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기

제목[차이나리터러시] 후루꾸 한문학2023-08-24 00:35: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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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루꾸 한문학


동철(동양철학)은 서럽다. 어디서도 손가락질 받기 때문이다. 요컨대 서양철학 전공자들은 그것도 철학이냐 묻는다. 전통 한학에 더 가까운 이들, 한문학과나 사학과는 글이나 제대로 읽을 줄 아느냐 묻는다. 한쪽에서는 철학이 아니라고 무시당하고, 다른 쪽에서는 전통을 모른다고 무시당한다. 과거에는 발끈했는데 지금은 그러려니 한다. 그래도 나름 소탈해지는 데까지는 꽤 많은 시간이 걸렸다. 
 

전자보다는 후자의 시선이 껄끄러웠다. 왜 그랬을까? 모르겠다. 무튼, 이쪽에서 공부하다 보면 나름 뿌리 깊은 가문의 후예들을 종종 만나게 된다. 예컨대 이런 식이다. 누구는 어릴 적 할아버지에게 <통감>을 익혔다더라. 제 족보도 모르는 이가 들으면 부러운 이야기이다. 한편 나름의 정통 코스를 수료한 이들도 있다. 어디 서당을 다녔고, 누구에게서 수학했다는 식이다. 지금은 어떨지 모르겠으나 예전에는 '지곡서당' 출신이 유명했다. 거기에 들어가면 <사서>를 달달 외고 나온다더라. 나도 열심히 외워보려 했으나 결국 포기하고 말았다. 게으름 때문일까? 이제는 이런 질문마저 든다. 그걸 외워서 무엇 하려고? 검색하면 다 나오는 것을. 나아가 이런 물음도 든다. 해석까지 외는 거가 무슨 공부가 되겠는가?


역시나 저자는 번역의 문제를 운운하며 여전히 빻은 소리를 줄줄 늘어놓는다. 민족의 언어 말살에 대한 저자의 고민은 한 시대의 유산이라 하자. 우리말보다 일본어가 익숙한 시대가 있었다 하니. 고전 번역에서 전통 한학을 계승해야 한다는 이야기는 머리가 지끈하다. 대관절 전통 한학이란 무엇이더냐? 전통 한학 언저리에서 맴돌아 그런지 별로 수긍할 수 없는 이야기 투성이다.


최근에 한문을 두루 가르치는 입장에서 맞이하는 구체적인 문제들을 늘어보자. 우선 '훈-음'으로 한자를 외는 버릇. 그놈의 '하늘 천'이 문제다. 낱글자를 외는 것이 한문 공부의 처음이자 끝인 줄 안다. 한자급수시험에 애쓰는 사람들을 보면 안타깝다. 어느 언어에 '단어장 외기' 시험이 그 언어의 수준을 평가하는 시험이 되더냐. 무식한 단어장 외기는 도리어 그 언어를 익히는데 장애가 된다. 足을 보고 '발 족'이렇게 외치는 사람을 두고 늘 이야기한다. 문장에서는 '발'이라는 뜻으로 쓰이는 경우가 별로 없어요. 그래, '부족不足'이란 발이 없다는 뜻이더냐? 아니면 걷지 못하다는 뜻이더냐? 


낡은 방식으로 무식하게 왼다는 것도 문제다. '가로 왈曰'이라고 외나, '가로되'라는 말이 사라진 것은 생각하지 못한다. '아우 제弟'는 어떤가? '아우'라는 말을 읽지도, 듣지도, 말하지도 않은 지가 까마득하다. 이렇게 한문을 외고 익히는 이들은 '현토'를 꾸역꾸역 붙여댄다. "子ㅣ 曰 學而時習之면 不亦說乎아" 이것이 전통 한학의 유산이라지. 문제는 낡은 방법인 데다, 문장의 의미를 전통의 굴레, 즉 보수적 성리학의 틀에 가두어 놓는다는 점이 큰 문제다. "五十以學易면 可以無大過矣리라"라는 문장은 공자가 오십이 되어 <역경易經>을 배우기를 바랐다는 문장으로 읽는다. 그러나 미야자키 이치사다는 易을 亦의 오자로 본다. "五十以學, 易(亦)可以無大過矣"라는 식으로 읽을 생각이 가능할까? 더 큰 문제는 현토를 붙여 읽다가는 한문 문장의 구조를 더 파악하기 어렵다는 점이다. 한문의 내재적 구조보다 우리말의 조사와 어미에 의존하니까.


옥편의 편재도 문제다. 중국어 사전을 손에 쥐고 받은 충격. 중국어 사전은 한자 부수순으로 엮여있지 않다. 소리 순으로 되어 있는 거다. 얼마나 편한가. 부수가 한자를 이해하는데 도움을 주는가? 과연 부수 공부가 오늘날 얼마나 유효한지는 모르겠다. 艸과 艹이 같다는 것을 모르는 게 글을 읽는 데 얼마나 큰 영향을 줄까. 그러면서도 과연 '음'으로 읽는 게 중요한가 의문이 들기도 한다. "力拔山兮氣蓋世"를 가르치는데, 자꾸 역발산'해'로 읽는다. '혜兮'를 '해'로 읽는다 한들 무슨 문제일까? 나아가 글에서만 쓰이는 저 글자의 음을 알지 못한다는 게 무슨 문제일까? 오늘도 食을 '식'으로 읽지 말고 '사'라고 읽으라 가르쳤다. 그러나 '식'이라고 읽은들 무슨 큰 차이가 있을까. '사'로 읽으면 먹이다는 뜻이 된다. 그래도 그냥 '식'으로 읽고 '먹이다'는 뜻이 있다는 것을 아는 것이 더 경제적이지 않나? 중국 사람들도 shi로 읽지 si로 읽을까 모르겠다.


