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레혼 | 중국 문학 연구자/우리실험자들 작가
히어로 영화에 대한 인상을 처음 심어준 작품은 《엑스맨 2》였다. 기억할 수 있는 가장 오래전, 극장에서 본 첫 히어로물이었기 때문이다. 날카로운 발톱을 자랑하는 울버린과 날씨를 조종하는 스톰도 멋졌지만, 나는 매그니토와 찰스 자비에의 설정에 더욱 관심을 가졌다. 돌연변이와 인간의 공존을 이야기하는 찰스, 그리고 돌연변이를 탄압하는 인간을 배척하는 매그니토. 두 캐릭터의 대립은 영화 속 어떤 영웅들의 특수한 능력보다 흥미진진하게 다가왔다. 나중에야 깨달았다. 《엑스맨》의 이야기 구도가 다수 사회 속 소수자들에 대한 우화로 읽힐 수 있다는 사실을. 애초에 내가 히어로 영화에 끌렸던 이유는 감각적인 미장센이나 컴퓨터 그래픽보다는, 영웅들의 ‘특별함’을 다르게 볼 수 있는 영화적 다양성 때문이었다. 그래서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Marvel Cinematic Universe, MCU)에 자연스럽게 관심을 갖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누군가는 MCU 세계관의 무궁무진함에 매력을 느끼고, 또 누군가는 수많은 영웅들의 협업 액션에 마음이 끌렸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MCU가 영웅을 해석하는 방식이 삐딱해서 좋았다. 이런 기호 때문에 《마블 영웅들이 세계를 구하는 방법》을 읽고 기쁜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 이 책은 내가 그동안 살펴본 마블 영화나 시리즈에 대한 해석이 채워주지 못하는 부분을 충실하게 채워주었다. MCU의 팬을 자처하는 이들은 현재의 MCU가 근본을 잃었다며, 과거의 영광을 찾으려면 현재의프로젝트를 중단해야 한다고 외친다. MCU의 최근 부진이 "정치적 올바름" 때문인지, 영화 자체의 문제인지는 여기서 논외로 하겠다. 중요한 것은 MCU가 왜 점차 ‘소수자 서사’를 강화하는 선택을 했는지, 그리고 이것이 영화에서 어떻게 형상화되었는지를 밝히는 일이다. 《마블 영웅들이 세계를 구하는 방법》은 바로 이러한 변화를 포착한 책이다. 책의 목차만 봐도 MCU의 변천사와 그들이 추구하는 방향에 대한 작가의통찰력을 확인할 수 있다. 책은 다섯 파트로 구성되어 있다. 먼저 과거 역사로 남은 캐릭터들(<엔드 게임 이후, 사라진 영웅들>)을 다룬 후, 영웅 서사에 대한 대중의 시선 변화에 따라 설정이 조정된 캐릭터들(<변화 속에서 살아가는 영웅들>)을 다룬다. 이어서 MCU에서 빼놓을 수 없는 ‘악당의 행동 패턴을 보여주는’ 영웅들(<영웅과 악당 사이, 악당이 된 영웅들>)을 조명한다. 그리고 우주, 마법, 과학적 세계관 속의 영웅들(<새로운 세계관을 보여주는 영웅들>)을 다룬다. 마지막으로 저자는 MCU의 미래를 책임질 영웅들(<소수성을 무기로 삼는 영웅들>)에게 시선을 돌린다. 특히 인상 깊었던 부분은 <변화 속에서 살아가는 영웅들> 파트였다. 여기에는 블랙 팬서와 헐크, 토르에 대한 해설이 등장한다. 저자는 《블랙 팬서》 시리즈에서 유색인종 서사 변화의 조짐을 읽어낸다. 아프리카와 메소아메리카의 문명이 ‘뉴 노멀’이 된 사회, 그곳에서는 유색인종 간의 갈등과 여성 영웅의 등장이 두드러진다. 《블랙 팬서》는 기존의 ‘1세계 남성 위주의 서사물’이 갖는 인물 구도와 스토리 라인을 유색인종 기반으로 재구축한다. “《블랙 팬서》 시리즈는 흑인들의 문제를 백인과의 갈등으로 풀어가지 않는다는 점에서 우리의 예상을 벗어난다. 백인들이나 그들의 사회도 비중 있게 등장하지않는다. 《블랙 팬서》에서는 먼저 와칸다 내부의 갈등이 불거진다. …… 《블랙 팬서: 와칸다 포에버》에서도 와칸다는 백인 사회가 아닌 메소아메리카의유색인종 사회와 대립한다.” (본문 53쪽) 《헐크》 시리즈에 대한 해석 역시 흥미로웠다. 저자는 기존의 헐크가 야성적인 자아 '헐크'를 소멸시켜야 할 존재로 그려졌다면, MCU의 헐크는 다중적자아와의 공존을 이야기한다는 점에 주목한다. 