옆에 있는 것들

[ 미미 ]

:: 루쉰 잡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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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도 삶이야

1930년대 상하이. 어느 여름 날 루쉰은 밤중에 잠에서 깨어나 이렇게 말했다. “살아야겠소. 무슨 말인지 알겠소? 이것도 삶이야. 주변을 둘러보고 싶소.” 그가 둘러봐야겠다는 주변은 다름 아닌, 늘 잠이 들고 잠이 깨는 곳 그리고 지금은 아파 누워있는 자신의 방이다.

고작해야 자신의 방. 누구에게나 자신의 방은 아무렇지도 않은 장소다. 잠이 들기 전 되는대로 읽던 몇 권의 책, 겨우내 덮어서 내 몸과 같아진 이불, 낮이고 밤이고 쳐놓은 커튼의 무게까지 그저 그런 낡은 일상과 같은 방. 평소 아무렇지도 않은 이 방이 의미를 갖게 되는 때는 특수한 경우다. 이를테면 비상 상황 같은 때, 뭔가 야시꾸레한 일이 이루어지거나 아니면 아플 때 같은.

루쉰은 지금 아프다. 오랜 지병인 폐병으로 인해 1936년 이 무렵, 몇 번을 앓다 회복하다 그랬다. 그런 그가 혼곤한 잠에 빠졌다 문득 깨어나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살아야겠소. 이것도 삶이야.

위중한 병은 유사 죽음의 경험이다. 이것이 죽음 경험이기에 눈을 뜨는 순간, 살아야겠다는 욕망이 솟아오르고, 아프지만 아직 죽지 않은 지금의 이것 역시 삶이라는 사실이 제 모습을 드러낸다. 루쉰을 살고 싶게 만드는 것은 인간으로서의 생명 작용이겠지만 그 생명을 유지시키게 하는 것은 의외로 이런 거다. 삶의 생생한 한 조각들 같은, 이런 거.

낯익은 벽. 그 벽의 모서리, 낯익은 책 더미, 그 언저리의 장정을 하지 않은 화집, 바깥에서 진행되는 밤, 끝없는 먼 곳, 수없이 많은 사람들, 모두 나와 관련이 있었다. 나는 존재하고, 살아있으며, 앞으로도 살아갈 것이다. 나는 처음으로 나 자신을 더욱 절실하게 느꼈다. (『차개정잡문 말편』, 「이것도 삶이다」, 그린비, 761쪽 인용)

이런 게 절실하다. 절실하게 느낀다는 것 자체를 느껴본 적이 언제 적 일인가. 생각해보면, 오래도록 살아온 자신의 삶의 방식이란 게 침대와 책, 몇 가지의 옷들, 몸으로 살아오지 못 했던 많은 시간들의 집적에 불과하다는 걸 최근에야 알게 됐다. 그와 동시에. 느끼지 못하는 것은 나에 대한 것뿐만이 아니라는 것 역시.

 

전사와 수박

이 이야기를 하자. 시시하고 하찮은 모든 것들이야말로 삶인 이 이야기는 몸의 일이다. 몸은 불가피하다. 어떤 경우라도 배고프면 먹어야 하고 똥 누고 싶으면 배설해야한다. 인간의 의지로 배고픔이나 똥을 어쩔 수 없다. 어쩔 수 없는 건 어쩔 수 없다는 걸 몸은 온몸으로 말하고 있다.


루쉰은 이걸 이렇게 말한다. 제 아무리 천하를 호령하는 영웅도 밥을 먹고 잠을 자야한다. 비분강개하고 격앙된 사상을 피력하는 유명인사도 집에 가서 아내와 애들하고 노닥거리기 마련이다. 잠을 자지 않고 밤새 나라 걱정하는 영웅, 애들하고 노닥거리지 않는 유명인사가 있다고 말해진다면, 그것은 그들에게 잠을 자고 애들하고 노닥거리는 때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루쉰은 말한다. 수박 하나를 먹을 때조차 국토가 분단되어있음을 상기하라고 가르치는 사람을 경계하라. 그는 몸을 도외시하는 사람이고 삶을 경시하는 사람이다.