더 중요한 문제는 '전통 한학'이라는 틀에 갇혀 한문이란 곧 '사서四書'라는 유가 경전을 익히는 것만 생각한다는 점이다. 그것도 주희 주석에 근거해서 해석하는 것이 전부라고 생각한다. 그러니 한문 공부를 하는 사람은 <논어>, <맹자> 따위만 읽을 줄 안다. 그 이전에는? <천자문>, <사자소학>, <명심보감> 따위만 있는 줄 안다. <삼자경>, <백가성> 따위는 모른다. 옛사람들이 읽었던 책을 그대로 읽을 필요도 없고, 옛사람이 읽었던 방식대로 읽을 필요도 없으나, 중요한 질문이 빠져있다.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한문은 무엇인가? 


'사서삼경'이든 '사서오경'이든 경전의 권위는 이미 옛 것이 되었다. 고전이라는 범주에서 나란히 늘어서 있을 뿐이다. 물론 <사서> 공부는 유익이 많다. 적어도 조선 선비들은 <사서>에 뇌를 절이는 것을 지상 과제로 삼았으니. 조선 선비들의 사고 구조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사서를 읽는게 좋다. 그게 아니라면 <사서>를 먼저 읽어야 하는 이유가 있을까. 잘 모르겠다. 필요에 따라 다른 식의 접근도 얼마든지 가능할테다. 비슷한 맥락에서 <주역>, <춘추>, <시경>을 읽는데 회의적이다. 태반의 사람들은 경전으로 저 텍스트들을 읽는다. 경전으로 숭상하는 저 숭배의 찬양에서 제대로된 '번역'이 가능할까 모르겠다.


번역이란 옛글을 오늘날의 말로 옮기는 작업이다. 누군가는 소통과 해석의 작어이라 할텐데, 소통과 해석에는 평등한 수평적 관계가 전제되어야 한다. 한문이 하나의 규범으로, 하나의 우상으로 전제되어 있다면 번역은 가능하지 않다. 태반의 번역이 읽기 껄끄러운 이유가 여기에 있지 않나. 우리글은 한문에 복무하는 시종의 역할로 소환된다. 여기에는 '고어투'라는 핑계로 격식있는 언어로만 번역하는 문제도 있을 테다. "子ㅣ 曰 不患人之不己知오 患不知人也ㅣ니라" 이 문장을 이렇게 옮긴다.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남이 자신을 알아주지 않을까 걱정하지 말고, 내가 남을 알아주지 못함을 걱정해야 한다.'" 이렇게 옮기면 어떨까. "남이 나를 몰라준다고 투덜대지 말고 내가 남을 몰라줄까 걱정하라니까."


전통 한학을 배우지 않아 그런지, 전통 한학의 장점을 모르겠다. 전통 한학은 낡은 방식을 고수하는 바람에 한문을 '타자화'하여 객관적, 효율적 학습의 방식을 고민하지 못하게 막아버렸다. 뿐만 아니라 일부 유가 텍스트를 경전으로 숭상하며 정통적인 해석을 고수하고 강요한다. 자유로운, 개별적 해석을 방해하는 장애물이다. 나아가 오늘날 우리말과 고대 한문의 수평적 관계를 소거하여 번역의 여러 가능성을 애초에 차단한다. 


스스로 나는 후루꾸 한문학을 했다고 생각한다. 이곳저곳을 기웃거리며 슬쩍슬쩍 배웠다는 뜻이다. 그래서인지 나름의 장점이 있더라. 나름 한문을 익히는 여러 노하우들을 체득해놓았다. 그런가하면 이런저런 정보를 활용하는데도 거리낌이 없다. 중국어 해석이 좋으면 그것을 참고하면 되고, 영어 번역이 좋으면 그것을 참고하면 된다. 한국어를 모국어로 쓰는 사람도 이해하기 어려운 모호한 우리말 해석을 찾아볼 이유가 무엇일까.


"有天地自然之聲, 則必有天地自然之文. 所以古人因聲制字, 以通萬物之情, 以載三才之道, 而後世不能易也." 오늘 이 문장을 읽으며 한참 고민했다. '소이所以', '~하는 것'으로 읽어야 할지 ‘suoyi所以’ '그러므로'라고 읽어야 할지. 골똘히 생각했는데 후자로 보아야겠다. 한문투 해석이 아니라 중국어투 해석이라는 생각도 들지만 뭐, 저렇게 읽히는 것을 어찌할까.


고전의 번역과 해석은 고대인의 생각을 그대로 고스란히 오늘날에 전달하는 것일까. 아니면 번역에는 어쩔 수 없이 굴절과 오독이 수반되는 것일까. 거리가 멀수록 고대인의 생각과는 영영 동떨어지는 게 아닐까 싶다. 뭐, 핑계를 대자. 주희도 지 나름대로 꼴리는 대로 읽히는 대로 읽었으니. 


참, 후루꾸 한문학이라 하니 누구는 누구는 요행을 뜻하는 일본어를 그냥 가져다 쓰면 안된다 이야기할 테다. 순수 한국어라는 게 대관절 무엇인지 모르겠다는 말로 대신한다. 조카는 足下에서 왔는지 族下에서 왔는지 모르겠다. 쓰다 보면 그 출처와 근원은 별로 중요하지 않기도하다. 언어란 그렇게 먼지구뎅이에서 스스로 제 모습을 변형해 나가는 것이다. 민족의 얼이니 핏줄이니 하는 데서 나오는 게 아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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