젠트리피케이션 없는 자본주의는 가능한가

[ 삼월 ]

:: 밑도 끝도 없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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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 영국에는 귀족과 평민 사이에 ‘젠트리’라는 계급이 있었다. 귀족의 작위는 장자한테만 상속되므로, 작위를 상속받지 못한 나머지 자식들은 귀족도 아니고 평민도 아니었다. 귀족은 아니지만 좋은 교육 받고 자란데다 재산도 많이 상속 받은 이들이 바로 ‘젠트리’다. 헨리8세가 종교개혁을 한 이후에는 쓸모없게 된 수도원의 재산을 사들여 지주가 되었고, 사실상 지방 영주 노릇을 했다. 공부를 하여 중앙관료로 진출하거나, 의사 등 전문직업을 갖는 경우도 많았다. 이들이 영국의 자본주의를 이끌었다고 흔히들 말한다.

젠트리는 중세 귀족 영주들처럼 사람들을 가혹하게 통치하지 않았다. 경제적 여유와 지식이 있었으므로, 무급으로 지방행정관 활동을 하기도 했다. ‘Gentleman’이라는 단어는 젠트리에 대한 존경에서 나온 단어이다. 경제적 여유와 지식, 존경까지 모든 것을 다 가진 듯 보이는 젠트리였지만, 귀족은 아니었다. 열등감을 해소하기 위해 젠트리는 자신들끼리 모여 살면서 귀족들과 차별화된 생활방식을 추구했다. 당연히 젠트리들이 모여 살던 지역의 부동산은 인기가 높았다. 젠트리의 생활방식을 동경하는 이들이 너무 많이 모여들면, 싫증난 젠트리들이 다른 곳으로 이주하기도 했다. ‘젠트리피케이션’이라는 용어가 여기서 나왔다.

서울은 지금 저렴하면서도 살 만한 매력이 있는 동네를 찾아 도시를 떠도는 현상, 젠트리피케이션으로 수년째 몸살을 앓고 있다. 예술가들의 감각이 저렴한 비용으로 동네의 매력을 상승시키면, 어김없이 돈이 모여든다. 돈이 모여들면 원래 동네에 살던 이들과 가난한 예술가들은 임대료 상승을 감당하지 못해 동네를 떠나야 한다. 활발한 변화와 활발한 이동은 서울에 생동감을 부여하고 있지만, 한편으로 시민들의 정주권을 위협한다. 자본주의가 존속하려면 이런 변화와 이동이 계속되어야 하고, 정주권에 대한 위협 또한 감내할 수밖에 없다. 여기서 한 가지 질문이 생겨난다. 과연 젠트리피케이션 없는 자본주의가 가능할까?

사람이 거의 살지 않아 해 지면 지나다니기도 겁났다는 인구 24만의 작은 도시 목포의 구도심에 난데없는 투기 바람이 불었다고 난리가 났었다. 수도권에서 먼 도시들의 구도심에도 요즘 재개발을 넘어선 도시재생의 바람이 불고 있다. 도시를 재생시켜야 하는 이유는 더 이상 도시가 스스로 생동감을 만들어내지 못하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시·군·구 지역의 40%가 30년 후 소멸될 것이라는 통계상 예측이 있다. 인구가 점차 줄고 있는 지역의 소도시에는 도시 내부의 변화와 이동을 주도하는 젠트리 역할을 할 예술가들도 없다. 당연히 젠트리피케이션도 발생하지 않는다. 장기적인 침체와 소멸만 예상될 뿐이다.

이런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지금 주로 쓰이는 해결책은 지역 개발을 위한 정부의 공공자금 투자이다. 제대로 된 타당성 조사도 없이 지역의 균형개발을 추구한다는 명목으로 눈먼 돈들이 각 지역에 할당된다. 아무런 ‘이해관계’도 가지지 않는 공무원들이 예산을 빠르고 편하게 집행해버리기 위해 건물을 짓고, 도로를 내고, 산업단지를 만든다. 아무런 ‘이익충돌’도 발생하지 않지만, 적게는 수십억에서 많게는 수조원의 예산을 들인 개발사업의 이익을 가져가는 곳이 건설회사 말고 또 있을까.

이런 결과는 기업이 탐욕스럽고, 정부가 무능하고, 공무원이 나태해서 생기는 게 아니다. 돈과 사람이 모이지 않아 활기가 사라진 도시를 재생하는 문제는 자본주의가 스스로 모순을 극복하고 재생함을 의미한다. 문제가 나타나는 지점과 제시된 해결방향은 자본주의의 세계관 안에 있다. 가장 적은 비용으로 최대의 이익을 취하고, 자본의 흐름이 계속해서 사회를 유지할 수 있도록 만드는 것. 그런데 정작 도시재생에서 문제를 풀어가는 방식은 전혀 자본주의적 태도를 취하지 않는다. 아무런 ‘이해관계’도 없는 이가 사업을 계획·관리하고, ‘이익충돌’이 일어나서는 안 된다는 태도. 바로 여기에 난점이 있지는 않을까?

다시 말해, 자본주의적 모순을 자본주의적 방향으로 해결하는 데에 과연 비자본주의적 방식을 사용해서 성공할 수 있을까? 애초에 문제의 시작과 끝이 자본주의인데, 중간과정에서만 탐욕을 배제하고 윤리적 선택을 하면 된다는 판단은 무리가 아닐까? 오히려 가장 자본주의적인 방식으로 이 문제를 해결해야만 도시재생이라는 자본주의적 해답에 도달할 수 있지 않을까? 자기 소유의 재산을 적극 지키고 불려나가겠다는 자본주의적 정신을 통해서 말이다. 문제의 해결방향을 도시재생이라는 자본주의적 테두리 안에 두는 한 이 문제는 해결되지 않는다. 도대체 누가 자신의 재산도 아닌 남의 재산을 불리기 위해 열렬히 재능과 노력을 소비하겠는가.

젠트리의 성장과 젠트리피케이션은 자본주의의 성장과 궤를 같이 한다. 자본주의의 명예이자 활력인 동시에 그늘이자 추악함이다. 어느 한 면만을 가지고, 나머지 면을 버릴 수는 없다. 뭔가를 고쳐 쓰는 데에는 한계가 있는 법이다. 재생 자체가 변화를 거부하는 연명의 방편일 수도 있다. 자본주의의 변화는 원하지 않으면서 자본주의의 병폐만을 치유하려는 소박하고 순진한 태도가 낳은 방편. 자본주의 사회에 깊이 적응하여 살아가는 우리들은 ‘이해관계’가 없는 일에 쉬이 움직이지 않는다. 애초에 ‘이익충돌’이 일어나지 않는 이유는 아무도 이익을 취할 수 없거나, 철저하게 한 쪽만 이익을 취하는 구조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아무리 많은 돈을 쏟아 부어도 ‘이해관계’나 ‘이익충돌’ 없이 무언가가 해결되리라는 기대를 버리자. 그 해결이 자본주의적 모순에 대한 해법이 된다는 기대 역시.

삼월에 태어나서 삼월.
밑도 끝도 없이, 근거도 한계도 없이 떠들어대고 있다.