전사라고 수박을 먹을 때, 먹으면서 생각을 하는 의식을 치를까? 내 보기에, 그러지는 않을 것이다. 그는 아마, 목마르다, 먹어야겠다, 맛이 좋다고 생각할 뿐, 그 밖의 그럴싸한 이치는 떠올리지 않을 것이다. 수박을 먹고 기운을 내서 싸운다면 혀가 타고 목구멍이 마른 때와는 다를 것이니 수박이 항전과 전혀 무관하지는 않을 것이지만, 어떤 방식으로 생각하라고 상하이에서 설정한 전략과는 관계가 없다. 그런 식으로 온종일 얼굴 찡그린 채 먹고 마신다면 얼마 안 가 식욕을 잃을 것이니, 적에겐들 어찌 맞설 수 있겠는가. (『차개정잡문 말편』, 「이것도 삶이다」, 그린비, 763쪽 인용)

수박 하나를 먹는데도 전사처럼 먹어야 된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 그들이 말하는 전사처럼 수박 먹는 법의 매뉴얼에 대해 상상해봤다. 첫째, 수박을 쪼갤 때 분단된 조국의 현실을 생각할 것. 둘째, 이 수박을 먹고 기운내서 서양 열강들과 침략자 일본과 열심히 싸우는 데 일조해야한다고 생각할 것. 셋째, 수박을 또 먹고 싶다는 생각은 개인적 욕심이니 자나 깨나 나라 사랑만 생각할 것 따위가 아닐까.

이것을 수박 대신 인문학 공부로 바꿔도 마찬가지다. 매순간 전사처럼 공부해야 한다면? 수박은 소화가 좀 안 될 뿐이지만 공부에 체하면 약도 없다. 이렇게 되면, 비상 상황이다. 사랑하는 사람의 눈을 들여다보는 일도 그들과 손 한번 잡아보는 일도 불가능하다. 이런 상태가 비상 상황이라는 것을 알면 그나마 다행이다. 만약 이 상황을 감지하지 못하면, 책을 읽느라 주변에 대한 감각은 무시된다. 우리에게 낡고 소중하며 시시한 일상이 있었다는 사실을 망각하게 된 불감증의 몸.

인간은 수박을 먹는다. 전사도 수박을 먹는다. 사람인 전사가 수박 먹는 법은 단지 목이 마르다, 먹어야겠다, 맛이 좋다고 생각할 뿐, 전사처럼 먹어야 한다는 강박으로 먹을 필요는 없는 것이다. 삶을 딱딱하게 만들고 몸의 감각을 무시하는 모든 이론과 사상은 거짓이다. 먹고 싸는 육체와 대면하지 않는 인간주의가 과연 존재할 수 있을까.

인간은 공부를 한다. 지금 같은 세상에서 인문학 공부를 하고 있는 어떤 종류의 인간이라 할지라도 우리는 몸을 가진 인간이다. 몸이 조건인 인간이 공부하는 법은 외부에 있지 않다. 책을 몸으로 읽는다는 것은 남들의 해석이나 법칙이 아닌, 내 몸에서 느껴지는 작고 절실한 무엇을 감각하고 느끼는 일이다. 그것은 이제까지 내 옆에 있던 익숙한 ‘나’에 대한 다른 감각이자 내 옆에 있는 ‘너’와 ‘그’를 감각하게 되는 일이다.

내 안과 내 옆의 모든 ‘낯익은 벽’들을 생생하게 느낄 수 없게 되었다는 게 내 문제였다. 생생하게 느낄 수 없게 된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이렇게 된 것에 갱년기든 심리적인 것이든 이유를 어디에 갖다 대든 몸이 달라졌다는 것은 어쩔 수 없다. 하지만 비관은 이르다. 나의 무감각에 대한 문제 제기를 다른 감각에 대한 가능성으로 바꿔보자. 그러면 역설적이게도, 이전과 달라진 몸, 잘 못 느끼게 된 이 몸을 자각하게 되며 느껴지는 다른 것들이 있다.

몸은, 단지 건강이나 양생을 뜻하지 않는다. 인간은 단지 ‘정신’으로만 이루어져있지 않다는 것. 이걸 안다는 것은, 고담준론의 인간을 벗기고 살아있는 인간을 보게 만든다. 뿐만 아니라, 과거에서부터 현재까지 내 몸에 가해지는 규범과 질서를 감각하고, 그 모든 전제로부터의 해방을 뜻한다.

몸의 감각이 달라지면 절실하게 못 느끼는 게 아니라, 이전과 다른 것을 절실하게 느낀다. 내 옆에서 벌어지는 자질구레한 일상만이 아닌, 옆에 있는 것들의 확장 같은 거. 이를테면, 유사 죽음 당시의 루쉰처럼. 그것은 일종의 ‘탈인간’이자 ‘다른 인간’의 탄생이다. 지금 밖에서 나와 무관하게 진행되는 밤과 나와 무관한 머나먼 장소들, 내가 알고 있고 혹은 알 수도 없는 사람들 역시 나의 삶을 구성하고 있다는 것을 몸이 감각했음을. 그리고는 마침내 이렇게 소리치게 되는 것이다. 이 무관계하고 시시하고 하찮은 모든 것들이야말로 삶이야.

2019. 5. 28.
해방촌에서 미미 씀.

미미

야매 루쉰 연구자이자 야매 철학자. 아무튼 야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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