또한 책에서는 '쉬헐크'의 등장이 여성 차별과 혐오에 대한 MCU식 비판이라는 점도 지적한다. “영웅의삶에 관심이 없었던 제니퍼는 헐크의 힘을 갖게 되었다는 이유로 영웅처럼 살기를 원하지도 않고, …… 지적인 과학자의 친절 뒤에 자신이 언제나 화가나 있다는 사실을 감추며 살아가던 브루스의 비법은 제니퍼에게 소용이 없다. 제니퍼는 자신이 이미 화를 참는 데 전문이라고 말한다.”(본문 66쪽) 이처럼 《마블 영웅들이 세계를 구하는 방법》은 MCU를 색다른 눈으로 바라보게 한다. 특히 시대가 변화함에 따라 영웅 캐릭터가 어떻게 변화했는지를설명하며 '지금-여기’에서 MCU를 바라볼 수 있도록 돕는 저자의 관점이 탁월하다. 기존의 MCU 영화나 시리즈물에 대한 해석은 '떡밥'이나 숨은 복선찾기에 급급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마블 영웅들이 세계를 구하는 방법》의 등장은 반가운 소식이다. 이 책은 MCU의 영웅들이 우리 시대에 어떻게 소화될 수 있는지를 분석한다는 점에서 기존의 마블 해설 콘텐츠와 차별화된다. 또한, 이 책은 마블 영화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에게도 추천할 만하다. 마블 영화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들은 단순히 영웅 서사의 웅장함과 숭고한 모습만을 강조한다는 편견을 가지고 있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이 책을 읽고 나면 MCU의 세계관이 단순히 '영웅들이 사는 세상'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다른 모든 존재가 그렇듯 영웅도 늙고, 병들고, 죽는다. 우리는 영웅들이 겪는 거대한 고난뿐 아니라 생애주기에 따른 노화와 질병, 죽음 앞에서 깊은동질감을 느낀다.” (본문 158쪽) MCU는 《아이언맨》 이후 히어로를 소재로 하되, 다양한 삶의 이야기를 그려내고 있다. MCU가 단순히 자본과 물량으로 구축된 세계관이 아니라는 사실을, 히어로 영화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들도 이 책을 통해서 이해할 수 있기를 바란다. MCU는 2010년대의 ‘스타워즈’ 시리즈이자 ‘드래곤볼’ 시리즈다. 스타워즈와 드래곤볼이 20세기 관객과 독자들에게 즐길 거리를 제공했다면, 지금은마블의 영웅들이 우리와 발맞추어 살아가는 시대다. 마블 팬들은 영웅의 퇴장과 죽음에 영화 속 등장인물처럼 슬퍼하고, MCU의 흥행 성적에 마치 자신의 일처럼 심각한 토론을 벌인다. 물론 최근 MCU를 향한 불만 섞인 목소리도 커지고 있다. "여성, 유색인종, 소수자, 사회적 약자 코드를 지나치게 강조하여 영화의 완성도를 해친다"는불만이 팬 커뮤니티에서 제기된다. 하지만 MCU의 이러한 변화는 자연스러운 흐름이다. MCU가 미국과 유럽을 넘어 전 세계에서 사랑받게 되면서, 백인 남성 중심의 세계관에서 벗어나는 것은 필연적인 선택이었다. 《마블 영웅들이 세계를 구하는 방법》은 제목처럼 마블 영웅들이 각자의 방식으로세계를 구하는 이야기를 다루지만, ‘콘텐츠 회사 마블’이 다원화된 시대에 어떻게 적응하며 캐릭터를 변화시키는지 분석하는 책이기도 하다. MCU의 변화와 앞으로의 행보를 응원하는 입장에서, 새로운 영웅의 등장을 조롱하는 반응을 보면 안타까운 마음이 든다. 다수의 생각과 다른 관점으로 콘텐츠를 받아들이는 내 생각이 특별한 것이라고, 오만한 우월감(?)에 빠지기도 했다. 하지만 《마블 영웅들이 세계를 구하는 방법》을 읽고 나서 응원군을 만난 듯한 기분을 느꼈다. 이제는 기계적 비판과 ‘개연성’ 타령에서 벗어나 MCU의 영웅들을 깊이 있게 이해할 새로운 시각이 필요하다. 《마블영웅들이 세계를 구하는 방법》이 바로 그러한 역할을 하는 책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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