일반의지 같은 새로운 정치 언어를 전면에 내세웠다. 왕은 더 이상 신에게서 권력을 받은 절대군주가 아니라 국민의 이름으로 심판받을 수 있는 존재가 되었다. 신분제는 정당성을 잃었고, 시민이라는 새로운 정치적 주체가 등장했다. 그러나 혁명은 곧바로 자유롭고 평등한 세계를 만든 것이 아니었다. 혁명은 내부의 적과 외부의 적을 동시에 만들어 냈고, 공포정치와 전쟁, 대중 동원과 처형, 애국심과 폭력을 함께 낳았다. 엘리트층 내부의 반발, 온건 단계, 급진 단계, 전체주의적 절정이라는 네 단계를 거쳤다. 공동선을 추구한다는 이름으로 개인의 자유가 억압될 수 있었고, 일반의지를 대표한다는 이름으로 반대자를 제거할 수 있었다. 나폴레옹은 혁명의 혼란을 정리하면서 혁명의 이념을 행정과 군사제도로 바꾸었다. 그는 법전을 만들고, 행정구역을 정비하고, 징병제를 강화하고, 학교와 관료제를 정비하고, 정복지에 프랑스식 제도를 이식했다. 자유와 평등의 언어는 중앙집권적 국가와 군사동원의 언어로 변형되었다. 여기서 “괴물”은 단순히 나폴레옹 개인을 뜻하지 않는다. 괴물은 합리적이고 균일하며 효율적인 근대국가의 장치를 가리킨다. 이 국가는 지역의 관습을 표준화하고, 사람을 시민과 병사와 납세자로 등록하며, 법과 행정을 통해 사회 전체를 관리한다. 근대국가는 봉건적 특권을 무너뜨리는 해방의 장치였지만, 동시에 개인을 더 깊이 동원하고 통제하는 장치이기도 했다. 8. 낭만주의 계몽주의와 혁명, 나폴레옹 전쟁 이후 등장한 새로운 감성을 다룬다. 19세기 초에 전통과 혁신, 르네상스와 계몽주의가 섞인 새로운 감성이 형성되었고, 이 감성이 개인의 정서와 창조적 자율성을 높인 예술·문학 운동으로서 낭만주의라는 이름을 얻었다고 설명한다. 낭만주의는 단순히 계몽주의에 대한 반발이 아니다. 그것은 계몽주의의 이성이 인간을 해방할 수 있다는 믿음에 대한 의심이면서, 동시에 인간을 계산이 가능한 존재로만 보는 태도에 대한 저항이었다. 낭만주의자들은 인간이 이성만으로 사는 존재가 아니라 감정, 상상력, 기억, 자연, 무의식, 공동체적 정서 속에서 살아가는 존재라고 보았다. 계몽주의가 자연을 관찰하고 분류하고 계산하려 했다면, 낭만주의는 자연을 느끼고 경외하고 체험하려 했다. 자연은 단순한 자원이 아니라 인간을 넘어서는 숭고한 힘으로 이해되었다. 산, 바다, 폭풍, 폐허, 밤, 숲은 낭만주의 예술에서 인간 이성의 한계를 드러내는 상징이 되었다. 낭만주의는 개인의 내면을 중요하게 여겼다. 예술가는 규칙을 따르는 장인이 아니라 독창적 감성과 상상력을 가진 천재로 이해되었다. 문학과 음악, 회화는 고전주의의 균형과 질서보다 강렬한 감정, 파편화된 주체, 고독, 열망, 상실, 저항을 표현했다.
배타적 민족주의와 타자 혐오로 이어질 위험도 있었다, 이것은 억압받는 민족의 해방운동으로 이어질 수도 있었지만. 역사에 대한 관심은 민족주의를 자극했다, 언어, 고대 전설, 민속, 민중의 노래. 동시에 민족정신과 집단적 정체성을 강화했다, 낭만주의는 개인의 감정과 창조성을 해방했지만. 하지만 낭만주의도 양면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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